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자존심 타지마할
2016년 7월 24일 (일) 맑음 그리고 찜통
인도의 대표적인 유적지를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당근
Taj Mahal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그림으로 책으로 여행기 TV프로에서 많이 보아온 터라 첨으로 대면해보니 그동안 밴드로 사귀어 온 밴친처럼 전혀 생소한 대면은 아니었다. 워낙 많이 소개되어 웬만한 비하인드 이바구는 잘 알려져 있다.
타지마할 개관은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로 금, 토요일은 휴관이다. 오늘이 일요일이다보니 이틀 휴관후 첫날로 엄청 인파가 몰린다. 현지인 매표소 창구랑 외국인 창구가 틀리는데 요금도 이원화로 되어있어 외국인은 천루피(미화15불)이지만 현지인은 40루피(미화1불이 65루피)로 엄청나게 싸다. 다행히 외국인 창구는 줄이 없고 현지인 창구는 나라비가 길다.
타지마할의 사진 Point는 정중앙점을 찾는 것이다. 그 점에서 찍어야 사진이 정확한 좌우 대칭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근데 점유하기가 힘들다. 현지 로컬 가이드들이 자기 손님을 데리고 와서 사진 서비스까지 하는지 이리 저리 포즈를 취해서 찍어 대니까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표를 주고 가방검색하고 들어오면 main gate를 만난다. 위 사진처럼 정확한 좌우대칭형으로 폼나게 서있다. 모두들 메인 게이트앞에서 인증샷 1호를 날린다.
나는 그런 인증샷보다 이런 폼나는 사진찍기를 좋아해서 그냥 한번 찍어 보았다. 담에 갈 사람들은 나처럼 들어가기전에 문을 실루엣으로 타지마할을 잡아보면 좋은 구도의 사진을 건질 수 있다. 사람들에 떠밀려 정확한 대칭 포인트를 찾지 못했다.
메인 게이트 앞에 위 사진과 같은 타지마할 전체 약도를 보여준다. 읽어보니 high value 티켓과 general value 티켓의 입장루트가 틀리게 표시되어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고 묘지 중앙돔 안에 있는 무덤의 주인인 황제 Shah Jahan과 그의 부인 Mumtaz Mahal의 대리석 묘를 보기위해 긴 행렬을 따라 천천히 이동해야 한다. 여기서 황후이름
Mahal이 나오니까 Taj Mahal의 이름에 조금은 이해가 가는데 Taj는 무슨 뜻일까? 힌디사전을 찾아보니 Taj는 왕관이란 뜻으로 Taj Mahal은 Mahal의 왕관이란 뜻으로 우리는 타지마할로 읽는데 힌디발음은 "따지매핼"이라고 한다.
메인 게이트를 지나면 인파들이 엄청 복짝거린다. 우리들이 익히 보았던 타지마할의 photo point가 여기다. 다시 이야기하면 타지마할은 무굴형 정원식 묘지로 직사각형 정원이 중앙에 분수대로 두고 있고 북쪽 중앙에 묘건물이 서있는 형태다. 자리 싸움에서 밀리다가 겨우 정중앙 자리를 차지했다. 사진보다 비디오를 한 편 찍었다. 앞쪽 좌우 두 탑이 보수중으로 철탑으로 덮여있다. 이 정중앙 자리가 분수대 맨 끝 자리에 있어 여기서부터 분수대를 중앙에 두고 좌우로 길이 갈라지게 되어 있어 걸어 들어가는데 사진은 찍을 수 있는데 비디오 촬영은 허용이 안된다.
위 사진은 16mm 와이드 앵글로 방금 전에 비디오 촬영했던 곳에서 찍었다. 렌즈가 너무 광각이라 묘지 건물이 상대적으로 작게 나온 감도 없지 않지만 brunch 배낭여행 작가가 이 정도는 연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심한 자뻑인가?)
이 사진은 묘지 중앙까지 올라가서 뒤를 돌아보고 메인 게이트를 찍은 것으로 정중앙 포지션에서 조금 벗어났다.
전해 내려오는 역사적인 이야기대로 산후조리 잘못하여 죽은 부인을 위하여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묘지를 지어 주겠다던 황제의 약조가 이런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것이다. 황제는 인도 왕조중 가장 전성기를 이루었던 무굴(Mugal)제국의 5대 황제인 샤자한으로 부인이 죽은 후 6개월 뒤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약 22년 걸려 1653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무굴제국의 수도가 여기 Agra로 연 2만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하고 페르시아, 이탈리아, 프랑스등에서 기술자와 장인들을 초빙했고, 미얀마는 물론 멀리 중국과 오스만 제국, 이집트에서까지 온갖 건축자재가 수송되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황제의 개인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무모한 건축물을 지겠다는 부질없는 욕심일 수도 있었던 타지마할이 예술적인 건축미를 인정받아 페르시아, 터키, 인도 및 이슬람의 건축 양식이 잘 조합된 무굴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로 인정받아 198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인도에 위치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숫자로 보면 공사비는 약 4천백만 루피가 들었고, 약 500킬로그램의 황금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화폐가치를 2015년 시세로 환산해보면 8억 2700만 달러 (우리돈으로 약 9400억) 정도가 된다고 한다.
조선이 동방의 등불이 될 것이라고 예찬했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이 시인은 무지하게 비싸다. 왜냐하면 인도인들이 인도하고도 바꿀 수 없다고 큰소리 뻥뻥 쳤기 때문이다)가 타지마할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타 지 마 할
어느 날 흘러내린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맑고 투명하게 흐르리라. 그것이 타지마할이라네
오, 황제여! 그대는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으로
시간에 마술을 걸려 하였다네
그대는 경이로운 꽃다발을 짜서
우아하지 않은 주검을 죽음을 모르는
우아함으로 덮어버렸다네.
무덤은 자기 속으로 파묻고 뿌리내리어
먼지로부터 일어나 기억의 외투로
죽음을 부드럽게 덮어주려 한다네.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묘지의 main room으로 들어서면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대리석관이 나란히 안치되어있다. 황제 Sha Jahan과 그의 사랑
Mahal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이고 진짜는 그 아래 지하층에 있어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지는 몰라도 긴 줄을 이어 찾아온 관광객들은 짝퉁 대리석관에 눈길을 한번 주고 돌아선다. 그래도 많은 여성 관람객들은 Mahal을 엄치 부러워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나 하나만의 사랑으로 그런 아름다운 왕관(Taj)을 무덤에 올려줄 수 있는 배우자를 가진 여자로서 바라보니 어찌 그런 맘이 들지 않겠는가.
가짜 대리석관을 구경하고 mail hall에서 나오면 오른쪽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위 사진처럼 오른쪽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도 정면에서 볼 때하고 하나도 틀리지않은 완전 대칭형이다. 이슬람건축의 특징이 완전 좌우대칭 포지션으로 파격의 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비대칭형을 찾아 보려고 하는 것이 더 재미날 수도 있다.
그늘에 앉아 땀을 훔치고 쉬었다가 뒤로 돌아가보니 모스크사원(Masjid)이 나오고, 사원 뒷쪽으로 야무나(Yamuna)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여기까지 오면 타지마할을 한바퀴 다 돌아 본 셈이다. Yamuna강은 모든 힌두교인의 어머니같은 갠지즈강의 지류로 북쪽 히말라야산맥으로 시작하여 약 1400km를 흐른다고 한다.
조각용어로 Relief(릴리프) 기법이 있는데 조선말로 옮기면 양각, 돋음새김 또는 부조라고 한다. 위 벽면 사진도 언뜻 보기에는 꽃모양을 따로 조각해서 벽면에 접착한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통 대리석에다 꽃모양을 돋음새김 형태로 만든 것이다.
고려자기중에서 우리의 보배로 상감청자가 있다. 상감기법이란 표면에 무늬나 문양을 파내고 파낸 그 홈에 다른 색색의 재질을 메워 모양을 내는 것이다. 이를 영어로 Inlaid 기법이라고 한다. 타지마할의 곳곳에 이런 상감기법으로 주로 백합, 수선화, 튤립, 국화같은 꽃모양을 색색으로 장식하였다.
타지마할 입장부터 퇴장까지 걷고 찍고 쉬기를 여러번 반복하여 겨우 서둘러 마쳤다. 서둘렀다는 말은 박물관을 못보고 지나쳤다는 말이다. 타지마할을 걷는 것이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 불볕의 사막 한가운데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의 짐이라 해보았자 꼴랑 카메라 두 대이지만 불가마 더위 속에서 한발 한발 내딛는 것 조차 힘겨운데 양쪽 어깨에 짐까지 지고 가야하는 것이 마치 내가 현세에서 당연히 받아야 할 숙연의 벌을 치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인도 불볕더위 속을 다녀야하는 여행의 고난을 그간 내가 쌓아온 업(Karma)을 깨끗이 씻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군말없이 수행정진하는 힌두교인처럼 육신에 가해지는 고통을 기꺼이 접수하기로 하였다.
Agra에서 볼 만한 유적지가 타지마할외에 Agra성으로 타지마할을 건설한 샤자한황제의 할배 악바르대제가 1565 - 1573년 사이에 수도를 델리에서 여기 Agra로 천도하면서 구축한 성으로 타지마할과
2.5km 떨어져 있다. 붉은 사암으로 된 철옹성으로 내부에는 그 후에 샤자한황제가 만든 궁전 건물도 화려하다.
성 입구를 통과해도 한참동안 언덕길을 할딱거리며 올라가야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위 사진도 성안에 들어왔지만 진짜 성안으로는 아직 들어가지 못했다.
굳건한 성문을 지나 올라 와서보니 위 사진처럼 내궁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고 양쪽으로 3층 높이의 Chhatri가 양쪽으로 떠받치고 또 다른 성벽이 위엄있게 가로막고 있다. 성문안에 문과 벽이 있고 그 문안에 또 다른 문과 성벽이 있는 셈이다. 아그라성이 겹겹이 싸여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그라성에 가면 다른 곳보다도 막내아들에 의해 유페된 황제 Sha Jahan이 갇혀진 채로 저 멀리 보이는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눈물과 회한으로 황비를 그리워했다는 옥탑방을 찾아보고 싶었다. 일단 타지마할이 저 멀리에 보이는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찾았다. 황제가 앉으나 서나 죽은 황후를 그리워하며 근 8년이란 세월을 보낸 옥탑방이 위 사진이다.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라고도 하고 Shah Burj라고도 하는데 burj가 힌두어로 탑(tower)이란 뜻이니 옥탑방으로 불러도 무방한 것 같다. 원래는 아그라성을 축조한 황제 Akbar(Shah Jahan의 할아버지)가 만든 8각형 Burj(탑)으로 동쪽을 향하게 되어있어 매일 아침 일출때 여기서 태양을 숭배하는 의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1627년에 왕좌를 물려받은 샤자한은 Shah Burj 바로 옆에 위 사진과 같이 The Meena Masjid라고 하는 작지만 아담한 개인 기도실을 만들었다. Meena는 힌두어로 보석이란 뜻으로 보석 사원(mosque)이란 말이다.
죽은 부인을 위해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 자한 황제는 타지마할 완공후 10년뒤 왕위 서열에서 많이 밀리는 막내 아들의 쿠데타로 왕위를 잃고 여기 아그라성 옥탑방에 감금되었다. 황제는 매일 옥탑방에서 저 멀리 바라보이는 타지마할을 바라보고 왕비를 생각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여기서 죽었고 그의 시신은 배로 Yamuna강을 통해 타지마할로 운반되어 부인 옆에 나란히 안치되었다고하니 죽어서는 그렇게 보고 싶은 Mahal 옆에 나란히 누울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옥탑의 창살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위대한 건축물인 타지마할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전의 Mahal을 그리워하다가 1666년 겨울까지 갇혀있다 죽은 황제 샤자한이 창살 사이로 타지마할을 바라본 것처럼 그렇게 연출해 보려고 Burj 발코니의 창살 사이로 타지마할을 잡아 보았다.
두번째 고행은 아그라성을 돌면서 땀으로 바쳤다. 아그라성만 보고나서 그냥 호텔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오토릭샤과 사전에 3군데 예약이 되어 있어 억지로 갔다. 달빛정원(Moon Garden)이란 이름으로 타지마할 뒷쪽으로 흐르는 Yamuna 강 건너에 있어 가보았더니 황성옛터가 되어버려 다른 것은 볼 것이 하나도 없고 강건너로 타지마할을 바라볼 수 있어 photo point를 찾아 사진만 찍고 왔다.
세월의 무상함을 물씬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허물어진 벽돌과 이끼로 덮인 바위돌사이로 빼꼼이 고개를 내민 잡초들을 보니 황성옛터란 옛 가요가 머리에 떠올랐다. 하얀 타지마할이 강건너로 보이는 이 곳에 다른 검은 대리석의 타지마할이 들어섰다면 Yamuna강을 사이에 두고 마치 달밝은 밤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듯 황제와 Mahal의 사랑도 천년의 사랑이 되지않았을까.... 황성옛터에서 그런 부질없는 감상에 젖어 보았다.
원래는 흰 대리석의 타지마할을 저쪽에 완성해 놓고 보니 강건너 여기 Moon Garden쪽에 검은 대리석의 또 다른 타지마할을 하나 더 짓고 싶어 했다는 샤자한황제의 부질없는 욕심을 결국은 못된 막내 아들이 거두어 가지고 간 셈이었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