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의 용기

by 한끗

우리는 흔히 멈추는 것을 두려워한다. 초등학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달리기가 시작된다. 성적은 우리를 줄 세우고, 시험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회에 나서면 성과와 실적,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생존의 압박이 쉼 없이 우리를 몰아세운다. “더 빨리, 더 멀리, 더 앞서”라는 외침 속에서, 멈춘다는 것은 곧 낙오자가 되는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라. 멈추지 않고 달리는 것만이 과연 삶의 길일까? 기계조차 무리하게 돌리면 고장이 나고, 땅조차 쉬지 않고 경작하면 메말라 버린다. 하물며 인간이 어떻게 쉼 없는 질주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멈춤을 두려워하지만, 멈춤이 없다면 삶은 오히려 파괴되고 만다.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

현대 사회는 ‘속도’를 신앙처럼 떠받든다.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정보, 순식간에 바뀌는 트렌드, 어제의 새로움이 오늘의 구식이 되는 광경 속에서 사람들은 한 걸음만 늦어도 도태될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끝없이 달리라는 압박은 결국 우리를 갉아먹는다. 학생은 성적에 시달리다 무너지고, 직장인은 성과의 굴레에 지쳐 삶의 의미를 잃는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달리지만, 자녀는 미래를 위해 달리지만, 정작 행복은 어디선가 길을 잃는다.

멈춤 없는 삶은 방향을 잃는다. 지도를 펴지 않은 채 숲속을 달리는 여행자가 더 깊은 미로 속으로 들어가듯, 우리는 멈추지 않는 동안 목적을 잊고 헤매게 된다.


멈춤의 참된 의미

멈춤은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멈춤은 나를 지켜내는 선택이다.

숨이 가빠 달리던 이가 발걸음을 멈추어 호흡을 고르듯, 멈춤은 우리를 회복시킨다. 겨울의 나무가 성장을 멈추고 뿌리에 에너지를 쌓는 것처럼, 멈춤은 내면을 단단하게 한다.

그리고 멈춤은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눈앞의 길만 보던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옆길에 숨어 있던 풍경이 보인다. 작은 길가에 핀 들꽃, 노을이 물드는 하늘, 함께 걸어오던 이의 따뜻한 손길.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삶의 선물이, 멈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이 들려주는 가르침

자연은 오래 전부터 멈춤의 지혜를 보여주었다.

강은 흐르다가도 굽이치는 곳에서 잠시 고요해지고, 그 고요 속에서 더 깊어진다. 바다는 쉼 없이 파도를 일으키지만, 그 심연은 언제나 고요하다. 계절은 끊임없이 돌고 돌지만, 겨울의 정지가 없다면 봄의 싹은 솟아나지 못한다.

농부는 땅을 쉬게 한다. 해마다 같은 땅을 갈면 땅은 병들고 척박해진다. 그래서 휴경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 멈춤이 땅을 살리고, 생명을 되살린다.

자연이 그러하듯 인간도 그렇다. 인간은 달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멈춤을 통해 살아나는 존재다.


멈춤이 길러내는 지혜

멈춤은 우리에게 세 가지 지혜를 준다.

첫째, 자기 성찰의 지혜. 멈춘 순간 우리는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이 길을 걷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달릴 때는 앞만 보기에 급급하지만, 멈추었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둘째, 관계의 지혜. 바쁘게 달리다 보면 함께 달리던 이들을 잊는다. 그러나 멈춤의 순간, 내 곁을 지키던 이들의 얼굴이 보인다. 뒤처진 누군가의 발걸음, 묵묵히 동행해 준 사람의 온기. 멈춤은 우리를 고독에서 관계로 이끌어 준다.

셋째, 시간의 지혜. 멈추지 않는 동안 시간은 모래처럼 흘러가 버린다. 그러나 멈춘 순간 시간은 머무른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삶의 향기를, 순간의 빛깔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멈춤이 빚어내는 힘

멈춤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강하게 만든다.

운동선수는 끝없는 훈련만으로 강해지지 않는다. 경기 전에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그 휴식이 근육을 회복시키고, 다시 폭발적인 힘을 만들어낸다. 음악도 그렇다. 음표들 사이에 박힌 쉼표가 없다면 음악은 단지 소음일 뿐이다.

삶도 같다. 멈춤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달린다. 멈춤은 도약을 위한 숨 고르기이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다.


멈춤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기는 쉽지 않다. 다른 이들이 모두 달려가는데, 나만 멈추면 뒤처질까 두렵다. 다시는 따라잡지 못할까 불안하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무작정 달려가는 데 있지 않다. 필요할 때 멈출 줄 아는 데 있다. 멈춤의 용기를 가진 이는 세상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남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나를 희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의 걸음을 지키며, 자신이 선택한 순간에 멈추고 자신이 정한 때에 다시 나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삶을 온전히 책임지는 자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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