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가 시기인 만큼 산책할 맛이 나지 않는 요즘이다.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는 말이 맞겠다. 틈나는 대로 뉴스를 들여다보고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안부를 묻고 실시간 채팅을 들여다보느라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날씨만 보아도 봄은 산책하기에 좋은 계절은 아닌 것 같다. 미세먼지가 요 근래에 줄곧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비염이 심한 나는 미세먼지가 심한 날 밖에 나가면 마스크를 썼을지라도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나 온몸이 아파온다. 코와 광대가 아프고 심할 땐 전신 증상이 있다. 매 해 봄이면 비염으로 고생을 하며 불평을 했는데, 올해는 비염증상은 있을지언정 신경이 온통 실시간 뉴스로 향해있다. 지금은 불평도 배부른 소리 같다.
강풍이 심했던 그저께는 멋모르고 점심 식사 후 잠깐 산책을 나갔다가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돌아왔다. 바람 자체도 강했던 하루였지만 여기저기서 작은 돌풍이 일어나 온갖 모래와 먼지와 낙엽들을 끌어 모아서는 강풍 따라 술 취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상황들을 보았다. 내가 걸어가던 길에도 예고도 없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모래 공격에 당해버렸다. 돌아와서 거울을 보니 머리카락 안에도 얼굴에도 꺼뭇꺼뭇하게 모래들이 붙어있다. 도심에서의 바람도 이럴진대 산바람이야 말도 못 했겠지 싶어 나도 모르게 근심 어린 얼굴을 했다. 비나 확 내렸으면.
뒷산을 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막내이모는 벌써부터 재난 가방을 미리 싸놓았다고 한다. 여차하면 나름의 도심에 계신 부모님 댁으로 가려고. 그러면서도 주위에 같이 살고 계시는 큰 외삼촌네를 걱정한다. 가더라도 같이 가야지 않겠냐며. 고향은 본격적인 화재 지역은 아니지만 비교적 화재 구역들과 가까운 곳에 위치에 했는지라 다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듯하다. 부모님께도 연락을 드리면 잠을 잘 못 주무셨는지 평소와 다른 거칠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신다. 건조하다. 사람들 목소리도 공기도. 피해지역 주민분들의 인터뷰를 보았다. 화마가 지나간 뒤의 잿더미 속에서 그을린 듯 어두운 얼굴과 바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인터뷰를 하시다 이내 북받쳐 울음을 낸다. 나도 모르게 같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흘린 눈물들이 곧장 빗물이 되어 타고 있는 마음과 바짝 말라비틀어진 대지에 쏟아져 내린다면 좋을 텐데. 마음이 무겁다.
푼돈이지만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기부를 하고 있다. 한 번 시작했더니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해당 단체에서 문자를 보내준다. 함께 힘을 모아 도와주자고. 어릴 때부터 수해가 일어나는 등의 자연재해로 지상파 뉴스에 연일 보도가 될 때면 화면 상단 모서리에 떠있는 기부 전화번호로 몇백 원씩, 몇천 원씩 기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기부는 원래 남몰래하는 거라 하던데 커다란 재해 앞에서는 이런 자신만 아는 고상함은 떨고 싶지 않다. 아마도 어릴 적 수해를 몇 번 입었던 동네에 살았던지라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지나 보다. 무섭게 불어나는 물에 집이 잠겨버려 오갈 데 없었던 이웃들이 우리 집에 와 며칠을 함께 묵었던 기억도 있다. 아주 어릴 적이지만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억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집을 잃고 망연자실했던 분들이 그 뒤엔 어떻게 다시 자리를 잡고 살아갔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이야기를 들었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휘발되었을 것이다. 그땐 어른들의 일이라 생각하며 어린 마음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집이란 것이, 내가 사는 터전이란 것이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게 주어진 것들이 아님을 안다. 내 의지와 다르게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외부의 고통이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방식은 다르더라도 직간접적으로도 겪어 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화면 속의 어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쩔 땐 마음보다 내 무릎에 먼저 힘이 풀려옴을 느낀다.
오늘 작지만 비소식이 있다고 들었다. 이왕이면 예측보다 많은 비가 내려 지금의 상황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작지만 소중한 관심과 온정들이 모여 아픔이 있는 곳에 다시 희망이 되어주기를 조심스레 바래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