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가라, 하와이
2017년 5월 20일(토) 맑음
<니가 가라, 하와이>는 2001년에 개봉한 영화 곽경택 감독의 <친구>에서 나온 명대사이다. 준석(유오성)과 동수(장동건)는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 후, 서로 다른 폭력조직에 들어간다. 준석이 조직으로부터 친구인 동수를 죽여라는 명령을 받고 동수를 위해 하와이로 몇 년간 피신하라고 권고하자 이를 썩소로 대신하며 동수가 한 말이 "니가 가라, 하와이"였다. 그래서 이 말은 남의 제의나 권고를 폼 있게 거절하거나 자기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게 된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노폭(Norfolk) ----> 와싱톤디시(IAD)
와싱턴디시(IAD) ----> 샌프란시스코(SFO)
샌프란시스코(SFO) ----> 호놀룰루(HNL) 해서
오늘 아침 7시 19분에 동수 대신 내가 하와이로 왔다.
일단 하와이까지 one way ticket으로 편도만 구매했다. 하와이에서 FIJI로 가는 것은 확실한데 언제 가는지는 미정이다. 일단 하와이에서 몇 군데 돌아보고 난 후 피지로 날아갈 생각이다.
위 티켓을 자세히 보면 샌프란시스코 도착이 20일 새벽 1시 29분으로 몇 시간 있다가 아침 7시에 하와이행 뱅기를 타야 한다. 호텔에 자러 갈 시간도 없어 공항에서 Homeless처럼 노숙하기로 하였다. 환한 공항 불빛 아래 다행히 한자리 차지한 가죽소파 위에 대자로 누워 눈을 감으니 꼭 불 켜진 서울의 어느 찜질방에 누운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루 호텔비 아끼고 새벽에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어 행복한 마음으로 기꺼이 공항 노숙자가 되었다.
하와이에 큰 섬이 8개 그리고 작은 무인도가 100여 개가 있다고 한다. 이 중에 제일 인구가 집중해 있고 주도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O'ahu), 그다음은 할레아칼라(Haleakala) 국립공원이 있는 마우이(Maui)로 오아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섬이다. 세 번째는 현재도 계속 불가리 용암을 분출하고 있는 Hawaii Volcanoes국립공원이 있는 Hawai'i 섬으로 이 국립공원을 보러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섬을 하와이섬이라고 부르니까 하와이 전체 섬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이 섬을 별칭으로 Big Island로 부르고 있다. 나머지 5개 섬은 관광객들도 별로 찾지도 않은 섬들로 오아후 위쪽에 2개 마우이 왼편에 3개가 있다.
하와이가 우리에게는 대개 환상적인 신혼여행지나 이국적인 경치를 선사하는 해외 관광지로 각광을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의 근대사를 한번 돌아보면 의미 있는 역사적인 장소로 다가온다. 대한제국이 최초로 해외인력송출 즉 해외 이민을 보낸 곳이 바로 하와이이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곳이 바로 여기 하와이 O'ahu섬에 있는 진주만(Pearl Harbor)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1902년 12월 22일에 감리교인, 노동자, 농부 등 전국에서 지원한 총 121명이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천 제물포항에서 미국 상선 겔릭호에 올랐다. 대한제국 최초의 해외인력 송출이었다. 목적지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들 중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1차 신체검사에서 19명이 탈락하고, 남은 102명만이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할 수 있었다. 이 중에서 2차 신체검사를 통과한 86명이 하와이 오아후섬 사탕수수 농장에서 취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최초의 하와이 한인 이민사의 시작이었다. 그 후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까지 약 7200여 명의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이 하와이 땅을 밟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와이에서 시작된 해외 이민이 정착되어 그 후 미국 본토로 옮겨가게 되어 LA, 샌프란시스코 및 뉴욕 등으로 한인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통치를 벗어나기까지 하와이에 정착한 한인 이민자들이 주축이 되어 모금한 독립자금이 상해 임시정부로 흘러들어 가 독립운동에 요긴하게 쓰였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선생의 호가 도산(島山)이다. 즉, 섬과 산으로 바로 하와이를 의미한다. 1902년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하와이에 도착해서 이 섬을 보고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정했다고 한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8시 일본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하고 있었던 미 해군을 기습 공격하고 난 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403명의 군인 사상자와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내게 되었다. '도라도라도라'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일본 야마모도 해군 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렸다." 당시 루스벨트 미 대통령이 "진주만을 상기하자(Remember Pearl Haror)"는 유명한 연설로 미국민을 똘똘 뭉치게 한 결과로 일본은 기습 공격한 진주만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태평양전쟁에서는 결국 패배하였다.
진주만 기습을 소재로 한 영화 포스트
미국 본토로부터 약 4천 Km 떨어져 있는 하와이섬은 대부분 화산 폭발로 생긴 것으로 원래부터 다른 문화권 하고는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이러한 하와이섬에 약 2000에서 1500 B.C 경 통가(Tonga)나 Samoa 등지에서 형성된 폴리네시아 문화가 흘러 들어오게 되어 부족이 형성되었다. A.D 300년경 현재의 프렌치 폴리네시아에 속하는 타히티나 말 케스(Marquesas)에서 새로운 세력이 하와이섬으로 건너왔다. 이렇게 하여 주로 폴리네시아 문화로 이어진 하와이에 약 12세기에 현재의 타히티섬으로부터 새로운 세력이 건너오게 되어 어느 정도 세력을 규합하여 부족을 이끌어 갔다. 이런 하와이섬에 초기 왕국이 형성된 때가 1795년경으로 Big Island에서 출생한 카메하메하(Kamehameha)라는 걸출한 추장이 O'ahu를 비롯하여 Maui, Moloka'i, 그리고 Lana'i섬을 정복하여 하와이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가 1810년에 그의 손자인 카메하메하 3세가 하와이섬 전체를 통일하고 통일국가를 선포하였다.
1874년부터 하와이 땅을 외부인에게 임대해 주기 시작하자 많은 미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와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왕국의 경제가 미국에 종속되어 가는 것을 보고 왕국의 마지막 여왕인 릴리우오칼라니(Lili'uokalani)가 사탕수수 농장에 대하여 국유화 조치를 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미국은 미 해군을 개입시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1897년 합병조약을 체결하여 하와이 공화국으로 미국령으로 편입하였다가 1959년에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어 정식으로 미국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와이 왕국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진주만을 구경하고 나서는 와이키키로 향하였다. 고속도로 1번을 타고 East로 달리면 그 유명하다는 WAIKIKI 해변이 나온다. 워낙 붐비는 곳으로 쭉쭉 하늘로 솟아난 고층건물과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상점은 줄을 이어 거리에 선을 보인다. 한여름철에 많을 때는 하루 6만 5천 명 정도의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이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이 1920년대에 Royal Hawaiian Hotel이 문을 열면서 당시 유명 연예인들과 부호들을 유치하자 와이키키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현대식 고급 호텔이 하도 많아 1920년대의 로열 하와이 호텔이 초라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 호텔밖에 없어서 최고급 호텔로 유명 연예인이 너도 나도 찾다 보니 지금의 와이키키 해변이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되었다.
사실 위 사진이 첨으로 와이키키 해변을 만난 것으로 차를 짐 싣고 내리는 구간에 야매로 파킹해 놓고 카메라만 들고 해변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는 하늘에 구름도 없이 말 그대로 하늘이 파랬고 그 아래 키 큰 야자수가 미풍에 살랑거리고 바다색도 그 흔한 남색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첨보니 파라다이스 같았다.
곧 구름이 몰려와 푸른 하늘을 이불처럼 덮어 버렸다. 그랬더니 환하던 푸른빛이 사라지고 우중충한 하늘로 변해 버렸다. 덩달아 푸른 천국도 멀리 달아난 것 같았다. 마치 유능한 마술사가 간단한 기합 소리와 함께 주먹을 펴자 그 속에서 하얀 구름이 동화 속 마술 호로병에서 연기가 피어나듯이 흘러나와 하늘을 덮어 버리는 것 같았다. 나의 천국도 같이 사라졌다. 그때서야 깨우쳐지는 무엇인가 머릿속을 뚫고 지나갔다. 아름다운 와이키키 해변도 푸른 하늘이 있어야 파라다이스로 완성되듯이 나의 천국도 나 혼자 이룰 수는 없고 그녀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멀쩡한 하늘에서 스콜이 내리는 걸까 빗물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무엇인가 콧잔등을 살포시 적시고 있었다.
1926년에 세워진 Aloha Tower. 당시 막 Waikiki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때로 증기선을 타고 하와이로 온 관광객을 위하여 부둣가에 세웠다. 그 당시만 해도 10층 높이의 건물로 호놀룰루에서 제일 높은 전망대로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Surfing으로 유명한 해변이 많은데 하와이 해안도 그중의 하나이다. 와이키키보다 오아후섬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North Shore와 Waimea Bay가 유명하여 세계대회가 열리는 곳이다. 와이키키 해변도 서핑으로 많은 사람이 찾은 곳으로 해변가에 나가보면 서핑보드를 옆에 끼고 걸어 다니는 남녀를 볼 수 있다. 와이키키 해변을 따라 내려가는 칼라쿠아(Kalakaua Ave) 대로는 일방통행으로 되어 있어 매우 번잡스러워 차 파킹 할 자리를 찾는 게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많은 서퍼들이 차를 여기에 파킹 하지 않고 와이키키 해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해안에서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와이키키 해변을 지나 Diamond Head로 가기 위해 길을 따라 내려가면 평지에서 언덕으로 가파르게 올라간다. 그 언덕 중간쯤이 전망이 좋아 차를 세웠더니 차가 일렬로 갓길에 주차되어 있었다. 내가 파킹한 곳 바로 옆에 주차한 차는 뒷해치를 열어 놓은 채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서핑보드를 세워놓고 수영복 차림에 비치타월을 두른 젊은 여자가 젖은 머리를 뒤로 묶은 채 운전석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이렇게 주말을 즐기는 젊음의 활발함에 그만 부러움과 질투심이 서핑 타는 큰 파도처럼 가슴으로 좌악 밀려왔다.
다야몬드 헤드는 하와이섬의 landmark로 자리 잡고 있다. 원주민어로 Le'ahi라고 하는데 뜻은 분화구(Crater)이다. 고상하고 비싼 다야몬드란 이름은 1700년경 이 곳을 탐험한 유럽인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광물질 Calcite crystal을 보고 금강석인줄 알고 그렇게 작명을 해서 지금까지 이쁘고 비싼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위의 항공사진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최고봉이 242m 정도이지만 올라 가보니 와이키키 해변과 호놀룰루 고층건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시원한 해변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공원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올라 가는데 편도 45분 걸린다고 하길래 쓰리빠 질질 끌고 올라갔더니 1시간 걸렸다. 힘든 코스는 아니지만 막판 오르막이 가파르고 경사가 있는 계단으로 되어 있어 숨은 조금 찼다.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 편도 45분 걸린다는 관리인 말에 혹하여 입장료 5불(차 없이 들어가면 인당 1불) 내고 들어섰다. 쨍쨍 내리쬐는 불볕더위는 아니지만 5월의 하와이 태양도 따끈한 정열의 불꽃을 조금씩 뿜어내고 있었다.
파킹장에 차를 대고 카메라 두 대만 어깨에 걸고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파킹장을 벗어나면 곧바로 고즈넉한 오솔길을 만나 콧노래 절로 나게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무슨 걱정이 있을까? 이럴 때 글 한 수가 금방 머리에 떠 오른다.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공자가 말했다. “거친 밥에 물 마시고 팔을 구부려 베개 삼아도 거기에도 즐거움은 있다. 부정한 부와 지위는 나에게 뜬구름과 같다.” 나같이 내세울게 별로 없는 사람들이 대놓고 악담하듯이 내뺃는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다. 단 평소에는 이런 말 못 하는데 지금같이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혼자 떨어져서 카메라 매고 놀러 가는 Mode에서는 흥얼거릴 수 있는 폼나는 글귀다.
중간쯤 올라가니 산등성에 가려있던 푸른 바다가 말간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특유의 바다 물빛이 시원함으로 다가왔다.
중간쯤 지나 위를 쳐다보니 그렇게 만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위를 보면 항상 그렇게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항상 아래를 보고 살아가라고 했던가. 반이상 올라왔는데 힘들어도 꾸역꾸역 올라갔다.
다야몬드 헤드는 지리적으로 볼 때 전략상 중요한 위치에 있어 1차 세계대전 훨씬 전인 1908년부터 요새화 되었다. Fort Ruger가 여기에 건설되었고 해안포가 해안경비를 위하여 설치되어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통제되다가 1950년에야 포대가 해체되면서 군사지역으로서의 통제를 풀었다. 올라가 보면 그 예전에 콘크리트로 지은 토치카나 Bunk를 지금도 볼 수 있다.
저 계단이 마지막 시련이다. 일단 계단의 경사가 가파르고 엄청 길다. 올라가야 하니까 헉헉대며 한발 한발 계단을 딛고 올라섰다.
정상에 동굴이 있어 어둠 속으로 이어진다. 아마 공습 시 피할 수 있는 방공호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이 굴을 빠져나가면 바로 정상으로 이어진다.
별로 높지도 않은 봉우리 꼭대기에 올랐어도 그게 정상이라고 아래 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일 멋진 뷰가 와이키키 해변과 고층건물이 즐비한 호놀룰루 시내였다. 군데군데 남색 바다가 벌판처럼 펼쳐지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고층건물이 해안선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다야몬드 헤드 정상에서 동서남북으로 내려다보는 경치는 일품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마치 높은 전망대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도시의 전망대처럼 돈 내고 고속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발품을 팔아야 정상에 설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땀 흘린 만큼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착하고 정직한 곳이 다야몬드 헤드에 오르는 것이다. 바람이 거센 정상에서 눈으로 실컷 바다 구경을 하고 나서 천천히 산 비탈길을 내려왔다.-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