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落雁)
기러기가 미녀의 비파소리와 자태에 반하여 날개짓을 잊어 땅으로 추락할 정도의 절세미인. 이름하여 절세미인 왕소군(王昭君). 중국발음은 왕짜오쥔.
때는 한(漢)나라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BC49), 후궁모집 조서로 전국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 천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녀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궁녀가 워낙 많아 추리는 (screening) 방법으로 사진면접을 시도하여 황실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궁녀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장안에 줄이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이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녀만은 집안이 빈천하여(세계적으로 절세미인 집안의 공통점이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녀를 괘씸하게 여겨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황제가 사진을 한장씩 면접했으나 왕소녀의 초상이 추하게 그려져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녀는 입궁한지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못한 3류 궁녀를 면치 못했다.
그즈음 북방에서는 흉노족이 침입하여 변방이 시끄러워 황제는 그들을 달랠 심사로 공주를 흉노족 족장 호한야에게 시집보내 정실을 맺을려고 하였다.
<오랑캐들이 변방을 침입하여 시끄러울때 화친용으로 보내는 공주를 화번공주라 칭한다.> 황제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려고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궁녀(2급내지 3급)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하려고 했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궁녀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이쁜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 보다가 그 중에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나서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더라도 궁녀 중에 마음에 드는 한명이어도 괜찮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니 황제는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오랑캐에게 종실의 공주를 주는 것 보다는 많은 궁녀 중에서 한명을 보내는 것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바보 황제) 그러자 호한야는 왕소녀를 지적하였는데 그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 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데 곱고 윤기있는 머리결, 하얀 얼굴에 짙은 두 눈썹, 버드가지같이 낭창한 몸매등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녀 미모에 황제도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약조를 번복할 수는 없어서 다른 말은 못하고 처소로 돌아가서 궁녀 사진첩을 다시 대조해 보니 실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게 그려져 있어 황제가 진노하여 진상 조사를 비서실에 명령하였다. 조사보고서에 의해 진상이 밝혀지자 뇌물묵은 왕실 사진사의 목이 무사할리 없었다. 바로 참수형으로 목이 댕강 떨어져 나갔다. 그의 죄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제일 큰죄는 황제기만죄, 그리고 뇌물 수수죄와 무면허 성형시술죄.
이제 황제는 왕소녀를 흉노족에게 시집보내기가 싫고 자기곁에 두고 싶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혼수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3일간 말미를 얻어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녀를 미앙궁 (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녀는 흉노족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황제에게 작별을 고하는데, 황제는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우자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날아가던 기러기떼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을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왕소군은 흉노에서 어진 마음으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과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왕소군이 72세로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 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고 하니 혹시 우리들이 다음에 내몽고 배낭 여행길에 있을 때는 이 왕소군의 무덤을 한번 찾아가서 가여운 그녀의 넋을 한번 기려주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무덤을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화번공주
초원의 유목민에게 시집보내진 화번공주들은 그들과 같이 천막에 살면서 이동생활을 하였다. 한 무제가 흉노에 대항할 연합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오손국이란 유목국가 임금에게 시집보낸 공주가 있었는데 오손공주라 부른다. 그녀가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고 한다. "천막을 방으로 삼고, 펠트를 담장으로 여기면서, 고기를 밥으로 발효한 말의 젖을 장으로 먹는다." 펠트란 양같은 짐승의 털로 짠 카펫을 말한다. 그러나, 화번공주의 클라이막스는 문성공주 이야기가 백미다.
화번공주로 티베트로 시집간 문성공주
때는 당태종 640년. 토번국(지금의 티벳) 군주 송짼 감포가 대군 20만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막아 보았지만 역부족으로 강화조약으로 수습하려고 한 것이 바로 문성공주를 토본국 군주 송짼감포에게 시집보내 국혼을 치르는 것이었다. 문성공주는 당태종의 조카딸로 641년 석가모니상, 보물, 경서, 경전360권등 혼수감을 준비해서 토번국으로 시집보내고 나서야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혼인길은 장장 3천킬로미터나 달하는 대여정으로 겨우 18세의 나이로 시집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까. 요즘 같았으면 대국의 공주로 벤즈 600이나 보잉 747 특별기로 날아갈 수도 있었을텐데. 토번국에서 제2 황후로서의 결혼생활도 군주 송짼 감포가 8년뒤 649년 죽음으로써 문성공주는 고독한 과부 생활을 하다가 그후 고향땅을 다시는 밟아 보지도 못하고 680년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티베트에 불교를 소개하고 티베트 불교 발전에 위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국력이 미비하여 오랑캐에게 혈족까지 바쳐야 하는 당 태종의 마음도 괴롭겠지만 하필 자기를 보내야 하는지 그 야속함도 문성공주에게는 있어겠지. 그래서 내려오는 전설로 티벳의 다른 강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청해호로 들어 가지만 공주가 흘린 그 많은 눈물이 더해진 “도류하”만은 거꾸로 서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그외 티벳 수도 라싸에 지은 포탈라궁은 문성공주를 맞기 위해 지은 궁전이라고 하고 대소사(大昭寺)앞의 버드나무도 그녀가 심은 것으로 공주버드나무 또는 당나라 버드나무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叫)는 ‘왕소군의 한(昭君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도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저절로 옷띠가 느슨해지니(自然衣帶緩)
결코 허리 몸매 위 함은 아닐세(非是爲腰身).
오늘날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출처가 바로 동방규(東方叫)가 지은 ‘왕소군의 한(昭君怨)’이라는 한시에서 유래된 것이다.
여기서 새겨보는 교훈
1. 황실사진사의 뇌물 수수죄는 현대판 고급공무원의 비리와 하나도 다를바 없다. 황실을 청와대에 비유해 보면 청와대 참모들의 비리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비리는 영원히 어둠속에 있지 않고 언젠가는 백일천하에 드러나는 법이다. 특히, 요즘 정세를 보면 그리하다.
2.바보황제의 처신술: 왕소군이 절색의 미모를 가지고도 근 5년동안 황제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런 보물을 가리 늦게 발견한 황제도 말바꾸어 가지고 오랑캐 족장 하나쯤 구워 삶을 수 없었다는 그 처신이 바보같다. 그래서 혹시 왕소군이 그런 절색미녀가 아니어서 그리고 공주가 아니고 궁녀이니까 보낼 수도 있었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해본다.
문성공주를 소재로 한 뮤지컬 포스트. 2010년 세계일주 배낭여행갔을 때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소재 국립극장에서 찍은 포스트로 뮤지컬제목이 '티베트의 진주'(jewel of tibet) 로 문성공주를 지칭한다.
티베트 수도 라싸의 포탈라궁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