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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Feb 25. 2022

우거지가 말을 거는 순간

내 입맛 나도 몰라

퇴근 후 계단을 오르는데 찬 기운이 얇은 잠바 사이로 스며들어온다. 강추위라기보다는 흔한 추위 중의 하나일 터인데 그래도 찬기운이 엄습해오면 몸은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지하 1층에서 21층까지 네 번 오르니 몸이 약간 풀리고 추위도 잊을만하다. 창문을 열고 저 멀리 산자락을 카메라에 담는다. 시장기가 밀려온다. 배고픔을 잊게 해 줄 음식을 선택하려고 할 때, 저기 멀리서 우거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무순은 일본 남부지방에서도 손꼽히는 식재료라고 한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잠시 그 찰나의 장면을 포착했다. 여자분이 무순을 먹으면서 하던 말 "어머! 무순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아요" 음식이 맛있어서 하는 다양한 표현들을 들어봤지만, 음식 혹은 식재료가 나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대지의 양분, 하늘에서 내리는 수분과 햇빛 속에서 자랐을 무순은 살아있는 존재였다. 방금 전까지 생명활동을 하던 무순이라 말을 거는 걸까? 


아니면 무순이 너무 맛있어서 마치 정다운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대화의 맛이 나는 것처럼 그런 생생한 감동을 받아서였을까? 아니면 무순의 순수한 맛이 미각 수용체를 통해 온몸을 휘젓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무순과 내가 하나의 역동적인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는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해서일까? 나는 이 표현이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 한 참을 되새겨보았다. 그 되새김질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다가 가끔 맛있는 음식을 만나면 말한다. "000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군요"라고. 




겨울이 곧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려 하니 더 춥게 느껴진다. 실제 기온도 영하 8-9도를 오르내린다. 시장기가 돌 때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영원한 숙제와 같다. 내 입맛을 나도 모를 때가 많다. 이 음식이 먹고 싶었는가 해서 가서 먹으면 아닌 거 같고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음식이 더 맛있어 보이고 다른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더 맛있어 보인다. 심지어 같은 음식을 먹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곤 한다. 정말로 내 입맛을 내가 잘 모른다. 그런데 오늘은 확실하다. 추운 날씨를 견딘 내 몸을 녹여줄 국물과 빛깔 좋은 우거지. 우거지의 가치는 가격으로는 저울질이 불가능한 음식이다. 


잘 손질된 우거지는 부드럽고 씹기 좋은 질감을 선사한다. 지금 이 순간 우거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입안은 우거지가 던지는 메시지들로 꽉 차있다. 소리와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 말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잠시 눈을 감고 산자락 햇볕 좋은 곳에서 자라는 배추밭을 상상한다. 그 언덕 위로 지게를 지고 스무 포기가 넘는 배추를 져나르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한다. 나의 아버지와 같은 분들이 져서 날랐을 배추는 얼머나 고귀한가. 그 배추에서 나와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한 우거지. 그 우거지가 지금 내게 말을 건다. 


"코로나 19로 위축된 행동반경과 긴장을 풀라고. 추위에 언 몸을 녹이라고. 바이러스에 견디려면 나에게 포함되어 있는 식이섬유와 비타민, 철분, 칼륨, 칼슘, 엽산, 아연 등으로 장을 튼튼히 하라고. 네가 건강해진다면 내가 기꺼이 너의 몸의 일부가 되어도 좋다고. 생명을 유지하려면 나와 같은 생명을 먹어야 살아갈 운명이 너라는 걸 나는 안다고. 내가 자란 대지의 자양분과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불어오는 바람, 햇빛. 씨앗을 뿌리고 거름을 주고, 수시로 관찰하며 병충해를 겪지 않도록 돌봐준 손길들. 비탈길을 따라 휘청이며 나를 운반하던 사람들의 걸음들, 다치지 않게 잘 보관하고 운반한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잊지 말라고. 그래야 내 생명이 너에게 다가간 보람이 있다고....."


우거지 품 안에서 잘 익은 돼지뼈를 하나하나 발린다. 고기에 우거지를 싸고 먹는 것과 그냥 고기만 먹는 것과는 품격이 다르다. 잘게 부서진 고기 조각들과 부드러운 우거지가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음미하는 동안 잠시 나는 잡스런 생각들과 허황된 욕심에서 벗어나 진공상태에 진입한다. 막걸리 한 잔의 진한 기운을 털어내 주기도 한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가올 것이다. 지금은 봄이 오기 전의 새벽과도 같은 추위. 우거지가 있어서 아늑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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