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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Aug 21. 2022

사람들을 이어주는 맛

종로 3가에서 내린다는 게 4가에서 내렸다. 바로 앞 세운상가는 빛바랜 추억을 간직한 채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순간, 카세트 플레이어(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더 정확할 듯한데)설 레이는 마음으로 저 공간을 들락거렸던 20대의 추억이 선명한 사진처럼 기억의 보물창고에서 인출된다. 세운상가라는 단어 안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각기 쌓아놓은 추억들의 탑들이 은하수의 별들만큼 만을 것이다. 

맑은 여름 하늘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종묘의 풍경이 한가롭다. 이 각도로 이렇게 선명한 장면을 보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물과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인식하는 나의 기억력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리지만, 그래도 상쾌한 마음은 누를 수 없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도 했고 배도 고프고 해서 시그니처 메뉴가 아닌 순대를 주문한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가게 풍경을 본다. 저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기 위해 거기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원래 그렇게 사람 사이를 음식 맛으로 연결하는 것이 운명적인 본업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 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고 여기저기를 다닐 무렵 음식이 등장했다. 

적당히 익어 시큼하지만 식감은 아삭하고 맑고 선명한 김치 국물 맛과 어우러진다. 김치를 이렇게도 만들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맛이다. 입안 전체의 미각 수용체들을 쉼 없이 자극하는 그런 맛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반찬과 메인 메뉴의 지위를 논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메인 메뉴를 시켜야 반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을 할 즈음 순대가 등장한다.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순대는 촉촉하지만 너무 젖어 있지 않고 적당한 질감을 선사한다. 안에 꽉 들어찬 내용물들은 막걸리 한잔과 잘 어우러진다. 돼지 간은 내게 영원한 숙제 같은 느낌이라 그저 그 모양을 바라보기만 한다. 

금세 안주가 동이 나고 아직 약속한 분들이 절반만 도착할 즈음 모둠전이 도착했다. 20분 정도 걸린다고 해서 미리 주문했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에 연신 막걸리 잔을 채운다. 잔을 치고 지나온 시간들을 되짚어 거기 켜켜이 쌓여있던 추억들을 꺼내서 잔위에 슬쩍 걸쳐서 한잔 마시는 맛. 이번에는 표고버섯전이 막걸리가 훑고 지나간 입안을 간지럽힌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이슬과 땅기운을 먹고 자란 표고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쫄깃한 육류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맛이다. 절반의 팀이 오기 전에 표고버섯전을 모두 먹었다. 마치 처음에 없었던 것처럼 위장한다. 음식이란 게 사람을 이렇게 쪼잔한 인간으로 만들기도 하는구나. 음식에 대한 욕심이 없어지기는 하는 걸까?

병어조림의 고소한 맛과 함께 여름밤은 깊어간다. 오래도록 알고 있던 사람들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가?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해답은 음식에 있지 않을까? 늘 처음처럼 대하되 맛의 기억을 더등어 그걸 <지금 여기>로 가져와서 깊이 음미하는 것. 좋은 기억들을 가져와 <지금 여기>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놓고 그가 그동안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듣는 즐거움 속에서 다시 한번 나는 그를 알아나가는 것. 


새로운 음식을 대할 때 편견과 선입견이 내 자연스러운 미각의 반응을 흐리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은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벗어버리고 민낯으로 있는 그대로 대하면서 접점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하는 것. 거기에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갈수록 더워지는 날씨에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음식이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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