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감사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수제비 Jun 12. 2024

감사 5일 차 : 늦은 점심을 먹고

30도가 훌쩍 넘는 때 이른 폭염에 안 그래도 낮은 기동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끼니때가 지났는지 멍한 느낌도 더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3시가 다 되어간다. 생각 없이 더 일하다가는 첫끼가 저녁이 될 뻔했다.


업무차 거제도에 들렀다. 혼자 밥을 먹는 게 일상이라 지역별로 애용하는 전용 식당이 있는데, 이곳은 단골이라 할만한 곳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는다. 거래처 사장님들에게 물어봐도 시원찮은 답변뿐이다.


이 동네 밥 물데 없다


거제도에서도 중심상권이 아닌 한적한 곳에서 간단히 요깃거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패스트푸드는 가성비가 별로고 밥을 먹고는 싶은데 문을 연 식당이 안 보였다. 골목길을 헤매며 두리번거리던 찰나 영업 중인 가게를  찾았다.


====

황태칼국수

수제비

콩칼국수

====


칼국수 외길인생 40년 차의 소견으로는 실패확 확률이 적은 건 칼국수다. 수제비는 업소별로 반죽상태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검증된 곳이 아니면 칼국수를 시키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칼국수가 아닌 수제비를 시켰다. 두 메뉴 모두 사랑하지만, 칼국수 앞의 '황태'라는 단어에 확신이 들지 않아서였다. 황태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다시 국물과 황태의 콤비네이션이 섣불리 예상이 되지 않았다. 황태는 보통 해장국과의 조합이 무난한데.


고민 끝에 수제비를 주문하자 사장님의 퉁명스러운 답변이 들려왔다.


밥묵고 줄게. 좀 기다리소


사장님과 직원으로 보이는 두 명이서 늦은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쓸 매출규모나 상권으로 보이진 않았다. 튼 것도 안 튼 것도 아닌듯한 에어컨 두대를 보며 고객만족과 비용절감 사이에서 씨름하는듯한 사장님의 고민이 느껴졌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손님) 안 와서 한술 뜨고 있구만..


사장님의 서비스가 썩 좋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나가기도 귀찮았다. 손님인 나를 향한 원망인지 밥 먹을 겨를조차 없는 현실에 대한 한탄인지 모를 푸념을 가만히 들었다. 혹시 저들도 오늘의 첫끼를 막 먹는 참이었을까. 본의 아니게 내가 그것을 방해한 건가.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내가 10분 정도만 앉아서 기다리면 문제는 없다. 내 목적은 서비스가 아닌 음식이며 무엇보다 나는 수제비를 좋아하니까.



황태가 숨어있는 수제비. 다대기를 너무 많이 넣어버렸다..



수제비는 나쁘지 않았다. 최고 까지는 아니었지만 다음에 또 먹으러 올 정도의 맛. 다른 곳과 차이가 있다면 황태와 버섯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수제비에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토핑류는 아니지만 씹는 맛과 영양학적으로 +효과를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다.


하나 실수한 것은 과도한 다대기 셀프 투척으로 인해 살짝 매운 버전이 되어버린 것. 오리지널 멸치다시 국물의 짭짤하면서 맑고도 걸쭉한 감칠맛이 덜 느껴져서 못내 아쉬웠다. 다음번에는 다대기를 제외하고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34도의 더위를 뚫고 후후 불어가며 먹은 수제비로 인해 남은 업무를 쳐낼 힘을 얻는다. 해결되지 않는 것 투성이에 해야 할 것들이 잔뜩 쌓여있지만, 오늘도 불만과 우울보다는 긍정과 감사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가지려 노력한다.


자칫 처지기 쉬운 계절이다. 오늘 하루도 정신 차리고 파이팅 할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감사 4일 차 : 고맙다, 동백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