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ahine에서 피를 보다
2017년 6월 10일(금) 맑음
다음 목적지인 Huahine로 가기 위해서 천상 무레아에서 타히티 본섬으로 나가야만 하였다. 무레아에서 바로 후아히네(Huahine)로 가는 연결편도 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약 10분 비행거리 - 지구 상에서 존재하는 비행 구간 중 가장 최단거리라고 한다 -에 있는 타히티 Faaa 국제공항으로 날아가서, 그곳에서 다시 후아히네로 연결되는 뱅기를 타기 위해서다.
위 약도에서 오른쪽 위로 멀리 연결되는 곳이 소시에테 제도에 속하는 Bora Bora에서 투아모투(Tuamotu) 제도에 속하는 Rangiroa,Tikehau, Fakarava로 연결되는 비행 편을 보여준다.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가는 채비를 마쳤다. 어제 저녁에는 불타는 노을을 보여 주었던 하늘이 오늘 아침에는 은은한 파스텔화로 부드러운 하늘을 연출하였다. 싱그럽게 아침을 여는 도로를 따라 공항으로 향하였다.
작은 쌍발기로 섬과 섬 사이를 이동할 적에 가장 신나는 일은 항공사진을 촬영하는 것으로, 뱅기 고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육상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3차원적인 경치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만히 좌석에 앉아서 두 눈으로만 아래로 펼쳐지는 풍광을 감상할 수는 없고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야 한다. 개인적으로 뱅기와 조종사를 렌트해서 마음에 드는 항공사진을 찍을 수도 있겠지만 그 엄청난 경비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게고, 이렇게 여행지를 뱅기로 이동하는 구간에 촬영하는 항공사진은 어찌 보면 꿩 먹고 알 먹는 격으로 이미 지불한 뱅기표 가격에 포함된 것이니 항공사진을 찍지 않으면 무언가 손해 보는 그런 기분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뱅기를 탈 적에는 무조건 창가석을 선호하고 매번 항공사진 촬영 준비를 단단히 하고 탄다.
특히 뱅기의 이착륙 시에 촬영하는 컷이 지상 거리와 가깝기 때문에 선명한 사진을 건질 확률이 높은 대신에 순간적으로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셔터 찬스를 놓칠 경우가 많은 게 단점이다. 그러나, 뱅기가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고 날아가는 경우에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촬영할 수 있어 여유 있게 색다른 구도 위주로 촬영하는 것이 좋다.
항상 멋진 풍경의 항공사진을 얻을 수는 없다. 창가 위치에 따라 뱅기 날개가 시야를 가릴 수 있고, 아예 빈 바다나 하늘만 보이고 경치를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 때로는 운도 따라야 입이 쩍 벌어지는 멋진 항공사진을 가질 수 있다.
활주로를 이탈하여 새처럼 하늘로 올라가자 바로 무레아섬의 남부 해안선이 아래로 펼쳐진다. 어김없이 바다는 two tone으로 다가오는데 섬 주위를 따라 일정한 거리로 자생한 산호초에 파도가 부딪치면서 하얀 경계선을 그어 주고 있다.
진짜로 금방이다. 무레아섬 해안선을 벗어나자마자 크게 다가오는 것이 타히티 본섬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해안에 작은 세일보트들이 줄을 지어 물 위에 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고 배만 정박(parking)하고 있는 것이다. Marina에서 배를 정박시키는 docking 시설이 부족할 경우에는 위 사진처럼 연안에 배를 맬 수 있는 시설을 일정 간격으로 물밑에 설치하여 배를 정박시켜주는데 이를 mooring이라고 한다.
정확하게 어디쯤인지는 몰라도 고급 물가 호텔의 방갈로가 크리스털같이 맑은 남색의 물 위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김없는 two tone의 물색으로 투명하게 물아래로 수초처럼 검게 보이는 것들이 산호초들이다.
산호(CORAL)는 식물이 아니고 동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산호를 해양 식물로 알고 있는데 그와는 달리 동물이다. 산호는 폴립(POLYPS)이라고 불리는 해양성 동물 개체가 성장하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외부 조직은 석회질로 구성되는데 POLYPS이 자체 세포 분열하여 POLYPS COLONY를 형성하는데 이게 바로 산호가 되는 것이다. 이 폴립이 우리 몸속에 생기면 보통 종양이라 부르는데 맑은 바닷물에서 자라면 아름다운 산호가 되고 우리 몸에서 자라면 재수 없는 암이라고 부르게 된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바위처럼 생긴 것도 산호(CORAL) 이다. 2014년 겨울 호주 배낭여행 때 동부 Mackay 근처 Great Barrier Reef에서 촬영한 산호 사진들이다.
Faaa 공항에 내려서 텅 빈 활주로를 걸어서 나오는데 하얀 구름모자를 눌러쓴 본섬의 모습이 가깝게 들어왔다. 70-200mm 렌즈로는 한 방에 다 잡을 수가 없는 광각이라 부득이 4번으로 나누어 찍어 합성한 사진이다.
Faaa 공항에서 죽치다가 Huahine행 뱅기를 탔다. 왜 생판 듣지도 못한 Huahine로 가냐고 혹 어느 당돌한 그러나 호기심 많은 독자가 물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혼자서 독자적으로 결정한 행선지도 아니고 그 섬에서 특별히 꼭 봐야 할 것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현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상업적으로 관광상품으로 빤질빤질하게 닳아 빠진 Moorea나 Bora Bora 말고 근처의 어느 섬이 좋겠냐고 한 섬만 찍어 보라고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외쳤던 섬이 바로 Huahine였기 때문에 Bora Bora로 가기 전에 그 섬에 가보려고 마음먹었을 뿐이었다.
이번 남태평양 여행에서 생판 모르고 왔다가 이렇게 현지인들의 추천으로 가 본 곳이 기대 이상으로 대박을 터뜨린 적이 있어 이번에도 그렇게 해본 것이다. 실제로 예를 들어 보면,
뉴칼레도니아로 갔을 때 첨에는 소박하게 그 유명한 Ile des Pins(일데뺑:송도)만 보고 본섬을 차로 한번 둘러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현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본섬 오른편 위에 있는 Loyalty Islands 중 우베아(Ouvea) 섬을 추천하길래 혹시나 하고 본섬 일주를 접고 우베아로 날아간 덕분에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섬>의 진면목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요행을 바라고 찾아갔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섬의 작은 악마가 내가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장난질 하려고....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섬>으로 바로가기
https://brunch.co.kr/@jinhokim/288
역광으로 잡은 남태평양 바다의 표면이 무슨 가죽소파 껍데기처럼 뺀질뺀질하였다. 마치 회색의 가죽 표면을 접사 한 것 같았다.
남태평양 위를 뱅기를 타고 날아갈 때 제일 흔하게 보이는 풍경이 바로 위와 같은 사진이다. 아래위가 온통 푸른색으로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다. 점점이 떠 있는 구름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가 곧 하늘로 변하곤 하였다. 이런 것들을 하염없이 보고 있노라면 축 처진 인생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남태평양이 가여워지고,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바구했던 시인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하게 메이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처량하고 쓸쓸한 기분이었다. 마치 우리 인생살이의 진면목이 그러한 것처럼.
약 40분을 망망한 바다 위로 날아갔더니 멀리서 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섬이나 이 섬이나 저 섬이나 모두 비스무리한 옷을 입고 얌전한 색시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위와 같은 서술은 이 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데 타히티 현지어로 <vahine>가 <여자>를 뜻하는데 섬의 솟아 오른 윤곽선이 아기를 밴 여자의 그것과 흡사하다고 하여
Huahine라는 섬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흔히들 이 섬을 치켜세우는 찬사로 <The Garden of Eden> 에덴의 정원이라고 하는데, 에덴이라고 하면 성경 속의 아담과 이브가 빨개벗고 잘 놀았던 지상 최고의 파라다이스가 아녔던가. 녹음이 짙은 정원이라는 찬사가 코코넛, 바닐라, 바나나와 빵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열대 정글 지역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섬은 다른 섬과는 달리 타히티 원시 역사와 신화적인 요소가 어울려 타히티 현지인에게도 정신적인 신앙의 중심으로도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 섬이 옛날에는 타히티 왕가의 터전으로 Polynesian 문화의 요람으로 이어져 내려왔고, 프렌치 폴리네시아를 통틀어서 제일 큰 신전인 Marae(temple)가 보존되어 있고, 폴리네시아 지역의 고고학사에 종종 등장하는 Lapita People(약 700 AD에 폴리네시아에 정착한 원주민)이 바로 타히티 원주민의 진정한 선조라고 여겨진다고 한다. 그러나, Huahine를 추천하는 대부분의 현지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Moorea나 Bora Bora 섬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있는 반면, Huahine섬은 개발이 덜되어 때 묻지 않은 타히티의 순수한 자연미를 보전하고 있다는 긍지로 이 섬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고 한다.
섬은 비행장이 있는 위쪽 큰 섬(Nui)과 아래쪽에 있는 작은 섬(Iti)으로 이루어져 있고, 두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섬 거주자는 약 6천 명 정도이고 면적은 약 75 평방 킬로미터이니 거제도 크기의 약 1/5 정도이다. 위 약도 사진은 motu picnic이라는 배를 타고 섬을 둘러보는 tour 포스트로 출발지가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Fare라는 마을에서 출발해서 섬을 일주하고 다시 출발지인 Fare로 돌아온다. 총 소요되는 시간은 거의 하루 종일 걸릴 것 같다.
비행장에 내려서 밖으로 걸어 나오니 뉴칼레도니아의 부속 섬인 Ouvea처럼 아무 시설도 없었다. 혼자 생각으로 공항이면 으레 렌탈카 정도나 택시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몇 명 되지도 않은 관광객들은 이미 예약된 호텔에서 제공하는 봉고차에 짐들을 싣고 공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공항에 낙동강 오리알처럼 혼자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불쑥 들었다.
“봉고차에 좌석이 있어요?”
혼자서 열심히 관광객들의 배낭과 가방을 차 뒤 화물칸에 싣고 있는 가이드 같은 젊은이에게 애처로운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예, 있기는 한대요. 호텔을 예약하지 않았나요?”
독불장군처럼 호텔을 예약하지 않고 다니는 게 마치 훈장을 받을 자랑거리인 것처럼 잘 다녔던 돼지가 우물에 빠지는 날이었다.
“근처에 차를 렌트할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일단 봉고차를 얻어 타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옆에 앉은 가이드 청년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가는 길에서 제일 가까운 마을에 내려 달라고 하였다. 그 마을이 위 지도에서 보이는 공항 밑에 있는 Fare라는 마을이었다. 이곳저곳 물어서 차를 렌트하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차가 없었다. 관광객이 많아서 렌트차가 동이 난 건지 렌트할 차가 몇 대 없어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스쿠터 대여하는 곳을 찾아갔다. 무거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스쿠터를 운전하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찾아간 곳은 중국인듯한 중년의 아지매가 운영하는 스쿠터 대여점이었다. 자동 변속 장치가 있는 것이 스쿠터이고, 왼발과 왼손 클러치로 수동으로 변속시키는 용량이 큰 스쿠터가 오토바이로 보면 된다. 125CC 자동변속 스쿠터를 타라고 권한다. 속으로 적은 용량은 아닌데 하면서 주는 대로 핸들을 잡고 안장에 앉아 보니 편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죽어도 쓰기 싫어하는 헬멧을 쓰라고 하니까 스쿠터를 빌릴 마음이 더 사라졌다. 그러나, 섬을 구경할 시간이 오늘 밖에 없으니 결국 스쿠터를 타기로 하였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핸들을 잡으니 배낭 무게 때문에 무게중심이 불안해서 발을 놓는 앞쪽 발판에 배낭을 벗어 바싹 밀어 넣고 섬 구경에 나섰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섬 해안선이 완만하지는 않았는데 지도를 보니 섬 곳곳에 해안선이 섬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위 사진처럼 첨에 볼 때는 섬 내륙에서 큰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강물이 아니고 바닷물이 섬 깊숙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형세였다.
이 큰 섬 면적에 인구가 고작 6천 명 정도이니 돌아다녀 보아도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고 섬 안에 형성된 큰 마을도 7-8개 정도로 손꼽을 정도이니 매우 조용한 남태평양의 여러 섬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스쿠터로 한번 돌아본 Huahine 섬은 정말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관광지로 개발을 안 하고 있는 섬처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울창한 밀림과 청정한 바다를 자랑하고 있었다.
점심도 거르고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면서 Huahine
Nui(큰 섬)만 스쿠터로 대충 둘러보았다. 하지만 해가 완전히 서산으로 넘어가면서 빛이 약해서 사진 촬영은 힘들었다. 해안도로에는 이정표도 많지 않아 깜깜한 밤길에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속도도 낼 수 없어 시간만 잡아먹고 있었다. 결국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다. 불빛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어느 현지인 집을 두드려 길을 물어 방향을 잡았다. 이티(Iti) 작은 섬은 구경도 못하고 큰 섬인 Nui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였다.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편인지 독불장군 같은 돼지가 두 번째로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더욱더 힘든 게 저녁에 자고 갈 곳도 정하지 않아 어디로 가서 숙소를 구해야 할지 그것도 막연하였다. 아까 낮에 스쿠터 빌리면서 근처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물어 두 군데 전화를 넣었는데 얼마나 오래 묵냐고 물어 오길래 하룻밤만 잔다고 했더니 미안하다면서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성수기가 아니다 보니 투숙객이 한 명도 없는 모양으로 하룻밤 손님 받을 준비를 성가시게 하느니 수입을 포기하는 게 나은 모양이다.
해가 지고 나니 어둠은 금방 찾아들었다. 신기하게도 오가는 행인도 없을뿐더러 자동차 헤드라이트도 구경하기 힘든 가로등도 하나도 없는 적막에 싸인 Huahine 밤길을 고독한 배고픈 나그네가 홀로 스쿠터에 몸을 싣고 길을 찾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와중에도 현명하게 생각한답시고 공항 가까이 있는 마을로 가서 밥과 잠자리를 구하는 게 내일 아침 일찍 스쿠터를 반납하고 Bora Bora행 뱅기를 타러 공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돌고 돌아서 Fare 마을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은 것이 저녁 8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점심도 거른 채 칠흑같이 아니 숯검정같이 깜깜한 밤길을 거의 두 시간 이상 헤매다가 찾은 밥집이 신의 축복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스쿠터를 가게 앞 버드나무같이 잎가지들이 축 늘어진 나무 밑에 세워 놓고 무거운 카메라만 들고 배낭은 스쿠터 발판에 그대로 놓아둔 채로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 넓은 홀에 서너 테이블에 관광객이 자리를 하고 있었고 커다란 카메라를 매고 홀로 들어선 배고픈 독불장군에게 모두들 호기심 어린 눈길을 한두 번씩 던졌다. 테이블마다 쌍쌍으로 마주 앉아 사랑과 낭만이 줄줄 흐르는 밤 깊은 남태평양 섬에서 로맨틱한 무드를 타고 있었다. 그래 타히티로 혼자 오면 이런 눈총을 받을 것이라고 상상을 했는데 역시 그렇군. 주인장 같은 여 마담이 가져다주는 메뉴판을 보면서 처음으로 홀로 길을 떠난 외로운 처지를 스스로 동정하였다. 아마도 몹시도 시장하고 지쳐서 대뇌 세포가 정상적으로 사유를 못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이제껏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가는 식당에서 배가 무지하게 고파 폭풍 흡입이 가능한 시추에이션에서는 메뉴판에서 일단 가격이 제일 높은 걸로 고르고 난 다음 메뉴를 읽어 보면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설명도 비싼 가격만큼 길었다. 싱싱한 (꼬리만 아니고) 통 바닷가재를 버터로 구워내면서 무슨 무슨(불어 같았다) 소스를 첨가하여..... 싱싱한 살라드와 방금 구워낸 프렌치 브레드와 함께 서브한다나. 침이 절로 나오게 하는 레시피였다. 포도주 한 잔을 곁들이고 싶었는데 음주 운전이 될 것 같아 잡혀 불어도 별로 표시가 없을 맥주 한 병만 추가하였다. 큰 접시에 담겨서 나온 버터에 열탕을 한 바닷가재는 다른 테이블의 이목을 단박에 끌어 모았다.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엄청 사랑스럽게 핥고 빨고 깨물어 주었다. 인증샷 의무도 까맣게 잊고 그녀와 약 40여분 동안 부드러운 두 손과 미각을 추구하는 혓바닥과 강렬한 망치 같은 아래위 턱의 이빨로 서로 만족할만한 정사(情事)를 끝내고 바닷가재 껍데기와 두둑한 팁을 접시에 남긴 채 엷은 미소로 배부른 독불장군을 배웅하는 마담을 뒤로하고 나무 밑에 세워둔 스쿠터로 향했다. 밤하늘의 별들도 소곤거리는 남태평양 작은 섬의 낭만적인 저녁시간이었다.
이런 말이 있다.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다> 나를 몰래 가만히 지켜본 심술궂은 장난꾸러기가 무엇을 부러워했는지는 몰라도 - 고작 버터에 구운 바닷가재를 폭풍 흡입하는 잘 곳 없는 나그네를 - 결국 나에게 주술을 걸어왔다. 아마 지지 않으려고 그랬던 모양이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 밑에 세워 둔 스쿠터에 배낭도 그대로 놓여 있었고 헬멧은 쓰지 않고 뒷좌석에 매달아 놓았다. 축 늘어진 나뭇가지가 스쿠터에 앉아 보니 허리춤까지 내려와 있었다. 출발하려고 오른손으로 잡은 엑썰래이트 손잡이를 살짝 돌려 보았다. 좀 오래된 스쿠터라 살짝 돌리면 무거운 몸체가 나가지 않아 좀 더 세게 잡아당겨야 했다. 순간적으로 너무 세게 당겼는지 아님 바닷가재의 고 단백질이 벌써 몸속으로 녹아들어 에너지로 축적되어 오른손 아귀힘으로 전달되었는지 스쿠터가 울컥하며 앞으로 나가는 순간에 얼굴 부분에 축 늘어진 나뭇가지들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동시에 몸이 스쿠터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찰나에 이루어진 비극적인 쇼였다. 땅바닥에 쓰러진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 보니 식당 안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아까 식당 안에서 몇 번이나 우호적인 눈길을 교환했던 백인 관광객이 뛰어나와 널브러져 있는 스쿠터를 일으켜 세워 주면서 괜찮냐고 물어 왔다. 그래도 장군인데 독불장군인데 별 일이 있겠냐고요. 말로만 그렇다고 했는데 안경과 모자가 어디론가 튕겨 나가 버렸고 다행히도 카메라는 목에 걸려 있었다. 안경과 모자를 그 백인 남자가 찾아 주었다.
그런데 잠시 뒤 얼굴 위로 무언가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려 손으로 만져보니 피 같은(귀중한) 피였다. 천천히 흘러내린 피는 콧등을 점령하고 좀 전까지만 해도 맛난 사랑을 나누웠던 입술을 지나 턱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피가 맺힌 턱을 손으로 감싸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화장실 거울 앞에서 우물에 빠진 아니 핏물에 빠진 돼지의 면상을 보니 가는다란 여러 갈래의 붉은 피자국이 강물 줄기처럼 얼굴 전체를 덮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이걸 인증샷으로 남겨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했지만 공포에 질린듯한 얼굴을 한 주인 여 마담의 괜찮은지 물어보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의 떨림에 그렇게까지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일단 찬물로 피로 얼룩진 면상을 깨끗이 씻었다. 첨에는 코뼈가 부러져서 피가 나온 걸로 생각했는데 씻고 보니 중앙 이마 위부분 바로 머리털이 시작한 그 경계선에 조그마한 찰과상이 있어 그곳으로부터 피가 조금씩 흘러내렸던 것이었다. 보아하니 꿰매야 할 상처는 아닌 것 같았다. 안절부절하며 응급조치 상자를 주인장이 가지고 왔길래 째진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가제로 누르고 반창고를 여러 겹 붙여 상처뿐인 반창고 독불장군으로 전락하였다.
제일 가까운 숙박업체가 어디인지 물어보니 Fare에 있는 위 사진의 Maitai Lapita Village였다. 첨부터 비싸게 보인 고급 호텔 같아서 피했는데 결국 반창고 붙인 채로 스쿠터를 타고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찾아 간 호텔의 매니저는 스페셜 요금을 묻는 반창고에게 마치 빠져나갈 수 없는 물고기에 낚시 바늘을 코에 걸어 놓은 강태공처럼 안 자고 갈려면 가라는 고자세로 300불을 최저 스페셜 가격이라고 아주 착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오늘은 더 이상 다녀 보았자 좋은 일은 생길 것 같지 않아 조용히 백기를 들어 올렸다.
키를 받아 들고 찾아간 내 방은 성인 4명이 누워도 여유가 있을 마호가니 침대가 넓은 방에 놓여있고,바닥은 대리석으로 깔고, 시원한 천정이 이층 집같이 높고 야외 베란다가 호수 물가에 있어 긴 선탠용 의자에서 하루 종일 개겨도 지겹지 않을 훌륭한 방이었지만 몇 시간 후면 털고 일어나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 하기에 돈 값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오늘 하루를 생각해 보니 이게 소위 말하는 호사다마(好事多魔)의 레알 본보기일까 하고 스스로 위로를 해보지만, 자꾸만 옛날에 보았던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 영화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