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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무 Jan 04. 2024

2023년과 2024년 : 어제와 오늘

삶은 대형 이벤트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조각조각 소중한 순간으로 이루어진 하루들이 축적되고 쌓여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과정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해서 배워야 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방향이 중요하다. 올바른 방향이라는 전제하에 완성된다는 것이지 방향이 잘못되고 전제가 잘못돼 있다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망가지는 것이다. 1999년 12월 31일을 기억해 보면, 내일 당장 큰일이 날 것처럼 했다가 2000년 1월 1일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수많은 말들의 대잔치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잘못된 방향성에 관한 사례는 차고 넘친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 수십억을 준비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대는 사람들....보편을 지향하는 것처럼 얄팍하게 떠들어대는, 그러나 보편적인 견해에 가닿기에는 근거가 매우 부족한, 각자의 삶의 특수한 상황을 보편으로 밀고 나가려는 편협한 식견들의 방향들은 잘못되었다. 내가 이렇게 단호히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사람마다 시절마다 환경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 근육을 단련하는 근테크가 더 필요하고, 고독한 상황에서 삶을 즐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차고 넘치는 수많은 조건들속에 하필 돈만을 그려넣는 이유가 정말 궁금하다. 방향성이 중요하다.


어제는 12월 31일이었고 오늘은 1월 1일이다. 요즘은 작년이 가고 올해가 온다는 생각보다는, 어제가 가고 오늘이 왔다는 단 하루의 변화가 현실적임을 깨닫는다. 여기에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서, 매일매일의 어제와 오늘을 작년과 올해와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면 어떨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을 보내고 새로운 날을 맞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어제의 나는 어떤 나였던가,  오늘의 나는 어떤 선택과 변화를 할 것인가를 매 순간 생각하고 산다면 굳이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눈처럼 쌓일 것이다.  



뇌 공부를 하면서 뇌신경 가소성의 중요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뇌 세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줄어든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던 시절에는, 세포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뇌의 기능이 점점 줄어들고 그래서 자연퇴화된다고 믿었다. 그러니 나이 들어가는 것이 자꾸만 겁이 났다. 뭔가를 잊어버리는 사례도 자주 등장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런데 뇌의 특성 중 주의 집중을 한 기억이냐 아니냐가 기억을 꺼내는데 핵심임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의심했는데, 뇌신경 가소성을 공부하며 그 전제에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뇌신경가소성은 뇌가 배우고 경험한 것으로부터 변화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뇌의 연결이 강해지거나 바뀐다. 이런 변화는 기억과 학습을 돕고, 심지어 뇌 손상 후에도 회복을 도와줄 수 있다. 그러니 계속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뇌신경간 새로운 연결 구조에 대한 이런 생각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충분히 우리가 살 수 있고 새로운 날들을 만들어 가는 데,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요구한다. 즉, 누군가의 말의 권위나 한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 역시 편향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과도 연결된다. 나만의 관점, 내가 노력한 만큼 보이는 관점 말이다. 그렇게 소중한 순간들로 하루를 일 년처럼 채워나가는 것. 시간은 더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내가 하는 일들에 대한 의미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더 돌아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내가 지금 여기 존재할 확률은 계산해 보나 마나 제로에 수렴될 것이다. 시간적으로 우리가 지금 여기에 발딛고 살고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완벽한 기적이며, 이제까지의 삶도 기적이었고 앞으로의 삶도 기적이 될 것이다. 현재 나는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기적은 내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내 삶의 의미를 내가 주도적으로 만들어간다. 내가 만든 의미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때로는 그 타인으로 의미가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시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보다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만들어나가는 것,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어제가 가고 오늘이 왔다. 2023년이 가고 2024년이 왔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2023 년이 간 게 아니라 2023년이 나에게 축적되는 것이다. 2022년 2021년 2020년 2019년.... 그 모든 의미 있는 시간들이 그리고 그 모든 의미 있는 시간들 속에서 내가 벌였던 수많은 일들이 나에게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어제가 가고 오늘이 왔다. 그 축적된 삶의 의미들을 한 번쯤 되짚어 보고 내가 올바른 방향에서 있는지 아니면 키치(Kitsch)들의 백색소음*에 현혹되어 가짜의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잘못된 방향도 문제지만, 누군가에게 의존하면 삶은 편해질 수 있을지언정 자신의 삶으로 만들지 못해서 주도적인 삶의 끈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꼭 그렇게 살아야 될 필요가 있는가?




어제와 다른 오늘이지만 오늘은 뭔가 그래도 특별한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며 뭔가 소망을 빌고, 계획을 세우고, 관계를 확장하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면서(평생 만나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통계적으로 150명 내외라고 한다). 다정하게 편한 사람들과 오순도순 모여 앉아 밥 한 끼를 나누며 이 시간이 나에게 주는 축제와 같은 축복을 그래서 행복한 순간을 즐기리라. 밥 한 끼 나누면서 정다운 대화를 나누고, 그 정다운 대화가 올 한 해 의매일 맞을 오늘과 내일의 올바른 방향성을 정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해야 된다. 키치들이 아닌 사람들의 진실한 메시지는 책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서 얼마든지 우리가 들을 수 있다. 이전에 삶을 살다 간 수많은 선배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얼마나 멋지고 설레는 가? 나의 뇌 신경망의 배선 연결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도 이 여행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올 한 해 해야 될 일 중 이 글을 읽는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 2023년 연말에 챗지피티 유료 서비스에 가입했는데, 벌써 한 달치 서비스 구독료를 뽑은 셈이다. 챗지피티가 그려주는 새로운 그림들이 나의 글과 매칭되면서 열어 놓은 새로운 세계!! 키치들에게 현혹되지 마시고, 챗지피티와 대화를 하면서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는 사람들과 어떤 내용의 콘텐츠를 공유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키치들의 백색소음 : 키치란 원래 독일어로 '저속한 예술품' 또는 '가짜 예술품'을 의미. 19세기말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예술작품, 특히 감정적이고 센티멘탈한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작품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키치는 단순히 예술적 스타일이나 미적 카테고리를 넘어서는 것으로 진정성과 현실성을 희생하고, 대중의 감성적, 이상적 욕구를 반영하며, 종종 감정적 조작을 통해 대중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키치는 현실을 단순화하고, 불쾌한 사실을 은폐하며, 세상을 단순하고 이상적인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쿤데라는 키치가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사용되는지도 탐구한다. 그는 키치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사용되어 대중을 조종하고, 반대 의견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일부 언론에 등장하는 키치들은 이상적인 세계를 묘사함으로써 현실의 복잡성과 문제들을 은폐하고, 대중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킬 수 있다. 키치는 감정적 조작, 현실의 단순화, 이상적이거나 선정적인 이미지의 제시와 같은 특징을 갖는다. 언론과 저널리즘의 맥락에서, 이와 유사한 현상은 때때로 발생할 수 있다. 과도하게 선정적이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하거나, 복잡한 이슈를 과도하게 단순화하여 보도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의 보도는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고, 현실보다는 언론 매체의 이야기나 이데올로기를 강조할 수 있다. 이는 쿤데라가 지적한 키치의 특징과 유사하게, 현실을 왜곡하고 단순화하는 경향을 반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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