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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Aug 14. 2022

로마로 가는 길

걷기 본능을 자극하는 책에 하나 추가.

이놈의 코로나만 풀리면 해 보겠다고 벼르던 일이 있었다. 바로 프란치제나 순례길중 토스카나 구간을 걸어 보는 일이었다.

아내에게 슬쩍 운을 띄었더니, ‘아, 네네. 잘 다녀오세요’라며 나의 계획 따위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눈치이다.(이럴 땐 아내는 항상 존댓말을 쓴다) 아마도 지난번에 조지아 간다고 노래를 부르다가 어느새 식어버리고 아일랜드부터 가봐야겠다고 계획을 변경해서 그런가.


“아니, 이번엔 진짜라니까. 내가 가을에 이탈리아 출장을 가게 되면 주말 끼고 4박 5일 정도 시간 내서 일부 구간만 걸어보려고 책도 이미 다 사 두었다구”


https://brunch.co.kr/@jinho8426/83

<책도 아마존에서 주문해서 멋진 도보 계획도 이미 세워두었다. 진짜다>


“조금 걸어보고 좋으면 준비를 좀 더 단단히 해서 로마까지 걸어보는 거지. 그러고 나서 이탈리아 순례길에 대한 책을 쓰는 거야. 어때?”


“무릎 나가. 나이를 생각해. 이리 와서 자기 옷이나 개켜”

빨래는 개면서 아내는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을 한다.


브런치에서 알게 된 김혜지 작가님이 ‘이태리 부부’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시고 계신다. 우연인지 인연인지 모르지만 아내가 김혜지 작가님의 남편분을 알고 있더라. 뭐 서로 아는 것은 아니고 대충 아내만 알고 있는 눈치이다. 몇 년 전 로마 여행 중 토스카나 일일투어를 다녀왔느데, 그때 가이드를 해 준 인연이다. 이탈리아에서의 가이드 생활이 코로나 시대에 어떤지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다행히도 이들 부부는 좌절 대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남편은 랜선 여행을 통하여 여전히 이탈리아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고, 아내는 책을 쓰고 있다. 이미 <이탈리아에 살고 있습니다>를 발간을 했고 이번에 <로마로 가는 길>을 발간했다. 내가 쓰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책이다.(물론 계획으로만 끝났을 확률이 매우 높다)


왜 이 길을 걷기를 소망했는지에 대한 시작이 나하고는 다르다. 나에게는 호기심이었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팬데믹으로 생활공간이 좁아지면서 생각도 좁아지고, 좁아진 공간과 생각 속에서 부딪혀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부부에게 딱 필요한 것은 치유의 길이었을지 모른다. 치유의 길로는 순례길만 한 것이 또 있을까.


그다지 몸상태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길을 떠난 두 부부에게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육체적 고통을 극복하면서 한발 한발 목적지까지 가고 있는 부부를 따라 같이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면 내가 감정이입이 되어서일까.(무릎 나간다는 걱정을 하는 아내의 말이 떠 올랐다)


육체의 고통이 없었다면 토스카나의 풍경과 순례길에서 따뜻한 마음을 전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울  있었을까.  발로 꾹꾹 눌러쓴 글과 다른 곳에서   없는 순례길 사진을 보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썼으면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가 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먼저 쓰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책에 담겨 있는 정보와 경험들이 앞으로  길을 걷게  미래의 순례자들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태리 부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부유식물처럼 다시 어딘가로 떠나려고 한다. 다른 여행지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목적의 인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용감한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물 위를 떠돌 수 있는 용기. 물 위를 떠다니는 개구리밥을 본 적이 있나. 뿌리도 없이 잎과 아주 조그만 줄기만 가지고 이리저리 용감하게 떠도는 개구리밥. 겨울이 오면 몸의 녹말을 늘리고 공기를 빼내고 밀도를 높여 물속에 가라앉은 채 겨울을 난다고 한다. 다시 부유의 계절이 돌아오면 새로운 삶, 새로운 길을 떠나는 개구리밥처럼 좌절금지.


새로운 길 앞에 서있는 이태리 부부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이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평화를, 앞으로 걷게 될 영혼들에게는 희망을.


202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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