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도보여행- 1
토스카나 도보여행을 하기로 계획한 날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왔다. 걷기로 한 주말날씨가 궁금해져서 구글의 도움을 받았다.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비소식이 있다. 아니 토스카나의 오월 날씨는 화창하고 청명하기로 소문이 나있었는데 비라니...아무래도 이번 여행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겨우 이틀짜리 도보여행 계획을 세워놓고 너무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긴 한데, 우리나라에서도 배낭을 메고 이틀을 돌아다녀 본 기억이 없어서 조금 걱정이 된다. 오롯이 머릿속에 외워 둔 지도(이탈리아 시골 인터넷 사정을 믿을 수 없다)와 두 발에 의지해서 목적지를 찾아가야 한다.
내비게이션이라는 신문물에 길 찾기를 의지하게 된 후부터 지도를 보는 능력과 길을 찾는 능력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쓰지 않는 근육이 퇴화하듯 방향을 찾는 감각도 퇴화되었다. 지하에 있다가 지상으로 나오면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해 반대방향으로 갈 때도 많다. 그냥 나이 들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다.
지형지물이라도 특이한 게 있으면 좋겠는데, 이탈리아의 시골길을 그 길이나 이 길이나 다른 점을 찾기 어렵다. 게다가 왜 그렇게 구불구불한지 모르겠다. 소유권이 확고하게 정해진 뒤에 길을 만드느라 그랬을 테지. 이탈리아 사람들이 정부에 매우 협조적이어서 자기 땅을 길로 내주었을 리는 만무할 테고.
핸드폰에 내가 걸어야 할 구간에 대한 지도를 캡처해 두고 틈날 때마다 쳐다보면서 익숙해지려고 하고 있다. 토요일에 걷기로 한 구간은 그래도 이름이 있는 길이다. 990년 캔터베리의 대주교, 시게릭 Sigeric 이 성물을 받으러 바티칸까지 걸어갔던 길의 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에서는 비교적 정비가 잘 되어있는 순례길이라고 들었다. 주말이라서 이 길을 걷는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은근하게 기대를 하고 있다.
주말이 되면 북한산을 자주 올랐다. 접근성이 워낙 좋아서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훌쩍 오를 수 있어서 좋았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에도 그랬고 같은 길이어도 다른 느낌이어서 좋았다. 같은 길이지만 어떤 날은 몹시 힘이 들고 어떤 날은 기운이 남아서 좀 더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몸이 기억하는 길은 같지만 몸이 견뎌내야 하는 길은 다르다. 몸과 길이 변함이 없다면 좋겠지만 몸은 길처럼 오랜 세월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그 어느 누구도 세월을 거스를 수 없으니 몸은 나날이 지쳐간다. 주중에 과음과 과로라도 한 날이 있다치면 길은 몸을 거부한다. 아니, 몸이 길을 거부하는 것인가. 그만 돌아가자고 속삭인다.
코로나에 감염이 되었던 그해 봄. 북한산은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입구에서 한참을 바라보다 이윽고 길에 들어섰지만, 그 길에 있던 바위들은 그날, 호의적이지 않았다. 바위에 마치 발이 붙어있는 듯 한발 한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돌아가자.
그 해 여름을 보내고 가을에 다시 그 길을 찾았다. 다행하고 고맙게도 바위들은 내 발을 붙잡지 않았다. 다시 봄. 이번 봄에도 역시 북한산을 찾았다. 이탈리아까지 가서 무리해서 걷다가 탈이 나지 않도록 배낭에 적당한 무게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작년까지 쓰던 배낭은 자크도 고장 나고 실밥도 터지려고 해서 이번에 바꾸었다. 새로운 배낭에 몸이 익숙해지라고 일부러 필요 없는 잡동사니를 넣고 북한산에 올랐다.
족두리봉에서 비봉 가는 길에 돌계단이 있다. 400여 개의 돌계단을 쉬지 않고 천천히 올라가면서 내가 어디까지 더 갈 수 있나를 가늠한다. 어떤 날은 사모바위까지, 또 어떤 날은 문수봉까지, 또 다른 날은 백운대 입구까지 간다. 이렇게 능선길을 타고 내려오는 날, 걸음수는 대략 2만보에서 3만 보 사이가 된다.
산이라서 좀 더 힘이 들었을 거라며 가중치를 준다. 토스카나를 하루에 25km 정도 걷는 것이라면 내 몸이 무리 없이 견뎌줄 거라는 확신이 든다. 도보여행이 끝나고 나면 바로 출장업무를 봐야 한다. 몸에 무리가 되어서 출장을 망친다면 그것처럼 한심한 짓이 없기 때문에 미리 걸어보고 내 몸을 확인해야 한다.
이 길을 진작부터 걷고 싶었다. 매년 출장을 갈 때마다 내년에 이 길을 걸어야지 그랬다가 팬데믹이 왔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길이 끊겨버렸다. 다시 갈 수 있는 때가 오기까지 3년의 시간이 지났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굳이 오늘 하지는 말자’라는 게으름을 신조삼아 살아왔는데, 잘 못 살아왔다. 올해 출장이 생기면 반드시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곳이 두 곳이다. 한 곳은 풀리아(Puglia), 또 다른 곳이 여기 토스카나(Toscana) 도보길이다.
풀리아는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 반도에 뒷굽에 해당하는 곳이다. 올리브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토스카나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살기 좋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르네상스의 중심도시였던 피렌체가 가장 유명하지만, 토스카나의 자그마한 소도시들이야 말로 이탈리아의 정수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동의하기 어렵다. 아니, 아직 많은 곳을 가보지 않아서 남의 말만 듣고 단정하기 어렵다.
풀리아 지역을 가보기 전까지 이탈리아를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이탈리아를 만났다.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들을 돌아보면 또 어떤 느낌이 들까. 렌터카로 휘익 돌아보면 하루도 채 안 걸릴 곳이지만 두 발로 직접 걸어서 돌아보고 싶었다. 부온콘벤토, 산퀴리코도르차, 피엔차, 몬테풀차노. 이 마을들이 내가 가야 할 마을들이다. 길은 이 마을들을 이어주고 있다. 때로는 큰길로, 때로는 작은 오솔길로. 그 길을 타박타박 걷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두 발로 걸어가서 만난 풍경과 차를 타고 가서 만난 풍경, 남들이 본다면 결과야 당연히 같겠지만 오롯이 나의 두발에 의지한 채 걸어간 과정을 생각한다면 내 마음속 풍경이 같을 수 없다.
길을 가면서 늘 상상을 한다. 이 길을 돌아가면 무엇이 있을까. 이 길에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호기심으로 가득한 채 길을 나서지만, 언제나 중력은 일상의 단조로움으로 향한다. 멀리 떠나서 길을 걷게 되면 달라질까. 길이 끝나면 팽팽해졌던 고무줄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도로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올 테지. 그래도 길을 나설 때는 설렘과 긴장감이 있어서 좋다. 하물며 멋진 풍경으로 소문이 자자한 토스카나를 걷는 길이라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나저나 판초우의도 준비해야 하나...
<몬테풀차노에서 바라본 토스카나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