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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Nov 25. 2023

아버님 7주기에 부쳐 #2

- 1975년의 아찔했던 사고와 극적 생환


1975년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계절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이 동생들과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광산에서 일하시는 아버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매일 퇴근하실 때면 씻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날 아버님은 평소와 달리 생모를 쓰시고 옷은 탄먼지 투성이인채로 마당에 들어서셨다. 그리고는 동생을 끌어안고 한참을 우셨다. 그리고는 10원짜리 네다섯 개를 내미시면서 가서 맛있는 것 사 먹고 오라고 하셨다. 이게 웬 횡재 인가만 생각했지, 그날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기억 속에서 아버님의 그날 모습은 오래도록 잔상만 남았다.

철이 들면서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알게 되었다. 그날 아버님께서 작업을 하러 들어간 그 갱도가 무너지고 말았다. 혼자 갱속에 갇힌 상태로 16시간 동안을 버티셨다. 당시에는 갱사고에 대비해 별도의 상시 구출팀이 없었다. 갱사고가 빈번해지면서 19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갱사고에 대비해 구출할 수 있는 광산보안대가 조직되어 정기적으로 훈련도 하고 구조활동도 하게 되었다. 목숨을 걸고 구조하러 들어갔던 동료들이 아니었으면, 아버님은 그대로 생을 마감하셨을 사고에서 극적으로 생환하신 것이다.  


2014년 영화 <국제시장>을 보며 펑펑 울었다. 아버님이 처한 상황이 어떤 그림인지 겨우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광산에서 노동하신 아버님을 따라 단 한 번도 갱을 가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시는지 잘 몰랐다. 영화를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리고 죄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1977년 11년 동안 해오신 광산노동을 그만두시게 된 계기도 갱사고였다. 친목계원으로 가까이 지내던 후배들이 1년 간격으로 발생한 사고로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갱사고 매몰사건이 아버님의 의지를 흔들었다면 후배들이 갱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 사건은 일을 그만두시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밥벌이를 위해 험한 노동을 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기가 쉬우셨을까?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도급제의 규칙은 잔혹했다. 매달 27일을 꼬박 근무하면 만근이라고 하는데, 힘이 들어 하루만 쉬어도 급여의 1/10을 깎아 버리고 이틀을 쉬면 2/10을 깎아버린다. 광산노동을 한 달 내내 만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갑, 을, 병반을 10일씩 번갈아 근무해야 한다. 갑반은 9시 출근이지만, 올반은 오후 1시 출근, 병반은 저녁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한다. 채탄을 멈추게 되면 물이 차고 갱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사람을 24시간 노동하도록 돌리는 환경이다.


근무시간만도 가혹한 데다 작업환경은 더욱 가혹했다. 갱목을 하나 지고 지하 300미터까지 컴컴하고 위험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곳을 통과하여 갱목을 내려놓고 채탄작업을 한다. 채탄 작업으로 탄먼지가 자욱하지만 방호장구는 고작 누런 스펀지가 달린 방진 마스크인데 방진이 될 턱이 없다. 오늘날 기준으로 따지면 방독면을 착용해야 먼지를 마시지 않을 텐데 결국 그 먼지는 고스란히 아버님 폐에 쌓여 진폐증으로 진행되고 만 것이다.


그 와중에 갱사고를 당하신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갱사고 장면이 나왔지만 실제 아버님이 겪었을 상황은 이보다 더 참혹했을 것이다. 동료들이 갱도 추가 붕괴의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갔다. 목숨을 걸고 지하 갱으로 내려가 아버님을 극적으로 구출해 낸 것이다. 사고 당시 동료 아저씨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만약 그분들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아버님은 구출되지 못하셨을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은 궁핍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6시간 동안 삶의 의지를 놓지 않으신 아버님께도 깊이 감사드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천지의 상황에서 16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호흡도 곤란했을 것이고 갈증과 배고픔,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마주하고 계셨을 그 시간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살아 돌아오신 아버님은 그 뒤로도 2년을 더 근무하시다가 퇴직하셨다. 갱사고의 공포와 두려움이 일하시는 내내 꼬리처럼 따라다녔을 것이다. 삶에 대한 의지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도록 하셨을 것이다. 


그때 아버님께서 삶의 끈을 놓지 않으신 덕분에 우리 가족과 또 형제들 각자의 가정을 구성한 가족 전체의 삶의 끈이 연결되고, 그 삶이 풍요로워지는 바탕이 되었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위대한 삶의 여정을 살아내고 영면하신 아버님께 다시 한번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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