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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Nov 25. 2023

아버님 7주기에 부쳐 #4

조상 섬기는 내면에 자리 잡은 자식 사랑

아버님은 제사를 가장 소중한 의례로 여기셨다. 할아버지는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님은 위로 누나와 아래로 남동생과 같이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예닐곱 살 때부터 큰 과제였다. 한국 전쟁의 참화가 쓸고 간 뒤 밥벌이의 중심 할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아버님은 무력하고 쓸쓸하고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내셨다. 그 와중에 할머니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시고 증조할머니의 정성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하신다. 여러 제사를 정리하고 최종적으로 아버님께서 내게 소원을 말씀하실 때도 증조할머니 제사를 말씀하셨을 정도이니.....


그 가난으로 인해 아버님은 아들이 없는 큰 집의 양자가 되셨다.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지만 더 큰 상처가 남게 되는 일들을 오랫동안 겪으셨다. 마침내 어머님을 만나 태백으로 오면서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얼마나 일을 하셨는지 짐작하는 대목 중 하나가 "5년간 땔 나무를 다 해놓았다"는 말씀이었다. 양자로 가신 경험은 평생 동안 아버님께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본인이 선택한 길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조상을 모시는 제사와 벌초를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셨다. 


그 근저에는 조상을 잘 모시면 자손들이 잘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의 대상은 바로 우리들 삼 형제였다. 당신은 잘 못 배우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지만, 당신의 자식들만큼은 이 힘든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으셨던 아버님의 마음이 눈에 선하다. 광부로 일하시던 시절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1년에 열 번이 넘게 제사상을 차리셨다. 제사 시간은 추석과 설명절을 제외하면 꼭 자정에 지내셨다. 졸음을 참아가며 엄숙하게 지내던 차례는 어린 마음에 지루하고, 힘들어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이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셨다. 아주 어릴 적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누나와 남동생 이렇게 셋이 어렵게 사셨다. 어느 정도 어려웠냐 하면 바가지를 들고 동네에서 음식을 얻어먹어야 할 정도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다른 집으로 재가를 가셨기 때문이다. 이때 아버지를 돌봐 주셨던 분이 증조할머니다. 감천에 가면 증조할머니 산소가 있다.


철이 들어 아버님께 증조할머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아버님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분이셨다. 추석명절 전에는 꼭 감천 천항동으로 벌초를 다녀오셨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님 혼자 다니셨다. 졸업 후 중고차를 사주시고 나서부터 아버님과 벌초를 하러 같이 다니게 되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자동차로 그곳을 처음 가보고 나서 아버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차 없이 대중교통을 타고 그곳까지 다녀오시기 너무 힘드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버스로 영주까지 가셔서 다시 예천행 버스를 타고 중간에 덕율이라는 곳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셨다고 하셨다. 택시가 안 잡히면 걸어서 그 길을 가셨다. 


아버님과 벌초를 다니면서 아버님께서 힘들게 사셨을 때의 얘기를 해주신다. 풍기까지는 차로도 30여분 걸리는 길인데 재가하신 어머님이 보고 싶어 풍기까지 산을 몇 개를 넘어 걸어서 다녀오셨다는 얘기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환영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먼발치에서 어머님 모습을 보고 다시 그 먼 길을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처음 아버님을 따라 벌초를 했던 곳은 네 군데였다. 증조할머님, 고조할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의 전 아내 산소까지 네 군데를 다니자면 거의 세 시간가량 걸렸다.


1년에 한 번 가는 길이라 산소 주변에는 늘 잡풀들이 많이 자라 있었다. 아버님은 낫질을 능숙하게 하셨으나, 나는 어설프게 일을 해서 내가 낫질을 한 자리를 다시 아버님이 낫질을 하셨다. 그렇게 낫질을 하고 나면 땀이 흥건한 아버님에게 고작 내가 한 일은 수건을 권해 드리고 자리를 깔고 과일과 북어포를 놓고 술잔에 술을 따라드리는 정도였다. 엄숙한 표정으로 절을 하시고 한 잔은 산소 주변에 뿌리시고 한 잔은 드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 묘와 관련 사건이 발생해 우리 가족 모두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아버님은 본래 큰 집으로 양자를 가셨었다. 지금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마는 어린 나이에 양자를 간 것만으로도 힘드셨을 텐데 할아버지의 직계가 아니라는 자격지심에 불을 붙인 사건이었다. 아버님과 상의도 없이 감천에 있던 할아버지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아버님께서 상심이 크셨던지 화를 많이 내셨다. 나 역시 화가 났지만, 아버님께 마음속에 할아버지를 모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었다.


나이가 들어 나도 어느새 아버님과 한 잔씩 주고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아버님은 10여 년간의 광부생활 후유증으로 진폐증을 앓게 되셨다. 병은 조금씩 조금씩 깊어가고 기침소리는 점점 더 깊게 내려갔다. 아버님께서는 몸이 점점 쇠약해지시면서 벌초할 곳을 한 군데씩 정리하셨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증조할머니 산소만 남기셨다. 2015년에는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예천으로 벌초를 갔다. 간 자리에서 아버님은 유언처럼 내가 죽거든 증조할머니 산소도 화장해서 없애라고 하셨다.


그때 내가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산소를 모시겠다고 했다. 아버님은 곧바로 좋아하는 내색을 보이셨다. 2016년 돌아가시기 직전 추석 때는 우리만 벌초를 다녀왔다. 그 뒤로 아버님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다. 어머님께 여쭈었더니 그냥 산소 그대로 놓아두라고 말씀하셨다. 아버님께는 참으로 죄송한 일이 되고 말았다. 겨우 설과 추석명절에 제사를 드리고 있을 뿐이다.


명절 차례를 지낼 때면 늘 아버님과 같이 차례를 지낸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 진지한 표정 속에서도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세월이 지나고 당신이 돌아가시고 여러 해가 흘러서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아마도 완전히 깨닫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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