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전쟁기념관과 섬 일주
1939년 9월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침공한 것이 세계 2차 대전의 발발이었다. 그 후 1941년 12월 7일에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미국은 유럽전선과 태평양 전선 양쪽으로 전쟁 준비를 하여야만 했었다.
기념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나무에서 하얀 꽃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벚꽃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다른 꽃이었다. 하와이를 대표하는 꽃으로 플루메리아 (Plumeria)라고 한다. 꽃말은 "당신을 만난 것이 행운입니다". 하와이 훌라 댄서들이 춤출 때 귀나 머리에 이 꽃으로 치장하는데 미혼은 붉은색, 기혼은 하얀 꽃을 꽂는다고 한다. 그런데 남태평양 섬으로 내려가 보니 댄서만 아니라 일반 여자들도 이 꽃으로 머리에 치장하고 있었다.
처음 들어가면 햄버거 가게처럼 메뉴판이 천장에 매달려있다. 한번 보고 나서 난 그 가격표를 보고 기절할 뻔하였다. 섬이라서 모든 게 비싸다고 하던데 기념관 입장료까지 이렇게 할 줄은 몰랐다. 볼거리는 4개로 전함 미주리호 보는데 어른 27불(소아 13불), 항공기 박물관 어른 25불(소아 12불), 잠수함 승선 및 박물관 어른 12불(소아 5불), 항모 애리조나 해설 투어 7불 50전으로 패키지로 사면 어른 65불이고 애들은 35불이다. 표를 사지 않아도 기념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공짜 구경만 하고 돌아간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침몰된 Arizona 전함의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폭격으로 수장된 배를 인양하지 않고 그대로 물밑에 놓아두고 그 위에다 위 사진 같은 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대신 닻을 인양하여 아래 사진처럼 기념관에 전시하여 놓았다.
따로 기념탑을 만들어 당시 Arizona에서 전사했던 정병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이 탑은 Arizona에 승선했다가 전사한 미 해병대 장병을 추모하고 있다) 공습을 받았던 날짜와 정확한 시간이 새겨져 있다.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5분. 태평양전쟁의 서막이 올라가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다.
잠수함 Bowfin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약간의 선체 부상을 입었지만 수리도크(나중에 나오지만 일본 공군이 수리도크를 폭격하지 않아 수리하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에서 치료 후 완쾌하여 몇 달뒤 태평양전쟁에 투입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미국 미주리주의 약자가 MO이기에 별명이 Mighty Mo 또는 Big Mo로 불렸다. 1945년 9월 2일 항복문서 조인식이 전함 갑판에서 이루어졌다. 이 조인식에는 일본 대표로 외무대신이 당시 도쿄만 요코하마에 기항 중인 전함 미주리 갑판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그 후 미주리호는 1950년 한국전쟁시에도 전투함으로 참전하였고 1990년 걸프전쟁에도 참전하여 그 위세를 과시하였다. 걸프전을 마지막으로 1992년 마침내 현역에서 퇴역하여 진주만 전쟁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에 활약했던 48대의 비행기를 전시해 놓은 항공기 박물관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복엽기(biplane -날개가 두 겹으로 되어있다)와 진주만 공습과 그 후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로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여 자살한 일제 미쓰비시 제로 전투기도 볼 수 있다.
1897년 미국 캔자스주에서 출생한 여성 비행기 조종사이다. 미국의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1902-1974)가 미국의 비행기 조종사로 1927년에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이륙하여 프랑스 파리까지 쉬지 않고 최초로 단독 대서양 횡단하는 데 성공하자 이에 고무받아 여성 조종사로서 단독으로 1932년 5월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을 이륙하여 14시간 56분 비행하여 대서양을 건너 북아일랜드에 착륙하여 대서양 단독 횡단비행에 성공하였다. 그 후 아멜리아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캘리포니아까지, LA에서 멕시코시티까지, 멕시코시티에서 뉴욕까지 무착륙 비행을 성공하여 당시 여류 명사가 되어 대중들의 스타가 되었다. 그녀의 나이 40세가 되던 1937년 세계일주 비행을 계획하여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공항을 출발하여 마이애미에 도착하면서 세계일주 비행을 언론에 발표하였다. 1937년 6월 1일 마이애미를 출발하여 남미 - 아프리카 - 인도- 동남아시아의 중간 기착지를 거쳐 남태평양에 있는 파푸아 뉴기니에 6월 29일 도착하였다. 이틀을 쉬고 7월 2일 파푸아 뉴기니를 출발하여 남태평양에 있는 중간 기착지 미국령 하울랜드 섬에 착륙 예정이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교신이 단절되며 남태평양 바다로 사라졌다. 세계일주 성공을 약 7천 마일(11천 km) 남겨둔 채로 기체와 함께 실종되어 대대적인 수색작업에도 불구하고 아무 흔적을 찾을 수 없어 결국 실종사로 인정되어 1937년 1월 5일 사망으로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이러한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선구적인 생애와 비행 기록을 항공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남태평양 여행을 무사히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샌디에이고에서 Red Eye(밤 비행기를 뜻하는 말로 밤새도록 잠을 못 자서 아침에 눈이 뻘개진 다는데서)를 타고 아침에 버지니아 노폭 공항에 내렸는데 진주만 항공 박물관에서 보았던 아멜리아 할매가 노폭 공항 이층에 전시되어 있어 나를 반겨 주었다. 이걸 보고 이게 무슨 계시가 아닐까 하고 연관 지어 보았다. 다른 계시가 아니고 내보고 경뱅기 조종 라이선스 따러 local airport에 가서 등록하라는 무언의 충고 같았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시 일본군이 전략적으로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들을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첫째, 일본 공군이 진주만에 저장된 유류 탱크를 보지 못하고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이곳에는 2년 치 유류가 저장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만일 유류 저장소를 폭격했더라면 미군이 필요한 유류를 본토에서 운반했어야 하였는데 수개월이 소요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두 번째, 전함만 폭격했지 옆에 있는 Dry Dock(선체를 들어 올려 수리를 하는 도크) 수리시설을 그대로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격을 받아 선체에 구멍이 생긴 전함들은 곧바로 수리 Dock으로 들어가서 수리 정비를 한 후 바로 태평양 전투에 투입되어 실전에 배치되었다.
세 번째, 잠수함 기지를 공격하지 않았다. Base를 폭격하지 않아 전력을 회복하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아 곧바로 태평양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일본제국의 연합함대 총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쇼로쿠의 진주만 기습공격의 최대 목표가 미군의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항공모함을 무기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이 보유한 항공모함은 7척으로 대서양함대에 3척, 태평양 함대에 4척이 각각 배속되었다. 태평양함대에 배속된 항모가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였는데 요크타운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 있는 대서양에서 위력을 과시한 독일의 U보트를 격퇴하기 위하여 대서양함대에 지원하러 가있었고,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으며, 렉싱턴은 태평양 미드웨이 섬에 전투기 배달하러 가게 되어 진주만을 떠나 있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역시 전투기 배달하고 공습 전날인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 예정이었는데 돌아오는 길 중간에 폭풍을 만나 진주만 입항이 하루 늦어졌다. 이렇게 항모 4대가 실로 천우신조로 진주만 기습 당일에는 한대도 진주만에 있지 않아 기습을 피할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당시 태평양의 섬나라들은 대부분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같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와 서티모르를 지배하였고 포르투갈은 동티모르를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대부분의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하였지만 티모르는 끝내 동과 서로 분리되어 독립되었다.
해변도로를 따라 올라가자 풍광은 새로워지고 마음이 탁 트이게 바다도 끝이 보이지 않게 하늘과 맞닿아 있다. 물감을 푼듯한 남색 물색에 하얀 모래 비치가 군데군데 있어 물장구치며 노는 사람들이 많다. 해변 일주도로가 때로는 해수면 높이와 거의 비슷하여 파도의 깨어진 물줄기가 도로가로 넘어오기도 하였다. 혹 파도타기에 좋을듯한 큰 물살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자주 볼 수는 없다. 아마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는지 와이키키가 있는 남쪽 해변의 파도는 높고 세게 일어 서핑하기에 양호한 조건이지만 동쪽과 북쪽 해안은 그렇지 않았다.
와이키키 해변에 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큰 산맥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서있다. 높은 산에 기묘한 산세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마도 트레킹 코스도 좋은 데가 있을상 싶다. 해안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니 그런 산 형세를 반 바퀴 빙돌아서 뒤로 와서 보는 격이 되었다. 열대우림지역같이 일단 산이 푸르게 우거지고 건강한 짙은 녹색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위 지도 1번으로 표시된 곳이다. 넓은 만이 활대처럼 오목하게 들어앉아있어 파도가 거의 없고 수심이 얕아 스노클링 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성수기에는 엄청 붐비는 곳이다. 하와이에서 2년 살다가 버지니아로 이사 온 나의 고객이 스노클링 know-how를 알려주는데 물고기 밥을 사서 조금씩 뿌려주면 고기떼가 엄청 모여든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고기 반 물 반으로 고기떼와 같이 놀 수 있다고 한다. 갈 길이 바빠 해변으로 내려가 보지도 못하고 차를 파킹장에 세워놓고 해변으로 내려가는 언덕 위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섰다. 유행가 가사처럼... <나는 나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을 바로 몇 미터 앞에다 두고>
호놀룰루에서 이륙하여 Big Island로 이동할 때 운 좋게 비행기에서 잡은 동부 해안선 항공사진이다. 왼쪽 아래에 동그랗게 쏙 들어간 곳이 바로 Hanauma Bay이다. 뱅기에서 내려다 보아도 오목하게 들어앉은 형세로 큰 파도가 없이 천혜의 비치로서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모두들 입 모아 한소리로 꼭 가 볼 곳으로 추천한다.
하나우마 해변을 멀리서 사진만 훔치고 다시 차를 몰아 해안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바닷가에 전망대가 있어 많은 차들이 쉬어 가고 있었다.
Blowhole 전망대로 Blowhole이란 센 파도로 침식이 심한 해안 암석에 구멍이 생겨 센 파도가 순간적으로 암석 구멍을 때리면 그 수압으로 바닷물이 그 구멍으로 높이 솟아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일단 파도가 엄청나게 세게 바위를 때려야 그 구멍으로 물기둥이 높이 솟아오르는데 한동안 보고 있어도 큰 파도가 없어서 그런지 전망대 이름이 무색하게 솟아오르는 물기둥이 없었다.
남태평양 피지(FIJI)에서 Tonga로 내려갔는데 그 해안에도 Blowhole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어 찾아갔다. 역시 바위를 때리는 파도의 크기에 따라 물기둥의 높이가 정해진다.
Blowhole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 사진과 같은 천연적인 해변이 있어 사람들이 물질을 즐기고 있었다. 양쪽 암반이 옴팍하게 해변을 싸고 있는 형세로 센 파도가 중간에서 소멸되어 물살이 세지 않아 물놀이하기에 적합한 해변인 것 같았다.
시원한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지나가면서 얼핏 보니 많은 차들이 산허리에 일렬로 파킹하고 있었다. 무슨 구경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냄새가 풍겨오길래 나도 차를 돌려 그쪽으로 직감적으로 빠졌다. 들어가는 입구에 사진처럼 입간판이 서 있었다.
보아하니 차를 저기에 세워놓고 저 산등성이를 넘어 가야 아름다운 해안 경치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갈까 말까 하다가 이번에는 과감하게 본능적으로 접었다. 이번 배낭여행의 목적지가 남태평양인데 고작 북태평양에 있는 하와이 여러 섬 중의 하나인 O'ahu에서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는 것 같았고 하와이는 남태평양으로 내려가는 길에 덤으로 구경하는 것이기에 디테일하게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것 같아 접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오전에는
Diamond Head에 올라가서 근 2시간 반을 노닥거려 더 이상 트레일을 따라 걸을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돌아봐도 이 결정은 잘한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앞의 Shoreline 트레일을 따라 걸어가도 이 바다경치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나는 차를 타고 고개를 넘어와서 평평한 차도에서 보는 것이고 트레일을 따라 걸어가면 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차로 고개를 넘어왔기에 등대를 여기 아래에서 위로 바라보게 되지만 트레일을 따라가면 등대를 만나게 된다. 이곳의 해변 경치가 좋은지 바닷가에서 웨딩촬영을 하는 커플 한쌍을 볼 수 있었다.
북쪽으로 올라가도 곳곳에 마을이 있고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곳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호놀룰루처럼 하늘을 찌르는 고층 빌딩이나 와이키키 해변의 늘씬한 비키니 미녀들은 없지만 싱싱한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청정한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이 그런 물질주의(materialism)의 부산물보다 훨씬 높은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라" 당근 그 말이 떠 올랐다.
위 지도 5번에 표시된 곳이다. 현재 명칭은 폴리네시안 문화센터이지만 원래는 몰몬(Mormon) 교회 재단이 만든 공동체였다. 통가, 하와이, 사모아, 타히티, 피지, 뉴질랜드 그리고 말케스 7개국에서 파견된 학생들이 그들 전통의 공예품과 춤 등을 보여주는 공연을 한다. 입장료가 꽤 하는데 특히 오후에 공연하는 그들의 나라별 신화를 춤과 노래로 보여주는 것이 볼만하다고 하는데 혹자는 그들의 오리지널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연 약 백만 명의 유료 입장객이 있어 와이키키와 연결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남태평양으로 내려가기 전에 문화센터는 들러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는데 참으로 아쉬웠다.
열심히 앞만 보며 달려가다 큼직한 세종대왕체가 눈에 들어왔다. 차를 세우고 한번 들어 가보려고 하다가 갈길이 바빠 그냥 패스하기로 하였다. 조금 더 달려가니 위 사진과 같은 한글판 상호가 또 보여 차를 세우고 사진만 찍었다. 스쿨버스를 개조해서 식당차로 사용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여간 이런 곳에서 뜻하지 않게 저런 눈에 매우 익숙한 광고판을 보면 반가운 건 사실이다.
북쪽에는 말을 키우는 ranch(목장)도 간간이 보였고 넓은 초원에는 말들이 유유적적하게 풀을 뜯으며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주민들은 모래사장에 차를 세우거나 또는 모래사장의 폭이 거의 없는 경우에는 차를 해변 갓길에 대고 모두들 낚시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경치가 좋은 길을 Hawai Scenic Byway라고 명명하여 군데군데 수려한 풍광을 보여준다.
사진을 찍어보니 처음에 착륙한 각도와 틀리게 풍경이 잡힌다. 즉, 착륙 시와 이륙 시의 방향이 틀리게 되어 수시로 다른 사진을 찍게 된 것이다. 다행히 오아후섬의 동쪽 해안선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뱅기가 앞으로 나아가자 해안선의 각도가 금세 바꿔어진다.
위 항공사진을 구글 지도에서 찾아보니 이 부근이었다. 72번 도로가 동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길이다.
뱅기 창가에 앉아 항공사진을 찍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익었다. 그러나, 항상 좋은 결과의 사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자리 배정이 좋아야 하는데 뱅기 양쪽 날개가 시야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날씨가 쾌청해야 선명하고 색감이 살아있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이번 남태평양 여행은 대부분이 섬에서 섬으로 이동하였기에 주로 경비행기를 타게 되어 항공사진 찍기에 좀 더 용이하였다. 이어지는 여행기에 하늘에서 잡은 남태평양 여러 섬의 다양한 이미지를 소개할 것이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