7시도 되지 않았는데 일찍 해가 저물었다. 낮은 뭔가 수많은 소음들과 분주함이 가득한 느낌인데 해가 저물면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이제는 아내와 계단을 오르기 위해 문을 나서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많이 대면서 귀가 시간을 최대한 늦췄다. 때로는 꼭 가야 하는 일이 아니어도 일을 만들어서 늦게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계단 오르기 운동도 일주일이면 주말을 포함해 2-3회 하기 바빴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매일 아내와 같이 문을 나선다. 평소 아내가 하는 유일한 운동이 요가인데 그마저도 코로나로 인해 불규칙적이어서 같이 하는 이 유산소 운동이 아내의 건강을 위해 작으나마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뿌듯하다. 나 역시 이 운동을 통해 생각도 정리하고 감정도 정리하고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되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실천이 동반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공상하는 시간이 줄었다. 공상이 줄어드니 그 공상을 말로 표현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거나 저울질하면서 쓸데없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발생시키는 일도 줄어들었다.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서 그런 부질없는 생각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런 감정들이 발생하더라도 계단을 오르며 가쁜 호흡을 내쉴 때 그것들을 몸 밖으로 조금씩 밀어낸다. 괄목할 수치는 아니지만 몸무게도 3킬로그램가량 줄었다. 다이어트 효과보다는 균형 잡힌 몸을 보고 있노라면 뿌듯함도 밀려온다. 손에 뭔가를 잡고 놓치지 않으려 허망한 노력을 했던 내가 비움의 매력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3년 전 큰 딸과 아들과 같이 일본 교토를 갔다. 같이 걸을 수 있는 길로 금각사가 아닌 은각사를 택했다. 은각사는 깊은 깨달음과 마음속 깊이 울림을 주었다. 은각사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박한 정원과 아담한 건물들 사이로 아득하게 펼쳐진 교토 시내를 보는 순간 문득 나는 내 손에 뭔가를 잔뜩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살며시 꼭 쥐고 있던 손을 슬며시 펼쳤다. 그 순간 몸과 마음도 역시 펴지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인생의 지혜를 길어 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은 그렇게 물렁하고 쉽게 내가 발 디딜 곳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깨달았던 순간은 잠시 잠깐이었고, 일상으로 복귀한 나는 다만 그 깨달음의 여운만을 겨우 쥐고 있었다.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깨닫고 깨달은 바를 실천하지 않으면 그 깨달음이란 아무 소용이 없다. 계단 오르기는 단순히 운동에 머물지 않고 작은 깨달음을 주는 배움의 길로 나를 안내하고 있다. 저기 계단들이 또렷이 나를 밟고 올라가라고 손짓을 한다. 그리고 나는 계단을 밟고 오른다.
계단을 오르며 창밖 하늘을 보는 것은 계단을 오르는 즐거움 중 하나다. 세트가 반복되며 구름들이 뭉치고 흩어지는 광경을 보는 즐거움을 사진 속에 담는다. 계단을 오를 때 휴대전화는 성가시지만 매 순간 달라지는 하늘의 모양을 포착해서 사진 속에 담는 일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드는 일이다. 뭉쳤던 구름들은 서서히 밤하늘로 흩어진다. 어둠 속에서도 하늘의 모양은 선명하게 보인다. 사진이 내가 본 것을 완벽하게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기술적으로 많이 발전한 스마트폰은 어느 정도 그 모양을 구현해낸다.
어제 20세트를 하고 난 바로 다음 날이라 약간은 우려를 했으나 첫 세트부터 아홉 세트까지 아무 이상을 느끼지 않았다. 그동안 단련된 몸의 수행능력이 향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단 오르기를 시작한 뒤 한 달쯤 지난 이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이웃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평소 계단 오르는 것에 대한 관심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다들 체중감소 효과가 얼마나 있었느냐고 물어보신다. 사실 체중감소 효과보다는 몸 전체의 균형이 훨씬 더 큰 효과임을 아내와 나는 알고 있지만 그걸 전달할 길은 막막하다.
더구나 몸과 정신적 균형에 대한 얘기는 꺼내기 어렵다. 감정을 정리하고 생각도 정리하고 새로운 생각을 캐내는 곳이 계단이라고 얘기하면 아마도 고개를 돌릴 것이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느 분이 말을 걸어오셨다. 16층까지 오르는 것도 두세 번 쉬면서 오르느라 힘들던데 어느 정도 운동량을 소화하고 있냐고 물어보신다. 그냥 다섯 세트에서 일곱 세트 정도 오른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정도에도 많이 놀라신다. 익숙해지기 쉽지 않은 운동이지만 익숙해지면 계단 오르기가 주는 매력에 빠지실 거라는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