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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Oct 31. 2021

두툼한 민어 살- 맛과 관계의 여운

대학생 때 인천 연안부두 근처 어시장에 갔었다. 민어회를 한 접시에 삼천 원에 팔았다. 생물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민어가 흔해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처음 먹는 민어의 부드러운 속살, 고소한 맛에 금방 친숙해졌다. 회 하면 광어나 우럭, 도다리를 떠올리는데 민어라니! 민어의 역사를 들여다보니 한 때는 저렴하게 구입해서 먹을 수 있었는데 여름 보양식으로 각광을 받으며 점점 비싸졌다고 한다. 



1년 동안 하나의 팀이 되어 수많은 과제, 도저히 한꺼번에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은 30개나 되는 과제를 추진해온 팀이 1년을 돌아보며 서로에게 수고를 위로하는 자리. 여름과 민어를 짝으로 생각했는데 오늘 민어가 좋다고 한다. 이렇게 넓고 두툼하게 손질한 민어회는 처음 본다. 칼날이 날카롭게 들어가지 않고 약간 투박하게 들어간 듯한데 그게 더 나의 시선을 끌고 미각을 자극한다. 자세히 보니 그게 칼날 자국이라기보다는 칼에 대해 민어 살이 반응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표면의 투박하게 거친 단면들....

한 점 입안에 넣는다. 민어 살이 내게 말을 건다. "이런 부드러운 맛은 처음이지?" 일본 사람들과 음식을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일본 사람들은 무순을 고급 요리로 여긴단다. 어느 노부부가 그 무순을 먹으면서 하던 대사는 내가 즐겨 쓰는 말이 되었다. "어머 무순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아요" 참 아름다운 표현이다. 음식이 내게 말을 건다는 표현. 사실 음식이 입안에 들어오면 미각 수용체를 통해 나를 자극하고 즐겁게 만든다. 그러니 어쩌면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 표정을 살필 겨를 없이 그 민어 살 한 점에 심취한다. 어떤 소스나 양념도 그 순백의 맛을 더 끌어올릴 것 같지 않다. 오직 그 한 점이 내 입안에서 변화하고 있는 지점에 집중한다. 한 점이 끝나고 다른 한 점을 집기 전에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며 잠시 숨을 돌린다. 이제껏 먹었던 민어의 맛을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강렬한 자극은 거의 처음처럼 느껴진다.

한번 더 강한 자극이 들어온다. 민어전이다. 굳이 말로 표현해야 할 길을 찾지 못한다. 다만, 너무 아쉬운 건 단 한 점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단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 인생을 문득 떠올린다. 단 한 번이므로 잘 살아야 한다. 좌고우면하고 남들과 비교하고 지척거리는 그런 지질함을 던져야 한다. 민어전의 부드러움과 안에 간직한 수많은 미각의 포텐들이 터지는 것처럼, 내가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포텐을 터뜨리며 멋진 삶을 만들어가야 함을 민어전을 먹으며 생각한다.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하는 자리에 출연한 음식이 최고의 선택일 때 서로를 위하는 분위기는 더 넓고 깊어진다. 안 그래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과열을 염려할 정도로 서로에 대한 따뜻한 배려로 이어진다. 역시 메뉴 선택은 다녀본 분에게 맡기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깨닫는다. 내가 그 음식에 대해서 안다고 했을 때 나의 판단기준은 과거의 경험이다. 내가 안다고 해도 어느 가게에서 어떤 사람이 요리하는 가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다시 경험하게 된다. 내가 알고 있던 민어회와 지금의 민어회는 완전히 다르다. 경험의 세계에서 경험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며 판단기준이다. 


일을 하는 보람, 같은 방향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한 화학적 변화가 버무려진 자리에 들여온 음식은 최상의 역할을 다하고 장렬하게 사라진다. 맛과 관계의 여운은 아주 오래도록 내 뇌리에 머물 것이다. 맛과 관계의 여운은 일상의 삶을 사는데 작은 기폭제가 되고 에너지가 된다. 그 여운이 실려온 사람들과의 추억도 더 선명하며 주고받은 메시지도 더 분명하게 기억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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