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의 추억
객지로 고등학교 가기 전까지 고향집에서 어머님은 늘 옥수수차를 끓여놓으셨다. 구수한 옥수수차와 보리차를 번갈아 끓여주셨다. 옥수수차를 마시고 난 뒤 우려 내 고난 옥수수를 프라이팬에 올리고 설탕을 뿌리면 맛있는 과자가 된다. 차도 마시고 군것질도 했다. 대학 때는 국선도 동아리에서 매일 녹차를 마셨다. 동아리 회비를 거둬 종로에 있는 차전문 가게에서 사 온 차를 마셨다. 녹차의 종류와 품질에 따라 차 맛은 확연히 달랐다. 녹차를 마시고 나면 머리도 맑아지고 온 몸이 개운해짐을 느꼈다. 그러다가 차 마시는 것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차의 존재를 한동안 잊고 지냈다.
#3. 자가격리 기간 중 차의 발견
자가격리 기간 동안 차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아들이 확진되고 네 식구가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니 뭔가 새로운 일을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거름망이 딸린 5리터 주전자와 볶은 옥수수, 볶은 블랙 보리, 볶은 아기 보리, 결명자차를 주문했다. 집안에만 있던 차에 차를 끓일 때 우러나오는 향기를 제대로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 맛도 아주 구수하고 아늑했다. 재료를 조금 더 첨가해서 세 번 우려내는 동안에도 차의 맛은 옅어지지 않았다.
#4. 12차로 늘리고
차 끓이고 마시는 재미에 푹 빠졌다. 볶은 현미, 볶은 메밀과 도라지, 무말랭이, 머위, 우엉, 볶은 귀리와 생강을 추가해서 차를 끓였다. 결명자를 너무 많이 넣으면 진하고 쓴 맛이 많아 적당히 넣었다. 무말랭이는 차의 질감을 부드럽게 해 주었으며, 도라지와 결합해서 호흡기를 보호해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전의 차에 비해 식감은 더 복합적이고 부드러우면서도 새로운 구수한 맛을 선사했다. 이제 아이들도 탄산음료 대신 이 차를 찾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차를 15리터 정도 끓여놓으면 일주일 내내 먹었다.
#5. 24차로 완성하다
칡, 모과, 돼지감자, 볶은 메밀껍질, 팥, 수수와 율무, 둥굴레, 오미자, 모과 등을 추가해서 24차를 만들었다. 어느 것을 더 넣고 덜 넣는 가에 따라 맛이 달라짐을 조금씩 공부한다. 각각의 차 재료가 갖고 있는 다양한 기능들을 공부하다 보면 혹시 서로 충돌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다. 식감이 좋고 몸에 무리가 없으며, 따뜻할 때는 따뜻한 대로 차게 먹을 때는 시원한 대로의 맛이 살아있어서 그런 염려도 덜었다.
재료들 각각은 하나의 고유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성질과 효능이 각기 다르며, 끓였을 때의 향기와 맛도 각기 다르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이들이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완성체로서의 맛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나는 알 길이 없다. 어떻게 물분자 속으로 재료의 성질들이 스며들어가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끓는 물속에서 서로 뒤섞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섞이면서 내뿜는 향기는 감미롭다. 거실 빈 곳들을 조금씩 채워 마침내 향기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시기도 전에 향기에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