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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Nov 25. 2023

아버님 7주기에 부쳐 #3

- 아버님을 떠올리게 하는 두부

아버님께서 두부공장을 하시게 된 계기 역시 광산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발적인 갱사고로 후배들이 갱도 안에 매몰되어 돌아가셨다. 충격을 받으신 아버님은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에서의 광산 일을 서둘러 정리하셨다. 1977년 가을 온 식구들은 도계를 떠나 황지읍 문곡동으로 이사하였다. 아버님이 선택하신 직업은 엿공장이었다. 퇴직금 일부를 투자해 인수한 엿공장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우선 옥수수가루를 물에 섞어 가열할 연료로 늘 톱밥을 구하러 다니셨다. 톱밥을 연료로 불을 붙인 후 다시 큰 용기에서 막대기로 쉴 새 없이 저어서 엿을 만드는 일은 고달픈 일이었다.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 가을 경에 다시 엿공장을 다른 분에게 매매하셨다. 마침 외삼촌이 두부공장 동업을 하던 중이었는데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셔서 동업자 지분을 사서 두부공장 일을 시작하셨다.



아버님께서 두부 제조일을 시작하신 1978년은 한참 광산경기가 좋을 때였다. 이듬해 이곳은 태백시로 승격되었다.  산골바람이 세찬 겨울이면 두부가 잘 팔려나갔다. 다섯 명이 동업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지금이야 짐작하지만 당시에는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라 그저 아버님께서 결산날이면 지폐와 동전을 한 아름 가져오셔서 그걸 헤아려 드리고 과자 사 먹으라고 돈을 주실 때 감사하기만 했었다. 그때 받은 돈으로 사 먹었던 영콘과 그 아이스크림 밑에 달린 영껌의 맛은 지금도 기억난다.  


한창 바쁠 때면 동업하시는 분들 모두 출근하신다. 아버님은 작업이 있는 날이면 태백의 겨울 새벽바람을 견디며 일하러 가셨다. 아침에 도시락을 드리러 가면, 비닐 앞치마를 하시고 쉴 새 없이 일을 하고 계신 아버님을 만날 수 있었다. 제조과정에서 손상된 두부 몇 모와 콩국물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다. 두부는 온기가 남아있어 어떨 때는 생으로도 먹었다. 대개는 어머님께서 고춧가루와 간장에 무와 채 썰어놓은 파로 두부조림을 해주셨다. 아버님이 만든 두부는 맛있었다. 태백 암반에서 길어 올린 지하수로 만든 두부는 맛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여느 때처럼 도시락 심부름을 갔다가 아버님과 콩국물로 끓인 라면을 먹었다. 수증기 자욱한 공장에서 먹었던 고소한 콩국물 라면은 아버님을 떠올릴 수 있는 음식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님은 그때만 해도 4-50대 중년이셨다. 잘생긴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두부공장에서 만든 식재료는 두부, 콩국물, 순두부, 비지 등 네 가지다. 두부는 간수가 들어가기 때문에 날 것으로도 맛있다.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육류를 일체 못멋었던 내가 지금처럼 남들보다 많고 단단한 근육량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님의 두부제조 노동과 어머님의 음식제조 노동의 환상적인 결합으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거의 매일 두모정도의 두부를 먹었으니까.


콩국물은 맛이 없었는데 장남이 육류를 못 먹어 허약하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완곡한 강제(?)에 의해 거의 매일 한 컵씩 먹었다. 지금은 안다.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비싼 음식이며, 몸에 좋은 음식인지를. 어머님은 고춧가루, 채 썰어놓은 고추, 파, 다진 마늘 등을 섞어 기가 막힌 맛의 간장을 만들어내셨다. 그 간장은 순두부 속에 녹아 맛있는 식감을 선사해 주었다.


추운 겨울날 묵은 김치를 넣은 콩비지를 호호 불어 한 술 뜨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약간은 거칠면서도 고소한 콩비지는 배가 불러도 계속 먹을 수 있을 만큼 맛있었다. 나는 김치를 넣은 콩비지도 좋지만 그냥 허연 콩비지국이 훨씬 맛있었다. 어릴 적부터 음식을 싱겁게 먹었는데 아마도 두부를 포함한 음식들이 그런 습관을 들게 만드는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가 지금의 직장에 근무한 지 3년 정도 되었을 무렵, 공장부지가 도시계획에 의해 헐리게 되었을 때 아버님의 어깨는 축 쳐지셨었다. 두부공장을 통해 나와 두 동생 모두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은 말할 수 없이 크셨을 것이다. 마침 내가 운전을 할 줄 알기 때문에 아버님이 하시던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우선 주말마다 내려와 공장부지를 알아보았다. 태백은 평지가 많지 않고, 대부분의 토지들은 서울 사람들이 많이 샀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마 서울사람들이라 해도 이 지역과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겠지. 평당 30만 원이 넘는데 적어도 200평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부제조 설비는 대구지역에 알아보았는데 대략 3천만 원 정도 든다. 건축비까지 합하면 1억 5천만 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한다.  계산해 보니 2-3년 정도만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갚을 수 있는 돈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부 시장 전체 규모가 확대되면서 대기업에서 두부사업에 진출한다는 뉴스가 뒤덮었다.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다.



두부는 아버님과 나를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다.

지금도 시장에서 두부를 사거나 마트에서 두부를 살 때마다 아버님을 떠올린다.

새벽에 수증기 가득 찬 공장에서 비닐 앞치마를 두르시고 열심히 일을 하시던 모습.

콩물에 끓인 라면을 같이 나눠 드시면서 웃으시던 추억들.


두부, 콩비지, 콩물, 순두부는 어릴 적 내 몸의 근육을 형성해 준 고마운 음식이자  

비록 여기에 계시지 않지만 아버님의 분신과도 같은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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