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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Nov 20. 2021

찬바람 잠시 비껴서는 모시조개탕

수십 년 세월의 무게를 가볍게 넘는 기억을 소환하다

오랫동안 이 동네에 살아왔지만 안 가본 가게들이 많다. 먹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맛난 음식을 먹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게 일상적 삶의 낙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점심때 보리밥을 먹었는데 신선한 채소 가득한 맛에 한동안 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저녁에는 술안주 메뉴가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오늘은 마음먹고 이 가게로 향한다. 간판이 인상적이다. 뭔가 다양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뜬금없이 그 사연들을 직접 물어보고는 했는데, 직접 물어보는 것보다는 음식과의 대화를 통해 그 사연을 거꾸로 살펴보는 재미를 은근히 느낀다.  

콩나물국의 미덕은 따끈한 시원함에 있다. 밑반찬으로 나온 이 국은 알맞은 사이즈에 얼큰함까지 갖춰서 본 메뉴에 나올 음식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린다. 미역초 저림은 상큼하다. 둘 모두 밑반찬 다운 역할을 하고 사라진다. 

모시조개탕이 등장한다. 모시조개는 대합과에 속하며, 개펄이나 염전 저수지 등 수심이 얕은 곳에 분포하며, 포함된 타우린은 아미노산의 일종으로 콜레스테롤을 저하하고 혈압조절에 도움을 준다. 시원한 첫맛, 조갯살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바다내음, 염분이 적으면서도 그 맛은 입안을 은근히 자극한다. 두부와 미나리, 무, 고추들이 그 맛을 옆에서 받치고 있다. 뒤에 온 손님들도 대부분 모시조개탕을 주문하는 것을 보니, 바깥바람이 차다는 것을 우리만 느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사람들의 입맛은 개별적이지만, 입맛이 지향하는 곳은 일정한 곳을 향한다. 

어느 순간 벽에 장식된 창호지 문이 눈에 들어왔다. 실제 문은 아니지만 마치 밝은 햇빛이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안동 풍산의 병산서원 옆 외갓집이 생각난다.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눈을 비비며 아침을 맞았던 기억, 오후 따스한 볕을 벗 삼아 툇마루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던 행복한 기억이 저 벽의 창호지 문틈 사이로 밀려온다. 때때로 생생한 기억은 수십 년 세월의 무게를 가볍게 넘어 내게로 온다. 그 특별한 순간을 일상 속에서 잡을 수 있는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내가 소환하지 않으면 누구도 소환하지 않을 그 추억. 


애자와 전깃줄 디자인도 낯설지 않다. 지금이야 전기를 쓰는 일이 신기하지 않지만 어릴 때만 해도 가끔씩 정전도 되고, 전기를 다루는 아저씨들이 전봇대 위에서 애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게를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디자인하되 그렇게 많이 투자한 것 같지 않아서 좋다. 무조건 돈을 쓴다고 멋진 곳이 되지는 않는다. 소박한 멋을 내서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멋을 내고 있는 그대로의 재료들로 있는 그대로의 맛을 선사하는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 

그리고 잠시지만 그 자리가 영원히 기억될 곳으로 만들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풍경을 조용히 즐기는 저녁이다. 찬바람은 잠시 잊어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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