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나무 Oct 24. 2021

홍어찜의 깊은 맛

동네 음식 자산의 재발견

생일은 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는 날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축하인사를 받거나 선물을 받거나 덕담을 받는 일이 자연스러웠고 응당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다가 세월이 조금씩 흐르면서 생일은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의 존재가 없이 나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스스로 성장하는 것 이상으로 부모님의 따뜻하고 잔 손길들이 있었기에 내가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로서 사회적인 역할과 가정에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일은 감사와 축하의 깊은 우물 안에서 나를 살리는 생명수를 길어 마시는 날이다. 


올해는 큰 딸과 아들이 모두 내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더욱 뜻깊은 생일을 맞는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하고 한편으로 대견하며, 약간은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다. 팔순이 한참 지나신 어머님께서 언젠가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돌아보니 자식 삼 형제 키우는 과정 자체가 행복했다. 특히 너희들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입히는 과정 자체가 너무너무 행복했단다." 내가 느끼는 약간의 섭섭함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곧바로 경제적인 독립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치를 만들고 가치 있는 삶 자체가 되기 위해서 사람은 늘 배우고 살아야 하므로,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내가 배운 것들을 공유하는 일이 산처럼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곧 그 약간의 섭섭함은 날아가버렸다.


한번 음식점을 방문해보고 그 음식점이 가진 내공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것은 끝없는 숙제일 수도 있다. 단 한번 방문해서 좋아하는 홍어삼합을 먹어보았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오늘 생일에 메뉴로 무엇을 선택할지 한참 고심하다가 그 집을 다시 방문했다. 평소 잘 안 먹어보던 홍어찜을 시험 삼아 주문했다.  평소 자주 찾던 충무로와 제기동과 공릉동에 있는 가게에 가서는 늘 홍어 삼함을 주문했었다. 안 먹어보던 것을 먹는 선택은 약간의 용기와 호기심이 필요하다.


한 점 먹는 순간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바로 곁에 이런 우아한 맛을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미처 찾지 못한 아쉬운 마음과 입안 가득 퍼지는 홍어찜의 향기와 맛이 만들어내는 감동이다. 막걸리 한 잔으로 생일을 자축하며 요즘 배운 단어를 연발한다. "찐이다" 옆 테이블에 계신 분들이 내 감탄사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 삼합을 드시다가 홍어찜을 주문하신다. 새로운 홍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다. 홍어찜의 깊은 맛을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 먹으면서 느끼면 그만이니까. 말이 가진 한계,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은 나의 일상을 더 깊게 단련시킨다. 


홍어회무침에는 공깃밥이 필수라는 후배님의 조언에 따라 밑반찬으로 나오는 홍어회무침과 밥을 조금 섞어 비빈다. 무침의 자극적인 맛과 밥의 부드러운 질감이 입안에서 잘 섞인다. 부드러운 얼갈이배추 가득 담긴 홍어애탕 역시 반찬으로 나오기에 아까울 만큼 독립적인 자리에서 나를 맞아준다. 


100세 넘게 장수하시고 있는 노년의 철학자는 100년을 살아보니 6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철이 들었다고 했다. 철이 덜 들었다고 생각하는 그 말씀에 안도했다. 문득 세월이 흐르면서 홍어찜의 깊은 맛처럼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입안 가득 맛의 여운은 동심원처럼 다음날까지 맴돌았다. 맛의 동심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치회와의 조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