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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Jun 06. 2022

책과 음식과 인연과 플랫폼

형이 책을 출간한지도 한 달여가 지났다. 정작 내가 읽을 책을 사인받지 못했다. 읍내 나오라는 말씀에 다른 스케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연락이 닿아 책을 한 권 들고 길을 나선다. 자주 뵙는 후배님이 연락 와서 선약이 있다고 했다가 문득 같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사인받을 기회를 뒤로 미루고 후배에게 양보했다. 정을 담은 술 한잔을 나누는 데에도 약간의 명분은 필요한 법. 책을 


나의 설득에 넘어온 후배님과 먼저 만나 시원한 맥주 한잔 들이켠다. 번화한 종로대로 옆 골목에 위치한 가게에서 작은 마당을 재발견한다. 시원한 원색의 벽화와 기와지붕과 창틀과 옛날의 블록들이 묘한 풍경을 만들고 있다. 때로 그것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애써 의미를 부여잡고 말도 안 되는 썰을 풀기보다는 그저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쳐다보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시원한 한 잔의 맥주로 더위를 가시며 자그마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다. 

 자리를 가게 안으로 옮겼다. 문을 열어놓으니 햇살이 차츰 사그라드는 마당의 빛과 풍경이 낯선 즐거움을 던져준다. 와인잔에 담긴 막걸리 맛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바로 그때 주인장께서 마당 풍경중 신박한 광경을 설명하신다. 과연 저 나무들 사이에 걸린 주전자를 보았다. 누군가가 그렇게 재미 삼아 만들어놓았을 터인데 이런 상큼한 시도는 처음 보았다. 저 주전자를 보는 모든 이들이 술 한잔 할 생각이 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늦게 도착하신 형님과 책을 펼쳐놓는 후배님의 얼굴이 모두 진지하다. 

클래식을 들은 지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러퍼터리에 집중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음악이 내 삶에 스며들어오도록 살짝 비껴섰더니, 음악은 내 살 속으로 들어왔다. 마치 매일 호흡하는 공기처럼 되었다. 클래식을 둘러싼 생태계는 경직되고 현학적이며, 형식적인 부분이 있었다. 형님은 클래식과 일상을 깔끔하게 연결시키는데 집중했다. 그 집중의 에너지는 여러 사람들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일상의 삶을 조금은 가볍게 그러나 진지하게 그리고 뭔가 노는 마당으로 만들려는 형님의 노력이 만들어낸 책.


그 책의 앞머리에 후배님에 대한 덕담을 써 내려가는 글의 굵은 선들이 음식과 와인과 어우러져 새로운 대화의 우물을 파내려 간다. 1991년 <무진기행>이라는 카페에서 처음 뵀던 선배님과 2011년 <프로젝트>를 통해 제대로 알기 시작한 후배님 사이에서 새로운 인연의 끈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노라니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람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대화의 방이 열리고 대화의 창들이 하늘빛과 별빛과 달빛을 담는 그릇이 되는 과정은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아름답다. 그 방은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창을 열게 될 것이다. 그 무수한 창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할 일을 다했다는 기분을 막걸리와 와인이 축하해준다.

클래식 음악을 처음 접하고 나서는 구체적인 레퍼토리와 누가 연주했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많은 레퍼토리를 아는 것과 누구의 연주가 이런저런 특색이 있다고 얘기하는 근저에는 은근히 현학적이고 유치한 면도 있었다. 형님은 구체적인 음악을 떠나 클래식이라는 자양분이 인간 삶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역할을 하고 인간의 감정과 어떻게 교류하는지를 마음껏 자유롭게 펼쳐놓으셨다.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음악 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쌓아놓았던 이야기보따리를 책에 풀어놓으셨다


밤도 서서히 깊어가고, 대화도 클래식에서 스타트업으로 넘나들고, 주종도 와인과 막걸리를 넘나 든다. 조용한 가게 안에 쌓아 올린 수많은 이야기들이 귓가에 남아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래준다. 가게는 음식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인연을 만들어주고 끊임없이 연결시키며 일상의 삶을 위로해준다. 플랫폼이 뭐 별거 있나? 수시로 교차하는 사람들의 만남을 이어주는 든든한 정거장이면 그만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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