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대로 글쓰기. 봄을 핑계로
꽤나 고약했던 지난날들이었다. 뭐 그리 지리하게도 들러붙었던지 씹다 버린 껌들이 덕지덕지 붙어서는 딱딱히 굳어 떨어지지도 않는다. 뭐 그렇게 씹어댔는지. 뭐 그렇게 턱이 아프도록 씹어댔는지. 단물 다 빨아낸 껌들이 시꺼멓게 내 뇌에, 마음에, 몸에 들러붙어 떼어낸다고 얼마나 앓아댔는지 모른다.
부지런히도 떼어내고 긁어댔다. 어떤 껌은 다 떨어진 지도 모른 채 혼이 나가 피가 나도록 긁어댄 자국도 있다. 차라리 내 에고까지 죽여버리고 말지. 재생 불가한 상태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니 그냥 나는 나를 없애버리고만 싶었다. 내 안의 긴 시간 동안 자라온 나를 모조리 마주 할 테니 싹 다 마주하고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내가 없는 채로 새로운 삶을 걸어가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그놈의 욕구는 결코 시들 줄을 모르는구나. 참 나답다.
작년 한 해는 마지막 남은 껌을 마저 떼는 기분이었다. 살살 긁어내고 아. 이 정도면 예쁘게도 떼어냈네. 싶었는데 어떤 명리학 선생님이 그러셨다. 작년은 마지막까지 염병할 수 있는 시기이니 한 해가 바뀔 때 막바지 진통을 할 수도 있다고. 재미로 보는 명리학이라지만 정말이지 작년의 마지막 두 달은 병원만 주구장창 다니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보살이신 우리 시어머니 덕분에 나는 결혼 한 이후로 “이만하니 다행이다.”라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덕분에. 정말 덕분에 힘든 시기들을 그저 흘러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이 겹칠 때면, 흘러 보내기도 전에 그 피로감이 누적될 때면 이따금씩 욕지거리가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욕을 한바탕 시원하게 해 버리고 자기 전에 분노를 식혀줄 맥주 한 캔이면 또 그 하루는 제법 이래저래 셔터 내리고 잠들 수 있게 된다. 난 결코 우리 시어머니 같은 양반의 성격은 아닌 것 같다(당신의 아들보다 둔하고 남자 같은 성격의 며느리인데 어찌 결혼을 시켜주셨는지. 우리 어머니는 정말 보살이시다).
아직은 미숙하고 팔딱 뛰는 피의 나는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고선 “에라이. 별 수 있나.”라고 또 다음날 눈을 뜬다. 이래저래 하루 해를 맞이하며 살게 된다. 나는 그런 식이다. “에라이. 해야지 뭐.”, “지나 보내야지." 라는 말을 기도문처럼 하고 나면 그냥저냥 어느덧 지나있다. 성격이 그렇다. 일단은 표현은 하고 만다. 힘들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아. 언제 끝나지. 하다가도 에라. 해야지. 에라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자. 에라이 에라이 하다 보면 지나가있다. 그래서 늘 곁에서 지켜보는 신랑이 신기하고 재밌어한다. 나는 그런 신랑을 걱정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 그이가 힘들다고 말할 때면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정도의 힘듦이 아닐까 싶어서. “자기야. 안 힘들어? 힘들면 얘기해. 혼자 앓지 마. 알았지?” 는 내가 해마다 신랑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둘이 적절히 섞이면 좋을 텐데. 어쩜 달라도 이렇게 다를까.
이제야 쓰는 말이지만, 연말의 우당탕탕 난리법석이었던 사건은 내 아들과 신랑에게 일어났다. 아들이 먼저 오른쪽 발을 다쳐 한 달 넘게 깁스를 하더니 다 나아가는가 싶을 때에 신랑이 오른쪽 발가락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아침 등교와 출근을 위해 두 사람이 동시에 오른발을 절뚝이며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거기다 신랑은 그 일이 있기 몇 주 전에 혼자 뜬금없이 상가 앞에 후진 주차를 하다 바퀴를 찢어먹었다. 타이어 교체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거기다 휠도 삭아있다며 휠 교체까지 진행이 되었었다. 이게 모두 다 작년 음력 연말 두 달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나 또한 뜬금없이 난소가 좋지 않아 예후를 지켜보는 상황이었고 이래저래 셋이서 나름의 고초를 겪고 있었다. 물론,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심적으로 힘들었던 일들을 눈물을 머금고 정리하거나, 일적으로도 갑자기 무언가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정리가 되는 등의 짧고 굵은 일들이 있었다.
“아. 나이가 드는 것은 훅 치고 들어오는 것들을 하나씩 쳐낸 뒤 매일의 셧터를 내리고 잠드는 일의 연속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릴 땐 어른이면 당연히, 무조건 이런 것들에 처연하고 노련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어른은 그냥 되는 게 아니구나. 늘 낫과 호미를 들고 어른이랍시고 내가 벌여놓은 일들에 도발적인 이벤트들이 있을 때면, 쳐내고 또 메우고의 과정을 반복한다. 온 계절을 받아내고 소처럼 밭을 일궈나가는 것이 어른의 삶이구나.
그럼에도 내가 웃을 수 있는 건 같이 땀을 닦는 옆사람의 모습이 너무 예뻐 보여서다. 퉁퉁 불은 발가락으로 소파에 앉아 종일 티비만 보아도 사랑스럽게 보이는 내 어린것의 존재가 있어서다. 곁에서 부드럽게 몸을 부비다 털먼지를 옷에 쓸고 고고하게 돌아서더라도 다시금 끌어 안아 배방귀를 떨 수 있는 고양이가 함께 있어서다. 이토록 다른 존재들이 만나 공간에서 재미를 이야기하고 부대끼고 흩어졌다 모이고 다투다 화해하고 웃다 울다 하다 보면 나의 밭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겠지. 어떠한 그림을 그리건. 그 궤적들은 나만의 마스터 피-스가 되고야 말 거야.
그래서 나는 지브리 센과 치히로에 나오는 가마 할아범처럼 한 손엔 낫과 호미를 들고, 다른 한 손엔 약과 밴드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엔 계산기와 경제뉴스를, 다른 한 손엔 조리도구와 냄비를, 또 다른 한 손엔 펜과 노트를, 또 다른 한 손엔 나보다 앞선 어른들의 달력을, 또 또 다른 한 손엔 이것저것 이러저러한 것들을 들고선 쉴 틈 없이 나만의 밭을 일구고 있다.
이 가마 할아범의 팔은, 비밀인데, 도통하고 기민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영적인 것들이다. 맑은 영의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혹시라도 발견하셨다면, 나의 427번째 팔로 악수를 청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