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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Oct 15. 2016

지노 배낭여행기 - 남미편 2

리마 시내관광

2014년 4 월 23일( 수 ) 맑음



리마 시내 구경할 시간은 오늘 하루 밖에 없다. 리마 2박이라하지만 어제 저녁 늦게 도착해서 하룻밤 자고나니 오늘이 바로 이박째다. 내일은 쿠스코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 부지런히 리마 시내구경에 나서야 한다.



  리마시내로


리마 구시가지의 아르마스광장(마요르광장)에서

호텔에서 주는 아침으로 빵과 차 한잔으로 요기를 때우고 구시가지에 있는 ARMAS 광장으로 향했다. 리마의 구시가지에 있는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한 옛 건물들은 잉카문명의 본거지는 아니다. 잉카 문명의 중심은 내일 이동할 쿠스코이고 리마는 1535년 잉카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의해서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그 후 리마가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 지배의 거점으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잉카제국이 번성한 시기에는 현재의 에쿠아도르, 페루, 콜롬비아 남부, 볼리비아 일부, 북칠레, 북서 아르헨티나까지 아우러는 광대한 제국이었다. 그 광대한 땅덩어리가 줄어들어 현재의 페루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러니 리마나 쿠스코와 마추픽추를 본다고 해서 잉카를 전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겨우 잉카 문명의 냄새나 맡고 가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여행이라는게 수박겉만 핡고가는 그런 정도밖에 될 수 없기때문에

완전한 여행이란걸 별로 기대할 수 없다.


전성기의 잉카제국 영토



  중앙통 Plaza Mayor


여기를 구시가지의 중앙통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 Francisco Pizarro가 건설한 유서깊은 역사적인 건물터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Plaza de Armas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Plaza Mayor라고 한다. 그 중심이 되는 건물이 La Catedral(성당), Palacio Arzobispal(Archibishop's Palace: 대주교 궁전), 시청사로 불리는 Municipalidad, 대통령궁이라고 부르는 Palacio de Gobierno, 그리고 청동 분수대 등이다.



  - La Catedral(대성당)


정복자 Pizarro가 맨처음 세운 건물이 사진에서처럼 twin towers(쌍둥이 종탑)가 있는 성당터에 1535년에 흙벽돌과 볏짚 지붕으로 지은 초대 대성당이었다. 현재 대성당과 같은 자리였다. 바로크-르네상스양식으로 새로운 건물이 1564년 착공되었는데 자금문제와 두 차례의 대지진으로 공사가 지연되어 1758년에야 대성당이 완성되었다. 그후 1940년 대지진으로 인하여 한차례 더 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대성당은 5개의 본당과 10개의 기도실이 있다고 한다.


대성당

Pizarro의 유해가 이 대성당안에 유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들어 가보지는 않았다. 대성당안에 몇군데 구경할만 곳이 있다고 관광 안내서에 나와 있는데 걍 pass 해버렸다.




  돼지우리 청소부에서 원정대 사령관으로


피사로 초상화

Francisco Pizarro(1478-1541)는 사생아 출신으로 집안이 변변치 못하여 군대 입대하기전까지는 고향에서 돼지나 키우면서 근근히 살아왔던 모양으로 학교문턱에도 못가서 글을 모르는 문맹이었다. 20세에 악취가 진동하는 돼지축사 청소하는데 진절머리가 난 피사로는 군대에 입대하여 신대륙 탐험 원정대의 일원으로 잉카원정대에 합류하였다. 비록 문맹이었지만 야망과 용맹성으로 불굴의 탐험정신을 살려 최일선 탐험대로 나서서 활약한 피사로는 에스파냐가 파견한 지역 위수사령관인 파나마 총독의 귀환 명령도 불복하고 Trece de le Fama(13명의 명예로운 전사)를 조직하여 열악한 환경에서도 탐험을 계속하여 남미대륙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와 신임을 얻어 20년만에 본국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고국에 돌아온 피사로는 그간 남미대륙에서 얻은 정보로 당시 스페인 국왕인 카를로스 1세에게 남미에 부유한 원주민(잉카제국)들을 정복하여 금은보화를 바치겠다고 호언장담하여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잉카제국 정복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하루아침에 돼지우리 청소부에서 잉카제국 정복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하게 되었다.

약 250여명의 잉카제국 정복 원정대를 조직하면서 고향에서 할 일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는 3명의 동생까지 원정대에 합류시킨다. 그리하여 1530년 연말에 조직한 원정대를 이끌고 본격적인 원정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1533년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아타우알파(Atahualpa)(1502-1533)를 생포하여 처형함으로써 잉카제국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잉카제국은 1197년 Cusco지역의 부족들이 단합하여 초대 황제로 추대된 Manco Capac부터 마지막 13대 황제 아타우알파(Atahualpa)가 처형된 1533년까지 13명 황제가 대를 이은 제국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잉카제국을 피로써 점령한 Pizarro는 Cusco 지역은 제국 황족의 후손인 Manco Inca를 겉으로 내세워 식민지체제로 통치하고 본인은 Lima로 귀환하여 Lima에 남미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계획도시 건설에 전념하다가 초기 원정대의 라이벌인 Diego De Almagra 일파의 반란으로 1541년 6월 일요일에 집으로 급습한 반란군에 의하여 목숨을 잃었다. 머리와 몸이 분리된 Pizarro의 유해는 위에서 본 La Catedral 대성당에 안치되었고, 반란군은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가 보낸 대리인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잉카제국은 1533년 아타우알파 황제의 처형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후 왕정복고를 위하여 잉카인들의 투쟁이 계속되어 여러 곳에 망명정부를 세워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대항하였다. 앞으로 탐방할 쿠스코, 오얀타이탐보와 마추픽추도 이런 망명정부의 유산으로 보면 된다. 1539년 현재의 에콰도르지역인 빌카밤바(Vilcabamba)에 세운 망명정부부터 1572년 마지막 황제까지의 시대를 앞선 잉카제국 시대 (1197-1533)와 구분하여 빌카밤바 잉카제국 (1534-1572) 시대라고 부른다.




   - Palacio de Gobierno(대통령궁)

대통령궁

분수대 앞에 서서 La Catedal(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 초기에는 Pizarro의 Casa(집)이 있었던 터로 현재의 건물은 1938년에 준공한 것으로 지금은 대통령궁으로 되어있다. 내부 장식이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마호가니 나무에 조각한 정교한 꽃무늬 나무틀, 화려한 프랑스산 샹델리아, 우아한 대리석 돌계단, 번쩍거리는 체코산 크리스탈등으로 치장된 내부모습은 페루 역사상 최고의 궁전 수준이라고 한다.



   - The Municipalidad(시청사)

노란 건물의 시청사

분수대 바로 뒤쪽에 위치해 있다. Town Hall이라고 영역되어 있어 시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건물 역시 초기것은 아니고 후에 재건축한 것이다.



   - Palacio de Arzobispal(대주교 궁전)

대주교 궁전

대주교(Archbishop)가 거주하던 궁으로 La Catedral 건물의 왼편에 위치해 있다. 1924년에 완성된 것으로 붉은 나무로 조각된 창문틀이 facade(건물의 정면)를 장식하고 있는데 Moorish 스타일이라고 한다. Moorish란 무어인(Moors) 의 스타일이란 뜻으로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지금의 포르투칼과 스페인 남부지방)에 거주했던 이슬람계 베르베르족을 일컬어 무어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711년 지불알타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그 후 약 800년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유럽의 기독교 국가와 대립하였다. 스페인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도  Moorish 스타일의 건축양식으로 유명하다.



   - 청동 분수대

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좌우 앞뒤로 Lima 구시가지의 주요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안내서에는 1650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의 원형인지 그 후 재건축 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청동 분수대와 대성당




  고고학 박물관


박물관 입구

리마 시내에 있는 위 박물관에 가 보면 리마시가 어떻게 계획되어 건설되었고 리마를 중심으로 아래 위 남미 태평양 연안이 언제 누가 탐험을 하였는지 대형 지도로 상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그래서 리마시 고고학 박물관이라고 할 만하다. 조금 더 들어가면 옛 리마 거주지 사이트를 발굴하여 보여주는 곳이 있다. 아마도 초기 이주자들의 주거지인 것 같다.


리마 도시 계획 blue print(설계도)


유적지와 발굴 현장 사진들


16-17세기 남미에서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마닐라로 가는 해로



방문록을 적게 되어 있어 한자 남겨두고 왔다




  식민지지배에 이용된 종교


San Francisco 성당 본관문

남미의 종교가 90% 이상이 카톨릭인것이 초기 식민지 지배자들이 총과 함께 들고 온 이유다. 그래서 그런지 위 그림과 같은 성당이 상당히 많이 깔려 있다. 종교를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해방신학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자연스레 태동한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신학은 개개인의 영혼구원을 교회의 사명으로 보기 때문에 민초(민중)들이 여러 사회환경으로부터 억압받는 현실사회를 외면해 왔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저개발 국가들의 민중들이 당하는 억압과 착취같은 불평등 사회로부터 인간의 권리와 존엄을 쟁취하는 것을 기독교의 새로운 사명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중남미에서의 해방신학이 주로 군사 독재정권에게 착취와 억압을 받는 민중들 사이에서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의식을 일깨워 주는 역활을 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7-80년대 군사 독재정권에 대항한 의식있는 시민 운동가나 대학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산프란시스코 성당

리마 시내에 있는 산프란씨스코 성당은 바로크와 안달루시아풍의 건축양식으로 1546년부터 100년이상 걸려서 완공된 성당인데 그 전성기때에는 200명도 넘는 성직자들이 거주하는 수도원의 역활도 했다고 한다. 성당 안 일부를 개방해 놓아 한번 들러 보고 나왔다. 지하에는 묘지 카타콤 (Catacomb)도 있다고 하는데 내려 가 보지는 않았다. 보수 유지에 예산이 없는지 성당 본당 문은 낡아 누추하다. 관광객들이 늘상 던져주는 새 모이에 새들만 통통하게 살만 찌어 잔뜩 성당 앞 광장을 자리하고 있다.


성당 옆 길가에는 육중한 경찰 장갑차가 오가는 시민과 관광객 사이로 위용을 보이며 우뚝하게 주차하고 있다. 여긴 관광객들이 모여 드는 거리라 치안 유지가 그 목적인지 아님 다른 목적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남미 관광지 대부분에는 경찰들이 곳곳에 배치 되어있어 치안 유지는 상당히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 다녀봐도 낮에는 위험하다는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국회의사당 건물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찍은 사진인데 건물 위에 늑대 젖을 빨고 있는 어린애들 조각상이다. 그 밑에 1866-2014란 연대표시가 있는데 도저히 가름할 수가 없다. ROMA 이니 늑대젖을 빠는 어린애는 로무루스 형제로 로마건국 신화를 의미하는데 왜 리마시내에 있는지. 열쇠는 1866년에 리마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면 될 것 같은데. 찾아봐도 1866년에 페루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 의문부호로 남는다.



  리마의 China Town


리마 중앙통 시장에 있는 차이나 타운

세계 방방곡곡에 뿌리를 내리는 민족이 중국인이다. 남미라고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여기 리마에도 차이나 타운이 있다. 중국인들이 리마에 들어온 계기는 1849년부터 1874년사이 목화나 사탕수수농장의 핵심 노동력이었던 흑인 노예의 공급이 점점 줄어들자 이를 대체하는 노동력으로 약 10만명의 중국인이 이주해 왔다고 한다. 그런 선조들 덕분에 현재 페루 전역에 약 2천개정도의 중국식당이 있는데 이를 치파스 (CHIFAS)라 하는데 만다린어로 “EAT RICE”라는 뜻이란다. 그냥 중국식당을 치파스라고 부른다. 점심 때도 되어 배도 고파서 시장통을 누비고 다니다가 마주친 차이나타운. 역시 중국 음식점이 군데군데 있어 행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집 떠난지 며칠되지도 않아 아직 중국 음식이 그립지는 않아 그냥 구경만 하고 지나쳤다.


차이나타운 모습

거리의 모습은 중국풍이나 지나는 인파는 중국인들이 아닌 리마 시민들이다. 식당가에는 중국인들 모습이 하나 둘 보이지만 중국풍 거리에서 남미 현지인들을 마주하니 이것 또한 진귀한 풍경이었다.


다정스러운 현지인 커플

리마 차이나타운에서 한 현지인 커플이 의자에 쉬면서 다정스레 음식을 건네고 있다. 음식을 먹여주는 젊은 커플이 보기에도 참 부럽다는 생각에서 찍어본 사진이다.




  리마의 재래시장


재래시장통의 구경꾼들

차이나타운을 지나 재래시장이 있어 들러 보았다. 역시 현지인들의 생활상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 시장통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마 시장통도 현지인의 삶을 엿보기에 적절한 장소이다. 페루의 화폐가 SOL인데 미화 1불이 3 SOL로  1SOL(운솔) 이면 미화 33센트인데 그 재래시장에 가보면 1 SOL짜리 물건을 파는 행상들이 엄청 많다. 비닐 광주리, TV 리모콘, 머리빗는 빗등 소소한 물건들을 1솔을 뜻하는 '운솔’ ‘운솔’ 외치면서 팔고 있다. 다 팔아보았자 5불내지 10불도 되지 않을 물건들을 들고 나와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다. 그래도 그들의 하루 생계가 달린 장사라 목청 높여 크게 외치며 손님을 끌고 있다. 위 사진은 역시 같은 시장통에서 피부 연고를 파는 약장사가 시범보이는 광경이다. 리마 시장통을 구경하다보니 2010년 월남가서 사이공 재래시장에 가서 진짜 월남국수 사먹은 생각이 떠 올랐다. 어느 나라에 가던 재래시장에 가 보는 것이 현지인의 생활을 조금이라도 진실되게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시간되는대로 재래시장을 구경하러고 한다.


현지 행상인들

시장통 앞 길가에서 행상을 하고 있던 아지매가 내 카매라를 손으로 가르키길래 사진찍어 주었다. 왼쪽 아지매는 아이스케키파는데 역시 1 SOL이다. 모델이 되준 댓가로 사진이라도 한장 뽑아 주었으면 좋을텐데 그러지 못해서 애석하였다. 그냥 카매라 3인치 DISPLAY창으로만 보여주었다.


시민공원에서 시간을 죽이는 현지인들

시장통을 나와 다시 옛거리로 올라 가는 도중에 조그마한 시민 공원이 있어 들어 가 보았다. 공연장소에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슨 공연이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일상에 찌든 그런 얼굴들이라 할까. 아마 내가 여행을 끝내고 나의 나와바리인 버어지니아 비치로 돌아 가면 내가 만나게 될 그런 지친 일상의 모습인가 싶다.


이름모를 들풀

그 조그마한 시민공원 옆에는 일상으로 찌든 얼굴과는 전혀 관계없다는듯이 꽃잎없는 코스모스같은 화초가 한낮의 따끗한 햇살에 꾸벅꾸벅 조불고 있었다.



  썰렁한 San Martin 광장


산마르틴 광장

ARMAS 광장에서 조금 걸어서 올라가면 산 마르틴 광장을 만나다. 산 마르틴 장군이 말에 올라타고 있는 동상이 있어 산 마르틴 광장으로 부른다. 산 마르틴 장군(1778-1850)은 칠레와 페루 독립을 이룩한 아르헨티나 장군이다. 그래서 산마르틴이란 거리명은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에 각각 다 있다. 장군의 출신은 아르헨티나로 어려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귀족학교로 유학하여 후에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남아메리카를 스페인으로부터 해방시킨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페루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21년에 조성된 광장이다.


드넓은 산마르틴 광장

광장에 있는 산마르틴 장군을 찾는 관광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현지의 한가한 늙은이들이 소일거리로 광장으로 왔다 갔다하고 여기 살지 않은듯한 현지인 한 두 무리가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열중이다. 리마 시내 관광지는 맞는 것 같은데 관광객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관광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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