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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Aug 22. 2021

책읽기 파티원을 모집한다길래.

박경리의 파시

한없이 가벼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 읽는 책조차 가벼운 책을 좋아한다. 두께와 하드커버로 인하여 물리적인 무게는 좀 나갈지언정 읽고 있는 동안 마음이 무거운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어릴 적에는 무슨 의무감으로 무거운 주제의 책을 읽곤 했다. 입학을 하니 '필독서'라며 선배들이 권해준 책들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철학 에세이, 막심고리끼의 어머니,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전환시대의 논리 등등.


이런 책들 덕분에 내가 자라온 조그마한 둥지에서 나와 세상을 보는 다른 눈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유의 책을 읽는 것은 어렵다. 졸업을 하고 회사를 다니면서는 책읽기가 더욱 쉽지 않았다. 책읽기 대신 보고서를 읽고 매뉴얼을 읽고 영어공부를 하겠다고 무리하게 영어 원서를 읽다 보니 점점 책읽기의 즐거움에서 멀어져 갔다.


나이를 나타내는 앞자리 숫자가 4이더니 어느덧 5로 바뀐지도 한참이 지나버렸다. 직장생활이 오래되면 좋은 점은 '짬'이 차면서 비슷한 일을 하는데 시간이 많이 단축되는 것이다. 그동안 묻어 두었던 책읽기를 조금씩 시도해보고 있다. 즐거움을 위하여 다시 시작한 책읽기인지라 무거운 인문, 사회과학 책, 자기계발에 관한 책, 미래예측에 관한 책들은 아주 멀리하고 있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즐겁지 않은 책을 읽고 있으면 눈꺼풀의 무거움을 이겨내기 어렵다.


그러던 차에 나에게 글 쓰는 법을 가르쳐 준 '어린 사부'가 8월 한 달 동안 책을 한 권 정해서 같이 읽는 파티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어떤 책이 될는지는 모르고 냉큼 신청을 했다. 박경리의 파시. 아주 어려운 책은 아니고 소설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소설의 무대는 한국전쟁 중의 부산과 통영.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곳이라서 소설의 내용 또한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 가끔 군인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냥 영화로 따지면 행인 1, 2, 3과 같은 존재로 나와서 '아! 지금이 전쟁 중이었지'를 알려주는 장치로 사용되는 정도이다.


나라가 전쟁 중이었으므로 제대로 살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게다. 여기에 그나마 중심을 잡고 사람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기주의와 탐욕으로 짐승에 가까워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과 크게 다른지 않은 여러 인간군상들이 각자의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거미줄처럼 얽혀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처음 백여 페이지를 읽는 동안에는 쉽지 않았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미를 찾아야 오백 페이지가 넘는 소설의 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재미를 찾아보았다.


첫 번째 재미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들을 찾는 재미이다.


밖의 햇빛이 너무 화창하여 병원 안은 어둠에 잠긴 듯 음산하고 싸늘한 냉바람이 도는 듯하다. 북쪽을 향한 현관문의 두꺼운 유리창에서 희미한 빛이 겨우 새어들 뿐.

어둠과 밝음. 햇빛을 안고 온 그들은 소녀를 보지 못하지만 어둠 속에 있었던 소녀는 그들을 똑똑히 볼 수 있다.


학자가 박원장에게 일자리를 부탁하고자 병원 대합실의 어두운 구석에 앉아서 응주와 죽희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 순간에 대한 묘사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비뚤어진 열등감만 남은 학자의 비루함은 어두운 구석에, 부유한 부모를 두고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가질 것 같은 죽희는 빛 속에 둠으로써 두 사람의 대비를 마치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극명하게 빛과 어두움으로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재미는 욕하는 재미이다. 서영래라는 밀수꾼에 난봉꾼이 서울댁과 결탁하여 수옥을 유인 납치하여 강간을 한다. 이 놈을 비롯하여 몇몇 나쁜 놈들에 대한 욕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으니 감정이입이 되어 재미가 난다.


세 번째 재미는 오래된 말을 찾는 재미이다. '히야카시', '다방 레지' 등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말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네 번째 재미는 역시 남녀 간의 로맨스가 어떻게 될까 궁금해하면서 보는 재미이다. 박응주가 조명화를 좋아하면서도 윤죽희를 자꾸 만나게 되고, 이런 우유부단한 응주를 못마땅해하는 명화의 아버지 조만섭, 명화와 응주의 결혼을 반대하는 박원장. 응주와 명화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보는 내내 답답하다.


반면에 수옥과 학수의 연애는 좀 더 극적이고 날 것에 가깝다. 첫눈에 반하고 서영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섬으로 함께 도망을 하고 사랑을 나눈다.

 

 학수는 감정에 흐느끼며, 그러나 몹시 서툴고 조심스럽게 수옥을 안는다. 마치 처음 봄에 눈뜬 소년과 소녀처럼.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이후로 가장 근사하게 '섹스'를 표현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는 재미는 막장으로 치닫는 마지막 장을 기대하며 보는 재미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더 이상은 쓰지 않겠다.


이렇게 재미를 찾다 보니 어느덧 끝을 보고 말았지만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수옥이 혈혈단신 피난민으로 내려와 주인집 남자에게 겁탈을 당하고 또다시 서영래에게 강간을 당하면서도 이 놈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게 되는 상황을 보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강간당한 수옥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을 보는 것도 불편했다.


박원장과 박응주에게 주는 인생의 충고라는 것이 결국엔 입신출세, 부귀영화가 최선이라는 것이 불편했고 이것이 지금껏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불편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작가가 만든 세계가 전쟁 중이기 때문일 거라고 핑계를 대기엔 너무나 현실적이고, 게다가 실제로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어서였을까?


그래도 전쟁터로 끌려간 학수가 어머니에게 수옥을 단단히 부탁하고 떠나는 장면이 있어서 다행이다.


수옥과 학수가 만나는 장면이 그림처럼 생생해서 그려보았다. 상상해서 그리기엔 부족한 실력이라서 조그마한 거룻배는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에서 슬쩍...

표절이 아니구 오마쥬라고 해두자.

https://brunch.co.kr/@jinho842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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