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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Jan 15. 2022

두부의 바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님은 다섯 분이 동업을 하시는 작은 두부공장 운영에 참여하셨다. 새벽 3시에 물에 불린 콩을 갈고 간수를 붓고, 틀에 넣어 두부를 만드는 과정을 여러 번 보았다. 아침에 어머님께서 콩물이나 두부를 가져오라는 말씀을 하셔서 자주 심부름을 갔었다. 콩물은 물컹하고 간이 별로 되어 있지 않아 콩의 비릿한 냄새와 맛이 그대로 느껴져 처음에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차츰 먹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부모님께서 베지밀보다 영양소가 더 많다는 말씀에 곧잘 먹기 시작했다. 


두부는 제조과정과 물에 담그는 과정 및 배달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파손되는 두부가 나오게 마련이다. 특히 하루 콩 7 가마를 두부로 제조하는 공장에서는 다반사다. 그러면 아침에 빨간 플라스틱 양동이에 두부를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님이 해주시는 두부조림은 특히 맛있었다. 고춧가루와 대파를 썰어 넣고 간장을 적당량 뿌리면 두부에 간이 배고 약간은 매운 두부조림을 먹을 수 있었다. 두 동생은 고기를 먹을 줄 알고 나는 일체 육류를 못 먹어서 그런지 두부조림 중 반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그러니 서둘러 먹을 필요도 없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천천히 밥을 먹는 습관이 생겼던 것 같다. 부드럽고 고소하고 뒷맛이 개운한 두부는 그렇게 평생의 동반자로 내 장이 기억하는 음식이 되었다.


내 몸을 만들어준 단백질 보고는 단연코 콩물과 순두부, 비지였다. 장내 미생물에 관한 이야기와 그들의 활약상 그리고 장에 좋은 음식을 권하는 마이크로 바이옴의 세계를 접하고 보니, 콩으로 만들어낸 음식 중 가장 훌륭한 음식을 먹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동네 두부 가게로 향하면서 두부를 만들어 자주 접하게 해 주신 아버님과 두부로 온갖 맛난 요리를 해주신 어머님의 손맛이 생각났다.


두부부침은 겉은 약간 바삭하며 안은 완전히 촉촉한 두부의 질감을 잘 살리는 것이 관건이다. 제사상차림을 할 때마다 다양한 전을 부치지만 나는 두부전이 제일 좋다. 식어도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은 씹히는 맛이 있는 두부부침의 맛을 잊을 수 없다. 이 가게의 두부부침은 그 맛을 그대로 입안에서 재현하고 있다. 기름 맛이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며 안은 촉촉하고 씹히는 감촉이 살아있다. 당연히 두부 원재료가 좋아야 가능한 선이다. 첫맛이 기분 좋으니 나머지 음식들도 좋을 것 같다. 

옛날 순두부와 해물 순두부를 선택하는 일은 짜장면과 짬뽕을 선택하는 것만큼 어렵다. 때로 매콤하면서도 국물의 맛을 느낄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오늘은 순수한 두부의 맛을 보려고 옛날 순두부를 선택한다. 아 그런데 약간은 후회된다. 조금 밋밋한 느낌이 들 정도로 완전히 순두부의 원형이 되는 맛이다. 아버님 두부공장 시절을 다시 추억한다. 순두부는 맛있는 간장이 있어야 손이 가는 음식이었다. 공장에서 금방 가져온 순두부는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지만, 순두부 특유의 고소한 맛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어머님께서 해주신 간장이 없으면 맛이 없었다. 지금은 간이 거의 없는 순두부도 아주 맛있게 먹는다. 오랫동안 순두부를 먹어오면서 점점 더 그 고소한 맛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어머님의 간장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가 있어 약간 매콤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오늘 이 가게의 간장은 간장과 파로만 되어 있어 살짝 아쉽다. 

반찬 삼종세트는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겉절이는 빛깔 고운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놓아 입안으로 겉절이가 들어가면 미각 수용체들이 즉각 반응할 만한 맛이었다. 깍두기는 상온에서 잘 익혔고 양념도 잘 배어 있어서 비릿한 맛이 업으며, 매콤하고 새콤하며 약간은 달콤한 맛이었다. 내가 이름을 지어본다. "삼단 콤" 혹은 "삼콤"이라고. 콩나물 무침은 참기름의 기운이 아주 옅게 배어 있어 콩나물의 촉촉한 맛과 옅은 고소함이 어우러진다. 콩나물 대가리는 적당히 잘 삶아서 부드럽게 씹히는 질감이 너무 좋다. 

모두부는 적당히 잘 삶아 두부의 고소한 맛과 입안을 자극하는 소금 간이 잘 어우러져 있다. 청국장 맛이 궁금해서 추가로 주문했는데 바쁜 와중에 미안하게도 서비스로 청국장을 주신다. 가게 주인의 넉넉한 인심에 감사드리며 고소한 콩과 청국장 국물을 먹는다. 간이 적당해서 밥 없이도 먹기 딱 좋다. 


따끈한 갓 지은 솥밥을 오랜만에 먹어본다. 솥밥 뚜껑을 여니 안에서 풍겨오는 향기에 취한다. 문득 쌀나무와 콩과 잡곡이 자라던 논과 밭을 상상하게 된다. 쌀알이 하나씩 하나씩 입안에서 짠 득하게 씹혀서 밥 자체만으로도 다른 반찬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런 맛이다. 바삐 먹고 들어가야 하는 점심시간이지만 살짝 눈을 감고 밥을 씹으면서 조용히 명상에 잠긴다. 평화롭고 아늑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싼다. 밥을 먹는 사이 잘 만들어진 숭늉은 잔뜩 배가 부름에도 불구하고 계속 먹게 만든다. 구수한 숭늉 물과 밥알이 선사하는 또 다른 먹는 재미에 빠진다. 


두부의 바다에서 한참 헤엄치다 나왔다. 

두부는 한동안 지속된 한파도 잠시 있게 해 준다. 

밥 한 끼 먹는 일이 세상에서 이렇게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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