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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Mar 01. 2022

해장국 세계

@1. 술 왜 마시지?


술은 왜 마실까? 너무나도 명확한 질문과 대답이 있는데 막상 던지니 애매하다. 나는 왜 술을 마실까? 어렸을 때만 해도 아버님께서 약주를 드시면 별로 즐거울 일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커서 어른이 되면 술을 절대 안 마실 거라고 다짐했다. 나와의 약속은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파기되고 말았다. 더듬거리며 술을 마시는 이유를 찾아본다.


10대 때는 호기심과 알딸딸한 취기에 잠시라도 녹아들어 있으면 세상 모든 시름이 잠시 걷히는 착각이 들었다. 20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한편으로는 소통의 수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맛을 조금씩 느끼면서 친근해졌다. 한참 일에 적응할 무렵인 30대와 40대까지도 사실 술맛보다는 술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의 소통과 인간관계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50대 들어서면서 술과 음식의 묘한 관계에 깊이깊이 빠져들어가고 있다. 미세한 음식 맛의 차이와 술이 주는 다양한 혜택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술 먹은 다음날 속을 달래줄 해장에 대해서도 신경 쓰기 시작했다.


@2. 쓰린 속


피로를 풀고 재충전을 위해서, 혹은 잊어버릴 것을 찾아서, 혹은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그러고 보니 술을 먹어야 될 이유가 사방에 널려 있다. 한 번도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수히 많은 이유들이 등장하는구나! 그렇다! 술을 마셔야 될 이유는 많다. 마실 때 누가 다음날 속 쓰릴 것을 생각하면서 마시겠는가? 기분 좋게 마시고 난 다음날이면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리다. 머리 아픈 거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데, 쓰린 속은 달랠 길이 막막하다.


쓰린 속에 관한 추억들이 밀려온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던 순간들이다. 대학입시 끝나고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마셨던 술, 다음날 하숙집 아주머니께서 시원한 국을 끓여주셨는데 지금은 그 국물 맛이 생각나지 않는다. 더듬어 보면 훌륭한 해장국이었으리라. 대학 들어간 이후로 나의 해장국은 순두부찌개, 콩나물국, 황태해장국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국물이 있어야 해장이 되었다. 아주 가끔은 쓰린 속과 갈증 해소를 위해 쿨피스 1L를 한 번에 마시기도 했는데 단맛이 속을 더 헤집어 놓아 혼나기도 했었다.


@3. 해장국 생태계


세상에는 수많은 해장국이 존재한다. 맑은 복국, 아귀탕, 콩나물 국밥, 황태해장국, 우거짓국, 동태탕, 생태탕, 우럭탕, 돼지국밥, 닭곰탕, 닭고기 수프(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 등장하는 90대 어르신들은 연주가 끝난 뒤 독주를 드신다. 아침 해장은 바로 이 닭고기 수프).... 여러 가지 음식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음식들이 떠오른다. 때로는 양지와 사태 육수로 우려낸 평양냉면이 해장을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동치미 맑은 국물의 메밀 물막국수가 그 자리를 대처하기도 한다.


@4. 선지 해장국


뭐니 뭐니 해도 해장국의 진미는 선지 해장국이다. 선지 해장국에 언제부터 이렇게 빠져들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육류를 잘 못 먹고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처음에는 보기에 징그러워서 먹지도 못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선지 해장국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일 동네 근처에 있는 해장국집은 다닌 지 25년이 지났다. 선지 해장국과 밥이 따로가 아니라 밥을 말아서 나오고 양념도 적당히 쳐서 나온다. 내가 해야 될 일은 후추를 뿌리고 채 썰어놓은 고추를 얹는 것이 전부다. 자작한 국물을 한 모금 떠서 마신다. 경직된 속이 은근히 녹아들고 아늑한 느낌이 든다. 아웅다웅거리던 속이 서서히 평안을 되찾는다. 속 쓰림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해장국 맛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간다. 선지는 싱싱해서 숟가락으로 눌렀을 때 약간 튕겨져 나가는 듯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진다. 정신없이 먹다 보니 밥은 그대로 남아 있는데, 선지 하고 국물이 어느새 다 비워졌다.


@5. 추가 선물


선지를 추가해 달라고 했는데, 국물과 선지가 절반 이상 담긴 그릇을 내미신다. 새로운 선물을 받았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런 선물은 자주 받고 싶다. 이번 레는 맑은 해장국 한 그릇을 또 먹는다. 선지와 국물은 내 몸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술로 쌓인 피로를 가뿐히 녹여준다. 지난번 해장국을 먹었을 때는 국물이 약간 싱거워서 맹숭맹숭했었다. 맛을 미세하게 느끼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약간은 좀 헷갈린다. 너무 민감하게 느끼는 걸까? 오늘은 국물 비중이 약간 묵직하게 느껴지면서 전체적으로 속을 감싸 안아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의 컨디션이 매일 일정할 수는 없을 터인즉 음식 역시 일정한 맛을 내기가 쉽지 않다. 같은 식재료라 하더라도 자라온 토양이나 환경이 다를 것이고, 어제와 오늘이 다를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과 음식을 먹는 일 무게는 각기 다르겠지만 양쪽 다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최근에 깨달은 바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는 일은 고귀하다. 일정한 맛을 내는 건 더 고귀하다. 고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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