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고향을 벗어나 강릉으로 갔다. 그리고 대학생활동안 서울생활을 했다. 물론 그 사이 자주 고향집을 방문했지만, 왠지 부모님께서 나를 기다려줄 것 같지 않은 위기감 같은 게 있었다. 1991년 8월 졸업 후 태백으로 내려갔다. 잠시라도 부모님 곁에서 살면서 자식노릇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과는 달리 게으른 나로 인해 오히려 아버님과 어머님을 성가시게 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침 아는 선배를 통해 중학생 영어를 가르치는 강사자리를 얻었다. 그즈음 아버님께서 모아두었던 돈 150만 원을 내놓으시면서 중고차를 하나 사라고 선물을 주셨다. 그렇게 장만한 포니 2를 타고 학원을 다녔다. 생각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첫 사회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이때 산 테이프가 김현식의 6집 앨범이다. 그전에 김현식의 노래를 접하기는 했어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내 사랑 내 곁에>에 담긴 그의 목소리는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했다. 노래 가사는 애절했지만 왠지 따뜻한 노래다. 이 앨범의 노래 모두 한 곡도 흘려들을 것이 없는 훌륭한 앨범이다.
학원강사들과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노래를 악보나 화면 없이 부르기는 쉽지 않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술 한잔하고 노래하는 것이 문화였다. 노래방이 보편화된 지금도 나는 당시를 떠올리게 된다. <한국사람>이라는 하모니카 연주곡은 애절한 선율이었고 <사랑 사랑 사랑>은 장난꾸러기가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신난다. 친구 일헌이도 참 좋아했었다. 이 친구는 지금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를 생각하면 이 노래가 떠오른다. <사랑했어요>는 이미 너무 잘 알려진 곡이다.
<추억 만들기>에서도 그는 애절한 가사를 허스키한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노래 부른다. 왠지 가슴깊이 묻어둔 여인과의 추억이 없이는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노랫말 속에 마치 작은 동화나라에 와있는 듯한 착각과 애절한 느낌이 묻어있는 노래다.
<겨울바다>야말로 이 앨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푸르스름하고 어둠이 짙은 동해의 쌀쌀한 겨울바다, 짙은 회색빛 차가운 서해바다에 잘 어울리는 노래다. 아늑한 남해바다는 아닐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블루스풍의 기타 전주에 뒤이어 맑게 부르는 그의 음색'겨울바다 나가봤지', 뒤이어 허스키 보이스로 '잿빛 날개 해를 가린'은 곧 이 노래가 엄청난 슬픔의 에너지를 토해낼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검푸른 겨울 바다 하얀 해가 울더니 노란 달이 어느 참에 내 눈길로 나를 보네 철썩이는 파도 곁에 가슴 치는 내 생각'에서는 녹록지 않았던 그의 삶과 노래에 대한 열정이 짙게 배어있다. 그것은 노래를 향한 에너지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빠져든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100번도 넘게 불렀다. 이 노래는 부를 때마다 그 느낌이 내 마음속에서 재창조된다. 노래에 몰입하다 보면 나를 잊고 오직 노래만을 응시하고 몰입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겨울 바다의 검푸른 파도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런 블루스풍의 노래의 흥이 내 몸에 밴다.
최근에 김현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유튜브로 몇 편 봤다. 단순히 술을 좋아했던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진한 인간의 내면과 사랑 그리고 헤어짐과 슬픔, 투병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 이 앨범은 그 자체의 작품성도 좋았지만 투병생활 와중에 만들었기에 그 가치는 더욱 빛난다. 다시 듣고 있는 지금 나는 1991년의 눈 내린 태백과 그해 겨울 강릉의 겨울 바다를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