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목요 산책 10화

봄 09. 상처의 쓰임

by 지호

아침부터 덜커덩 덜커덩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10분. 잠이 들깬 아이도 소리에 깼는지 안방으로 눈을 부비며 들어와 내 곁에 눕는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윗집에서 세탁기 돌리나 봐.”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라고 서로 나름의 추측을 하며 이런저런 몽롱한 대화로 이불속에서 살살 몸을 깨웠다.


먼저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 남편이 커튼을 젖혀 밖을 보더니 집 앞 중학교 운동장에서 나는 사물놀이 소리라고 한다. 가만 들어보니 장구며 북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저번주부터 운동회 같은 걸 하던데 아침 연습 중인가. 나는 "원래 운동회나 체육대회가 이렇게 길었던가." 하며 잠시 학창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랬더니 “길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다 하려면~ 우리는 다음 주인데…” 하고 말끝을 흐리는 아이... 녀석. 다리를 여태 다쳐서 체육대회 참여도 못하고 내심 속상하겠구나.

“아유~ 다리를 다쳐서 참여도 못하고 속상하겠어~?”

“응…” 하고는 표정이 슬쩍 어두워진다.

“너희 반은 체육대회 때 뭐 하는데?”

“아직 몰라.”

“아. 그날 가봐야 아는 거야?”

“응.”

“속상해?”

“그렇지? 다리땜에.”

“그러게~ 속상하겄네!

나는 있는 힘껏 아이를 안아주며 말을 골라보았다. 무슨 말이 좋을까. 운동신경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움직이고 뛰는 걸 좋아하는 아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대신 이 구역의 응원단장이 되어보는 건 어때? 못 움직이는 대신 열렬히 친구들을 응원하는 거지. 그러면 너도 추억이 되고 좋을 것 같은데?!! “

“응!!” 하더니 다시금 아이의 눈빛이 반짝인다. 네가 나보다 낫다.


나는 쉽게 낙담하고 잘 주눅 드는 편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이런 내가 아이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말을 하는 엄마가 되다니. 어쩌면 나처럼 주눅 드는 게 보기 싫어서 더 말을 고르고 더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고, 아이는 아이다. 이왕이면 나의 과거가 아닌 아이의 상황과 기질에 포커싱이 되어 잘 견딜만한 말들을 해주고 싶다.



산책을 하면 갖가지 종의 친구들을 만난다. 하루살이 떼들, 참새 떼들, 피고 지는 꽃나무들. 어제는 그런 무리의 친구들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하루살이들 중 몇 마리가 나가떨어져도 아무도 모를 테지. 우리도 그럴 거야. 저 참새떼들 중 한 마리가 죽는 일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그래도 세상은 굴러갈 테고.’


철마다 만나는 친구들인데 그저 하루살이 무리, 참새 무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는다. 인간들도 마찬가지겠지. 그저 자연과 우주의 한 일부일 뿐 우리가 지고 피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생각하니 삶이 너무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사람은.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인간은 사유하고 후회하고 재창조하는 힘이 있으니까. 저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그래서 인간이 특별하다는 그런 류의 생각은 아니다. 그저 무언가 더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근원이야 말로 저들과 다른 점이라는 걸 말하고 싶을 뿐.



종교에서는 삶이란 것에 의미를 찾을수록 고통이 더해진다고 한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집착을 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사들이지 말라는 뜻이겠지. 나도 모르는 무의식에의 끌림. 반복되는 행위. 이런 걸 알아차리기가 보통 사람이 하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이런 집착을 알아차리고 끊어낼 줄 안다면 세상은 물 흐르듯 편안한 일들만 가득하려나.


내면의 평온에 다다라 좀 더 마음 편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것도 과하면 집착이 되지 않을까. 참 어렵다. 집착 없는 삶이란 게.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편이다. 괴로움도 웃음도 행복도 사랑도 슬픔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라.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괴로움만 있는 것이 문제려니. 웃음만 있으려고 하는 마음이 문제려니.



나의 무의식은 과거의 아픔이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비롯한 무의식에의 행동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결혼 전부터 서울의 대형 서점에 가면 나도 모르게 심리학 코너를 서성이고 있었다. 무언가 내가 자라온 것들이 친구들과 다른 어떤 것이 있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무의식에 담아 놓고 묻어두기만 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스스로 그것들을 열어 마주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결국 나는 마주하고 바라보고 재창조하고 싶어 하는 욕구의 인간이구나. 이게 자연스러운 나구나.


바라본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인지하고 수긍하기까지 그간 묻어두었던 아픔을 고통 없이 받아들이기란 여간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심리 상담 전문가들이 있나 보다. 허나 나는 뭐든 혼자 하려는 습성이 있어서 스스로 심리 책을 얼마나 찾아봤는지 모른다. 그러다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으니 책과 전문가들의 말에 더더욱 집착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과거에 매몰되어 홀로 너무 힘든 날들을 보내기도 했다. 도대체 좋은 어른이란 건 어떤 것인가에 관한 물음을 수도 없이 했다.


'좋은 어른'이란 것에 너무 집착을 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삶이란 무엇이며 어떤 마음가짐을 사는 것이 나은 삶인가에 관한 집착에까지 이어졌다. 종교, 철학, 인문분야도 필요할 때마다 종종 서성이며 갖가지 좋은 말들을 수집하고 삶에 적용하려 애써보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니 이런 전문 서적이나 교육에 관한 관심은 어쩌면 나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고통을 덜기 위한 의지의 도구로 쓰였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너무 고통에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머리로 먼저 이해하려는 방어기제였던 것 같기도.


그런 지난한 여정들을 지나 지금에 다다랐다. 어느 정도의 중도의 길을 찾은 듯도 싶다. 자신만만한 길은 아니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선택이다. 결국 내 상처와 아픔의 시간들 끝에 나는 지금과 같은 선택들을 하게 된 것이리라. 좀 더 나은 삶, 좀 더 나은 배움, 나아지고 싶은 마음에의 무의식의 집착이 종국에는 나다운 선택을 하게 되었고 나는 차츰 변화하는 시간들을 마주하고 있다고 느낀다.


내 삶의 이런 아픔들이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어떻게든 더 나은 삶을 강구하는 게 인간의 본능 혹은 나의 기질이라면 나는 이왕이면 자연스럽게 내 아픔들을 좋은 방향으로 쓰고 싶다. 아니,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좋은 방향을 찾아 나갔으면 좋겠다. 척하지 않고 바로 바라보고 깨달아 나를 바로 인식하고, 더 나아가서는 담백하게 서로들을 서로 자체로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수없이 묻어둔 나를 발굴하고 껴안고 바라보는 과정이 나를 사랑하는 나의 첫 번째 과제였다. 나는 잘 사랑하고 싶고 잘 독립하고 싶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배우고 싶었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하며 살고 싶다.


부디 지치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도 뒷산에 올라 크게 숨 한 번 골라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