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책 친구들에게
이젠 산책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되었다. 달력을 뒤져보니 '입하'가 지나있다. 어느덧 이렇게…
나는 5월을 제일 좋아한다. 산책하기에 덥긴 하지만 좋아하는 초록들이 연하게 올라오는 계절이라 그 생동감과 여린 생명력에 감탄하게 된다. 초록이 절정인 여름도 좋지만 무언가 빈틈이 있어 할랑거리며 손 흔드는 지금이 나는 더 마음에 든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틈 사이로 부는 바람을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가 긴 장마나 폭우보다도 더 좋기 때문일 거고. 아무튼 이렇게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왔다.
봄이 지남은 이 연재도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음- 원래는 사계절의 목요 산책을 쓰고 싶었지만 처음 쓰던 시기와 다르게 지금 나의 목요일은 상당히 바쁜 축에 속하게 되었다. 일주일 중 가장 여유 있던 시간이었는데 역시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별 것 없는 글이지만 잘 마무리해야겠지.
봄의 물러남과 함께 거의 지난겨울부터 최근까지 이어오던 아이의 발 깁스도 드디어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사실 엄마로서 발을 계속 다친 상태로 지내는 아이를 보는 일이란 여간 마음 쓰이고 무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어머니에게 배운 주문 같은 말. '그래도 이만하니 감사합니다.'를 되뇌며, 그리고 아이의 상태를 인정하되 잘 겪어 보내보자는 나의 주문 같은 말 '받아들이고 물 흐르듯 하루를' 같은 것들을 되뇌며 이만큼 또 큰 탈 없이 지나오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아이 본인이 제일 힘들었을 텐데 불편한 와중에도 나름의 창의를 발휘해 등교도 하고 친구들과 노는 일도, 학원도 성실히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또 새삼 아이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이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어 본다.
불편하고 힘든 것, 오래가서 우울한 것, 짜증이 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에 대해 부드러워진 나를 또 새삼 발견했다.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나쁘다 생각했었는데 자연스레 받아들이니 외려 큰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신기한 경험도 했다. 그저, 우리 사는 일 중에 하나 일 뿐이고. 이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자주 인식하다 보니 어느덧 이런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듯도 싶다.
사는 것이 많이 불편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사고를 가질 수 있었단 것 자체로도 나는 나 스스로가 신기하고 놀랍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글쓰기라는 활동을 통해 새삼 또 인식하고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글쓰기는 막연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좋은 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내게 유익하다. 쓰지 않아도 발견하면 좋겠지만, 나는 둔하고 느려서 이렇게 정리를 하고 눈으로 확인해야 그제야 아. 이렇게 되었구나. 하고 안다. 나만의 하나의 생존 방식이 된 셈이다.
이토록 어리석은 나는 언제까지 쓰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될까. 잘은 모르겠지만 때때로 어리석어서, 감정이란 걸 소중히 생각해서, 생각이 많아서, 모순이라서, 이기적이라서, 허술해서, 에고가 강해서, 사는 게 불편해서 감사하단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것들이 아니라면 나는 아마 글을 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만나고 발견하는 일도 없었겠지.
계절의 흐름, 특히 요맘때를 제일 좋아하는 것은 혹독한 계절을 지나 끝끝내 다시금 새 순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결국 또 지독한 여름을 준비해 내는 생명력 때문이다. 흘러가고 순환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절 같아서 좋다. 아직은 내가 희망하고 꿈꾸는 게 있다는 이야기일까. 아직은 비릿한 어떤 마음들이 있다는 이야기일까. 아무렴. 그렇든 아니든 나는 지금이 좋다. 그러고 보니 20대 후반엔 가을을 좋아했다. 청명한 하늘, 익어가는 열매들을 보며 어떤 안정감 같은 것들을 느꼈다. 가을바람이 불면 그렇게 마음이 싱숭거릴 수 없었다. 지금의 남편도 그러고 보니 가을에 만났다. 우리는 아이라는 결실을 맺고 또 그 안에서 새로운 계절들을 돌고 돈다.
사실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좋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 어렵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것도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는 사실 누구보다도 제일 어렵고 어려웠다.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좋아하는 것들을 찾았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사랑을 이야기하고 이야기했다. 내가 부르는 사랑은 지구 몇 바퀴를 돌아 다시 우리 가정에게로,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리라 믿는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나는 계절을 반기는지도 모른다.
부끄럽지만 결국 나의 가장 순수한 본모습은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일 거다.
나의 순수한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한 친구들이 있다.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산책길의 그 녀석들이다.
봄을 알리던 산수유와 매화를 보며 이 추위에도 끝끝내 고고히 꽃을 피워냄에 감탄을 했었다. 정말이지 새삼스럽게도. 그리고 얼마나 추위가 이들을 시샘하고 있었지도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매 해마다 피어나는 매화꽃을 보면 존경 어린 마음으로 정중히 인사를 할 것이다.
만개하기를 기다렸는데 나 모르게 만개하여 한바탕 파티를 치렀던, 나를 약 올렸던 붉은 꽃나무다. 벚꽃 나무 종류인 것 같은데 이름을 잘 모른다. 좋아하면서도 이름을 자꾸 까먹으니 나는 여전히 그를 즐기는 내 모습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름을 외울 생각이다. 내년 봄엔 만개해서 보러 오마. 잘 자라라. 초록의 흔한 나무의 모습이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자주 인사하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를 닮은 민들레와 공원의 터줏대감 고양이도 있다. 울지 말고 살아내라. 하고 민들레는 그렇게나 매섭지만 따뜻한 눈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 고양이 녀석은 공원 생활이 너무 편한 나머지 내가 다가가도 미동이 없어 혹여나 밤 사이 나쁜 일을 당한 건 아닌가 하고 놀라게 한 녀석이기도 하다. 다행히 봄에 거하게 취해 잠에 들었던 것일 뿐.
어느 건물 주인이 심은 짙은 분홍 물든 목련과 봄의 상징 벚꽃들. 이 시기엔 다정히 봄은 손에 잡히는데 사람 마음은 멀기만 하다던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그 조차도 지난 노래가 되었다.
철쭉이 고개를 들었다. 화려하고 다양한 색상의 철쭉들은 사람의 시선 가까이에 피어나 나 이토록 피었어요. 하고 이야기한다. 봄이 절정이에요. 그러니 막바지 나를 보며 즐기세요. 나를 사랑해 주세요.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솔직하고 투명한 친구다. 그리고 때때로 산에서 만나는 귀여운 새들도 있다. 저 새는 얼마 전엔 우리 집 베란다로 들어온 적이 있다. 어떤 종인지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지나가다 우리 집에 들어온 녀석과 친척 뻘 즈음 되는 것 같아 귀여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밖에도 동네 일진들인 까치와 까마귀 형님들 무리도 자주 보았다. 이분들은 거의 사계절 내내 뵙는 것 같다. 얼마 전엔 까마귀 형님이 까치 형네 둥지를 털어 알을 물고 도망가는 걸 본 적이 있다. 까치 형님이 바라보던 허공을 나도 같이 바라봤다.
초록의 연한 잎을 햇볕에 반짝이며 할랑이던 나무들도 있다. 이름은 모르지만 내가 의지하는, 참으로 고마운 친구들이다.
새로 인식하게 된 친구들도 있다. 산책길에 아카시아 나무가 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다! 초록의 무성한 나무들로만 가득한 산책길 위에 꽃잎들이 어른이 팔 벌여 누운 정도의 넓이에 떨어져 있다. 다른 곳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데 유독 이 길목만 이렇다. 향기는 또 지독하게 좋다. 아릿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진한 꽃내음에 고개를 바삐 둘러본다. 주위를 둘러봐도 꽃나무는 보이지 않다가 혹시나 싶어 고개를 과감히 쳐들어 하늘을 보았다. 꽃이 주렁주렁 송이송이 매달려있는 게 보인다. 혹시나 싶어 검색을 하니 역시나 아카시아다! 저렇게 높이 매달려 있고도 향기로 알아차리게 하는구나. 마치 멀리서 소식을 듣는 오랜 사랑 같기도 하다.
드디어 5월의 주인공이 고개를 들었다! 장미아래로 철쭉은 앙탈을 부리고 한껏 시무룩해있다. 그런 철쭉들을 살살 달래기라도 하듯 장미는 먼저 한송이 사려 깊게도 피어냈다. 붉고 붉은 장미. 이제 곧 딸기향 가득한 장미들로 담장은 붉게 물들 거다. 걸으며 살짝씩 손부채를 하면서 장미를 보면 걸음을 멈추기도 하겠지. 장미는 장미다워 아름답고 철쭉은 철쭉 다워 예쁘다.
이렇게 쓰고 나니 매사 사랑 어린 눈만 장착한 마음 다정한 사람 같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다. 그저 저런 자연의 친구들이 모가 난 내 마음을 이따금씩 동그랗게 만들어 줄 뿐. 그래서 나는 자연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나마의 사람 냄새도 어쩌면 이런 친구들 덕분인지도 모르니까.
하나하나의 산책 친구들에게 인사하며 이번 연재를 마무리할까 한다. 봄은 물러나지만 여름이 오고 있다. 여름 산책은 무리가 될 것 같고(나는 더위에 취약하다), 여름의 글쓰기는 어떻게 산책처럼 이어나갈까 고민 중에 있다. 쓸만할 때 다시 연재를 시작할 것이다.
별 것 없는 의식의 흐름대로의 연재였지만 지나가듯 좋아요도 눌러주시고 진심 어린 말들로 응원도 해주시고 지켜봐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또 쓰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와야지. 쓰고 이야기하는 이 공간의 모든 분들께 감사하며 이번 연재를 마무리해본다.
건강한 여름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