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으로
2014년 11월 24일(월) 맑음
밤을 새워 운전해서 와이탕기조약이 체결된 역사적인 곳까지 왔다. 밤을 홀딱 세운건 아니고 졸리면
REST AREA에서 잠시 잠시 눈을 붙이고 와서 그리 무리하게 강행군한건 아니었다. 거리를 계산해보면 200마일(320 km) 좀 못되는 거리로 오클랜드에서 약 4시간 정도 운전하면 갈 수 있는 거리다.
와이탕기조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질랜드의 초기 이민 역사를 잠깐 들추어 봐야한다.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탐험한 사람은 1769년 영국인 제임스 쿡 선장이다. 이 시기에 쿡선장은 타히티를 비롯한 남태평양 대부분의 섬들을 탐험하게되고 뉴질랜드도 여러차레 방문하게 된다. 뉴질랜드가 유럽인들에게 알려지자 초기에는 정착 이민자로서 뉴질랜드에 발을 디딘게 아니고 고래잡이(당시 고래에서 채취한 기름이 큰 돈벌이였다), SEALER(바다표범을 잡아 그 가죽을 채집함), 목재 거래상등이 단기적인 상업목적으로 뉴질랜드를 들날락거렸는데 그 후 점점 이민자들이 증가하여 1839년경에는 약 2천명정도의 영국인이 뉴질랜드에 거주하게되었다. 정착민이 늘어감에 따라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규율이 필요하게 되어 와이탕기 조약을 구상하게되어 1840년 2월 6일 영국정부와 43명의 원주민 대표 족장간의 합의한 것이 바로 이 조약이다. 주요 내용은 뉴질랜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갖되 사회 통치에 관한 통치권은 영국 황실이 갖는다는 것이다. 얼뜻보기에도 불평등 조약같이 보이는데 부족들 간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조약에 서명하지 않은 족장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법률이나 조약에 경험이 전무한 원주민들이 작성되고 번역되었기 때문에 마오리족 언어로 번역된 것은 영어의 그것과 해석상에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크게 3개 조항으로 되어있는데,
첫번째는 통치권에 대한 규정이다. 영어 버전에는 마오리족이 통치권을 영국 황실에 넘겨준다고 되어있지만 마우리부족의 버전에는 통치권을 공유한다고 되어 있다.
두번째 조항은 족장제도에 연관되어있다. 마우리족 버전에는 마우리족의 소유권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좀 더 넓게 해석되어있는데 반해, 영어 버전에는 소유권을 땅, 어장, 기타 부동산등으로 제한되어 있다.
세번째 조항은 상호 우호조약이라는 것이다. 마오리족에게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권리를 보호함과 동시에 모든 영국의 것에 대한 권리도 약속한다는 것이다.
영국정부로 볼 때는 이 조약은 상호합의에 의한 평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이 문서를 뉴질랜드 건국 문서로 규정하지만 원주민 마오리족에서 볼 때는 불평등하게 체결된 것이다. 이 조약 이후에 뉴질랜드의 많은 토지가 백인들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마오리족에게 조약에서 약속되었던 많은 권리들이 무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마오리족들의 저항도 점점 거세게되자 뉴질랜드 정부는 1975년 와이탕기 법정을 설립하여 마오리족이 제기하는 많은 소송건에 대하여 올바른 판결을 해주고 많은 경우 금전적인 지급이나 땅의 형태로 보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840년 일부 마오리족들이 이런 불평등한 조약에 사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 환경을 살펴보면 어느정도 이해할 수도 있다. 그 당시 영국외에도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를 구축하는 대외 정책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마오리족으로서는 영국 아니면 프랑스 어느 한 쪽에 잡아 먹힐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보니 기존 뿌리가 어느 정도 박힌 영국하고 손을 잡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마오리족들의 특징이 위 사진처럼 얼굴에 문신을 하는데조약에 서명한 43명 부족장중의 한 명인 WAKA NENE 족장 얼굴 문신이 범상치않다.
기념관 내부 벽에 걸린 목각 조각판에도 얼굴 문신이 보인다.
조약이 체결된 이 곳은 현재 국가 사적보유지로 관리되고있는데 위 사진의 동판은 사적보유지 땅에 대한 소유권과 증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