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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제비 Apr 23. 2024

가길 잘했다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비교적 평온했던 주말 지인의 부고를 들었다. 멀지 않지만 가깝다고 하기도 애매한 관계였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최종원 교수의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는 말과 '경사에는 가지 않더라도 조사에는 가는 게 맞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사실 가지 않아도 될 명분은 충분했다. 주중에는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에 주말은 가급적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편이다. 토요일 저녁 상갓집에 간다는 것은 자녀들과의 시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의금 또한 부담이었다. 5만 원, 10만 원이 누군가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단돈 1~2천 원을 아끼기 위해 매일 점심메뉴를 고민한다. 


7살 둘째와 저녁을 먹으며 말했다. 


"아들, 아빠 밥 먹고 장례식장에 가봐야 될 것 같아."


"아빠, 장례식장에는 왜 가는 거야?"


"아빠 아는 사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가서 위로해 줘야지."


"그런데 어떻게 위로해 줘?" 


아들의 질문에 명확하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조문을 갔을 때 상주와 맞절을 한 뒤 제대로 된 대화를 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상실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같은 말을 듣는 게 대부분이었다.


빠르고 효율적인 것이 미덕인 시대를 살아가다 보니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도 예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한 명을 사귀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배울 것이 있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서로의 삶을 깊이 공유하기보다는 적당히 거리를 두며 상처를 덜 받는 것을 택한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찾는 조문객은 개인적인 목적이나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닌, 순수한 마음으로 고인과 상주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공간에는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과 그런 유가족을 위로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큰 액수의 조의금을 내지 않더라도 그런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중에 있는 사람에게 방문할 때는 내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닌, '나 자신'이 위로의 수단이자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공간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과는 달리 장례식장에서의 만남은 형식적이라기보다는 본질적인 느낌이 든다. 짧은 시간 동안 몇 마디 말을 나누지 않더라도 여운은 짙고 길게 남는다.


요즘은 3일장을 치르는 것을 많이 본다. 아직 상주가 된 경험은 없지만 3일 내내 조문객을 받고 장례식장을 지키는 과정은 아주 고되고 외로울 것 같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복장으로 같은 목적을 갖고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다 보면, 죽음이라는 말이 단순히 학습되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에 뿌리 깊게 새겨지지 않을까. 


별로 가깝지 않은 관계라 자위하며 애써 모른 척하기보다는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지인이 조문객들을 만나는 동안만이라도 마음을 환기시키고 한 줌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상실과 아픔으로 공허해진 마음이 다른 생(生)들로부터 얻는 따뜻한 온기로 조금이나마 채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내내 비가 지긋지긋하게 왔다. 토요일 늦은 저녁 방문한 장례식장은 꽤나 한산했다.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고 있는데 멀리서 나를 알아본 지인이 대번에 달려왔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이 그새 더욱 야윈 것 같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나를 바라보는 눈에서 부고를 직접 알리지 않은 미안함과 예상치 못한 조문객이 왔다는 놀라움, 그럼에도 와줘서 고맙다는 감사함이 뒤엉켜있는 것을 느꼈다.


"웃는 거야 우는 거야. 밥은 뭇습니까?"


어색하게 웃으며 내 손을 연신 잡으며 '왜 너가 여기에?'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녀에게 내가 한 말이었다. 큰 위로와 도움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따뜻한 밥 한 공기의 온기라도 전달해주고 싶었나 보다.


갈까 말까 할 때는 확실히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내가 가진 무언가가 아닌 나라는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힘을 주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감사했다.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한 느낌이 들었다.


가길 잘했다.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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