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받는 일이 드물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웬만한 것들은 검색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다. 너무 바쁜 삶, 반복적이고 똑같은 삶이라서 크게 도움을 구해야 할 상황이 없기도 하다.
삭막하고 분주한 사회 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귀에 이어팟을 꽂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보며 빠르게 걷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무더운 날씨는 사람들의 표정을 무표정이 아닌 짜증과 분노에 가깝게 만든다. 흉악범죄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시대이기에, 누군가에게 선뜻 친절을 베풀기보다는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몇 달 전이었나. 퇴근시간에 도시철도 1호선을 이용하고 있는데, 1량(1칸)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노인이 있었다.
아직 팔팔하다니까 젊은 X이 사람 무시하노. 괜찮다 안 하나. 앉아 있으라니까 말 X나 안 듣네.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뭐 이런 말들이 3분 정도 열차를 가득 메웠다. 누가 봐도 자리를 양보해줘야 할 것 같은 고령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던 여성은, 고맙다는 인사가 아닌 끝없는 폭언샤우팅에 어쩔 줄 몰라했다. 사람들의 반응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지던 고함은 여성이 하차할 때까지 이어졌다. 누군가의 친절과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상한 감정을 이런 식으로 브레스 뿜듯이 발사해 버리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30도를 가볍게 뛰어넘는 불타는 금요일 늦은 오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할아버지 한 명이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부딪힐까 봐 일부러 거리를 두며 걸었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걸음이 어색하게 나를 향해 따라왔다. 뭔가 물어보려고 하는 눈치였다.
총각, 길좀 물어봅시다. 여기 도착지를 찍었는데 여가 도대체 어덴교? 동서남북이 안 나오니 찾아갈 수가 있나. 장례식장이 도대체 어데고?
나는 총각이 아닌 아이 둘 딸린 아버지인 데다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길치이지만, 이 날씨에 검은 양복을 빼입고 비 오듯 땀을 흘린 채 티맵 어플을 켠 핸드폰을 답답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 노인을 모른척할 수는 없었다.
도보로 12분 나오네요. 걸어가기 힘들낀데. 택시 타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하지만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은 다음과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서 안내해라. 동서남북만 똑바로 되어 있으면 이까짓 거 일도 아니다.
장례식장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직진 - 우회전 - 직진 - 우회전. 큰길 따라 쭉 따라가면서 방향전환을 하는 포인트만 잘 잡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어플을 따라 목적지를 찾아가기에는 많이 버거워 보였다.
저 앞에 신호등 보이시죠. 큰길 앞에. 저기서 우회전하시고 쭉 앞으로 더 가서 한번 더 꺾어서 쭉 따라가시다가..
할아버지는 씩 웃으며 내게 고맙다고 했다. 이놈의 어플은 왜 동서남북이 똑바로 표시되지 않냐는 불만을 끝내 숨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갈 수 있겠다고 하시면서.
돈 들이지 않고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준 하루였다. 사실 나도 종종 어플을 보며 길을 헤맬 때가 많은데, 그나마 익숙한 동네라서 안내를 잘해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갔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