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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May 05. 2023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이야기-1

그간 써온 글과 좀 결이 다른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얼마 전 읽은 책 <나무가 있던 하늘>을 읽다가 느낀 게 있어서요. 대한민국이 초고속으로 성장하는 데 사용되었던 ‘편법’이라는 무기가, 이제 우리의 발목을 잡고 놔주질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쓸지 말지 결정하진 않았지만, 그냥 이거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별로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라서요.




구덕배 과장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태우고 있다. 심의위원 발표가 있는 날이라서 위원선정이 예상되는 김존만 교수의 아파트 창문을 쳐다보고 있다. 새벽 4시 김교수의 집에 불이 켜지면 심의위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이 위원으로 선정되었다는 뜻이다.     


설계시공일괄입찰(턴키입찰)은 전쟁이다. 누가 더 부패했는지를 보여주는 전쟁이다. 예전에는 심의위원 발표를 심의가 있는 날보다 일주일정도 일찍 알려주었다. 심의위원에 선정된 교수에게 우리 회사를 잘 봐 달라고 뇌물과 접대를 하는 것은 업계의 관행이었다. 이런 관행을 없애고자, 심의위원 인재풀에서 심의위원을 선정해서 심의가 있는 날 새벽에 통보를 하기로 했다.     


이제 건설회사는 심의위원 인재풀에 있는 교수, 관료, 기술사들에게 상시 접대를 해야 한다. 담당을 정해두고 골프도 같이 쳐주고 집안의 대소사도 챙기면서 친목을 다져두어야 한다. 혹시 위원으로 선정되었을 경우를 대비해서이다.     


구덕배 과장이 시계를 보고 있다. 새벽 5시,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존만 교수의 아파트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 이제 업무를 끝내고 돌아갈 시간이다. 집으로 갈까, 회사로 갈까 망설이던 구덕배 과장은 해장국에 소주생각이 간절해졌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해야 하나. 새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마다 이번엔 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달라지긴 한다. 다만 그 방향성이 문제이다. 점점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정부가 바뀐다고 업계의 관행이 바뀌지 않는다. 공무원들은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점점 공고하게 다지고 있고, 이 업계에서 살아남아서 진급을 하고 아이들에게 대학교육이라도 시키려면 부당한 일에 눈을 감아야 한다. 이런 일을 위하여 메이저 시공사는 늘 비자금을 만들어 두어야 하므로, 하도급업체와 계약을 하며 현금을 요구한다. 그 하도급업체는 그 밑의 하도급업체에게 똑같은 요구를 한다. 500억 공사비 중 50억이 이런 식으로 아무개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다. 100억이 아니라서 다행일까. 아파트가 무너지고, 지하주차장이 붕괴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번 주말에는 골프접대를 해야 한다. 아침 일찍 ‘그분’을 픽업해서 골프장으로 ‘모시고’ 가야 한다. (IP추적을 걱정하시는 분이라서) 핸드폰은 집에 두고 갈 거라고 아침에 자기 픽업을 오라고 당당하게 요청한다. 이번 주말도 보람찬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다.




2023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런 것을 모른 채 살아왔으면 좋았겠지만, 시궁창에 발을 담근 채 이곳저곳에서 피어오르는 썩은 냄새를 피할 수 없다. 이런 어른들한테 아이들이 배울 것이 무엇이 있을까.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지.”      

“아무 생각 말고 공부하고 대학 가고 취직해서 돈이나 벌어”


온갖 편법을 동원해서 돈과 권력을 얻은 후,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상식과 공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있을까. 아이들이 제발 이런 우리들과 세대와의 단절을 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말았으면 좋겠다.     


1997년의 IMF는 한 세대를 추락시켰다.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추락시켰다. IMF를 경험하면서 가치관의 변화가 왔던 모양이다. ‘부자되세요’라는 광고가 히트를 하고, 서점에 재테크 관련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자기계발을 하지 않는 직장인은 도태될 것이라는 무언의 압력 속에서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 무한경쟁이라는 냉혹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반박하지 못하고 이에 편승하여 너도 나도 부정출발을 하려는 순간부터 이런 추락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부조리들을 단번에 고칠 수 없다는 거 안다. 그래도 고쳐보려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한 둘이라도 늘어가는 세상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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