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노그림 Aug 30. 2022

사랑하기에 좋은나이

은교를 읽고 있다.

비가 오는 저녁. 딱히 할 일이 없어졌다. 저녁 먹고 산책이 그나마 해야 할 일이었는데, 그것도 적당히 비가 올 때나 가능하지 이처럼 질척거리는 비를 맞아가며 할 일은 아니라서 그냥 생략해 버렸다. 고장 난 텔레비전 고칠 생각은 아직 없고, 새로 살 생각도 아직 없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이래도 TV수신료는 꼬박 받아간다는 사실이다. 좋은 프로그램 만드는데 쓴다고 하니 그냥 믿어주기로 했다.


아내가 열심히 식물을 돌보고 있는 동안 나는 그저 책이나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사이는 '은교'를 읽고 있다. 영화로도 나왔지만 딱히 내 취향의 영화가 아니라서 은교를 김고은인가 한고은인가 이름도 헷갈리는 배우와 박해일이 나왔었다는 정도만 기억하고 있다.


글도 가끔씩 끄적이고 있다. 제대로 각 잡고 써본 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끄적이다 보니 이건 글이 아니라 배설 같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도 가끔씩은 일기라는 방패를 들려서 브런치에 올리기도 한다. 글만 올리기엔 뭔가 부족해서 아무 상관도 없는 그림도 한 장 얹기도 한다. 맥락 없는 그림과 맥락 없는 글. 일기가 뭐 다 그렇지.


그림만 그릴 때는 몰랐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을 이 정도라도 그리는 것에 어느 정도 만족해 있었는데, 글을 써보니 이건 또 다른 차원이다. 더 잘 쓰고 싶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게 된다. 왜 더 잘 쓰고 싶은지 이유는 모르겠다. 한 권의 책을 출간하게 되었으니 혹시 한 권 더 출간할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연습을 해두고 싶은 심리일까.


글을 쓰다 보니 오십 넘게 살아온 내 인생이 이렇게 단조로울 수가 없다. 고약한 부모를 만나 힘든 유년시절을 보낸 것도 아니고, 딱히 좌절을 경험해 본 기억도 없다. 언젠가 끄적여 두었던 글을 보니 '나의 지옥은 지루함과 평온함'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참 배부른 놈이다. 그래도 외관상으로는 저체중을 걱정할 정도로 말랐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다는데, 내 기억으로 딱히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다. 혼자서 부글부글하거나 부르륵 떨거나 했던 적은 많은 것 같은데... 이런 내 모습을 근접해서 바라보던 식구들은 조금 괴로웠으려나.


'은교'를 왜 읽기 시작했는가 하면 뜬금없게도 연애가 하고 싶어 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를 애정 하는 감정을 다시 한번 경험해 보고 싶었다. 대상이 아내였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애정보다는 우정에 가까운 사이가 되어 버린지라 여엉 감정이입이 어렵다. 젊었을 때의 애정하는 감정에는 욕망 또는 욕정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제 욕망이 사라진 다음에는 어떤 감정들이 연애세포를 채울지 궁금해졌다. 욕망이 사라지다니, 이건 좀 서글프긴 하지만 자연의 섭리이니 받아들여야지. 아무리 욕망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늦은 연애를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아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용감하게 세상을 살아오질 못해서 겁부터 난다.


박범신이 언제 이 소설을 썼는지는 모르겠다. 이적요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젊은 날에 쓴 글은 아닌 것 같다. 노년의 연애가 주변에 어떻게 보일지, 어린 여자아이에게 추근거리는 늙은 변태처럼 취급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읽고 있는 내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듯했다. 나이 든 할배가 어떻게 열일곱 어린 여자아이한테 빠져 들 수 있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아직 어려워도 표현에 주의를 기울여 읽고 있다. 사실 작가의 의도를 꼭 파악하고 분석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평론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책 읽기 태도가 달라진 것 같기는 하다. 줄거리 위주로 후루룩 읽고 말았었는데 이제 '하아 어떻게 이렇게 표현을..' 감탄하면서 읽고 있다.


은교는 관능적인 소설이다. 몇 구절 필사를 해 보았다.


'여전히 등을 돌리고 선 채, 그녀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햇빛이 역광으로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어깨선은 폭이 좁고  목은 길었다. 질끈 묶어 올린 머릿단 밑으로 목덜미 솜털들이 흰 그늘 속에 드러나 있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소나무 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나이가 들어도 예쁘고 어린 여자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주책맞지만 건강한 신호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관심 정도를 넘어서 침을 흘리기 시작한다면 그건 좀 다른 문제이다. 이적요는 그 선을 넘었고, 제자는 이런 스승을 보며 걱정과 분노와 애정이 겹치는 묘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글을 훔쳤을 때보다 자신이 애정 하는 은교를 탐했을 때 훨씬 더 분노하는 이적요란 인물을 그리면서 작가는 ‘너도 나도 다 똑같애’라는 기분이었을까. 세 사람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을 읽고 있는 변호사의 시선은 일반 독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이적요 사후 공개를 요청한 일기장이 이 소설의 주재료이다)

관능적인 표현들에 감탄하면서도 당혹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꺼져버린 줄 알았던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일까.


그나저나 이렇게 위험한 생각을 감히 글로 써내다니,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아내가 몰라서 다행이다. 속마음이라도 들킨다면 평생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 뻔하다. 나의 금서 목록에 올려두고 책장 깊숙이 숨겨두었다. 위험한 일탈과 불온한 상상을 하고 있는 아재들에게 일독을 추천한다. 간접경험으로만 끝내시기를…….


2022-08-30

덤으로 맥락을 잃은 그림 한장


매거진의 이전글 로마로 가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