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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Oct 29. 2022

덤으로 사는 삶


@1. 다리에서 추락

지금도 그 다리는 강원도 도계역 근처에 그대로 있다. 일곱 살 때 옥수수를 먹으며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다가 6m 아래로 추락할 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만, 그 뒤 1년간의 기억은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다. 요즘 뇌 공부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외상 후 후유증의 영향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물이 아닌 자갈밭에 거뚜로 떨어지며 오른쪽 이마가 함몰되고 찢어졌다. 지금도 손으로 눌러보면 움푹 함몰된 부위를 느낄 정도이니 당시에는 상처가 깊었다. 여덟 바늘을 꿰맸다고 하신다. 흉터가 남아있다. 그 흉터는 내가 덤으로 살아가는 삶을 상징하는 나만의 기호다. 철이 든 지금, 나를 구하기 위해 거꾸로 떨어지는 순간 달려오던 동네 아저씨들 두 분에게 두 손 모아 깊이 감사드린다. 물론 애간장을 태우며 둘째를 업고 달려가신 어머님께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2. 안동 외갓집, 미숫가루

처음으로 외갓집을 갔다. 논일과 밭일로 분주한 시골집에서 귀한 조카가 방문했다고 미숫가루에 설탕을 섞어 간식거리로 내놓으셨다. 난생처음 본 음식이라 물에 타서 먹을 생각 없이 한 숟가락 가루째로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미숫가루가 숨구멍을 막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사촌들이 놀라 어쩔 줄을 몰라하고 어른들은 밭일을 하느라 한참 떨어져 있었다. 다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밭둑길 끝 개울물이 보였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곧바로 개울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입안으로 물이 들어오고 그제야 숨구멍이 열렸다. 그 찰나의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니 멍하니 있었다면 지금 나는 여기에 없을 것이다. 아찔한 감사의 마음이 스치고 지나간다.


@3. 차로 돌진하는 자전거

1983년 10월 10일 중3 때 막내 동생과 웃는 낯으로 인사를 했었다. 하굣길 밭둑길을 걸어오는데 집에서 곡소리가 들린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어머님이 목놓아 통곡하는 소리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 사업을 한답시고 동네 한편에 공동화장실을 만들겠다고 구덩이를 파고 몇 달이 지났다. 무책임한 어른들이 장난처럼 파놓은 구덩이에 가을장마로 빗물이 1m 넘게 고였고 동네 아이들과 놀던 세 살배기 동생이 그 물에 빠져 익사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납득할 수 없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달리다가 차 앞으로 돌진했다. 다행히 운전자가 급정거를 해서 슬쩍 부딪치고 말았다. 운전자는 내게 야단치는 대신 달래주었다. “어떤 사연인지 모르겠지만, 학생 이러면 안 되네. 부모님을 생각해야지!” 순간 아득했던 정신줄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40년이 지나도 동생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님의 회한도 여전히 남아있다.


@4. 6년간의 통증

야구 동아리에 가입하고 첫 시합이었다. 본 경기 시작에 앞서 신입생간 경기가 펼쳐졌다. 첫 타석에서 3루수 앞 땅볼을 치고 1루를 향해 달렸다. 걸음이 느려 살고자 하는 욕심에 슬라이딩을 했다. 그 순간 3루수의 악송구로 1루수가 점프를 하고 떨어지면서 내 허리를 정통으로 밟았다. 허리에서 시작된 통증은 왼다리 전체로 확대되었다. 병원에서 허리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맹장수술로 통증을 견뎌본 경험상 수술은 하기 싫었고 무서웠다. 통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를 내리눌렀다. 


밤새 통증으로 울면서 불면의 밤을 보냈던 날들이 쌓여갔다. 탈출구는 술이었다. 진통제 역할을 하면 잠을 잘 수 있었다. 6년의 세월을 견디는 동안 무수한 치료를 받았다. 원인을 찾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세월이었다. 6년간 지속되던 통증은 1년에 서너 번 찾아오는 손님으로 바뀌었다. 한번 왔다가 단 1주일 만에 사라지기도 하고 길게는 두 달간 지속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 디스크와 공존하겠다고 생각하자 통증은 뜸해지기 시작했다. 왔다가 며칠 만에 사라졌다. 운동과 마음 챙김을 통해 이제는 아주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손님으로 변했다. 통증에서 해방되는 날들이 많아질수록 삶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넓어졌다.


@5. 크리스마스날의 악몽

큰 딸은 대학교 3학년이었다. 수요일 밤늦게 집으로 귀가했고 나는 화를 냈다. 세 번째 발가락이 아프다고 했다. 벌겋게 부어있고 사소한 염증으로 보였다. 병원에 다녀왔는데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다고 했다. 토요일 아침에 인근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드레싱을 하면서 봉화직염을 의심하면서도 혹시 모르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아버님상을 치른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골집에 홀로 계신 어머님이 걱정되어 내려가기로 되어있었다. 


그날 저녁 큰 딸이 울먹이며 전화했다. 너무 아프고 온 몸에 열이 난다고… 다음날 저녁 도착해보니 발가락이 거무스름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바늘로 고름을 빼고 났지만, 찜찜했다. 머릿속에서는 피부괴사라는 단어가 어른거렸다. 응급실이 있는 동네병원에 갔더니 혈압이 너무 낮다고 하면서 혈압상승제를 투여했으나 변화가 없자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의사 두 분 간호사 두 분이 함께 아이에게 집중하며 수액을 여러 군데 꼽았다. 


의사 선생님이 나를 불러 “보호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환자 상태가 심각합니다. 여섯 시간 안에 사망할 수 있습니다. 환자는 지금 패혈증 쇼크 상태입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에 몸과 마음이 같이 무너져 내렸다. 이대로 간다면 나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30분 뒤 <중심정맥 시술>을 제안받고 고민할 사이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 두 시간 넘게 사투를 벌이던 딸의 혈압이 110을 넘어서며 정상으로 돌아왔다. 살아났다. 감사와 안도의 한숨. 한없이 예쁘고 귀해 보이는 딸을 마주했다. 그 뒤로 잔소리를 멈췄다. 제주도로 혼자 1주일 여행을 하건, 해외로 인턴을 6개월씩 나가던, 머리를 노랗게 빨갛게 물들이던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네가 나를 살렸으니….


남들은 더 많은 사연이 있을 터인즉, 타인들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지속되는 삶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으로 하루를 힘차게 연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 가득한 평화를 내려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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