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주는 무레아섬의 낙조
2017년 6월 9일(목) 맑음
별로 크지도 않은 섬이지만 동서남북은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어 길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길은 해변도로 외길로 되어있어 잘 따라만 가면 된다.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 Tiahura로 들어섰다. 섬 서쪽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라고 한다. 위 지도 26에는 세계적인 호텔 체인점 Intercontinental Hotel 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길은 높은 언덕 위로 나있어 아래쪽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특급호텔의 수상 방갈로가 가지런하게 남색 물 위로 펼쳐 저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하늘과 바다와 우거진 야자수가 Resort와 멋지게 어울리는 그런 풍광을 선사하고 있었다. 가까운 해안에서 자생한 산호초가 스스로 방파제가 되어 밀려오는 파도를 막아주기에 방갈로 주변의 바닷물은 호수처럼 푸르고 평온하였다. 스노클링 하기에도 딱 맞는 환경으로 방갈로 호텔 투숙객들이 즐길 수 있는 활동 중의 한 가지이다.
남태평양의 여러 섬을 거쳐서 오는 동안 - 하와이를 시작하여 피지, 사모아섬, 뉴칼레도니아, 바누아투, 통가 그리고 쿡제도- 유명 호텔들의 숙소는 어김없이 푸른 물 위에 떠있는 방갈로로 되어 있었다. 방갈로 형태를 자세히 보면 각각의 방갈로 Deck으로부터 바닷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있다. 투숙객은 수영복으로 바꿔 입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파도가 없고 크리스털같이 맑고 푸른 남태평양 바닷속으로 첨벙거릴 수 있는 편리성이 보장되어 있다. 아마 그런 편리성을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한쪽으로는 작은 배를 정박할 수 있는 Deck을 만들어 넓은 바다를 맘껏 노닐 수 있도록 각종 편의시설을 마련해 놓았다.
어쩌다가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모래가 있는 비치로 내려왔다. 별도로 파킹장이 있어 차를 정차시키는 게 아니고 그냥 적당한 공터에 자유롭게 댈 수 있었다. 보아하니 관광객이 찾는 그런 비치는 아니고 여기 거주하는 현지인들이 찾는 조용한 비치인 것 같았다. 눈으로 짐작만 해도 아래위 해변의 길이가 얼추 1-2km는 될 듯하였다. 해안이 활대처럼 휘어져 반원처럼 돌아 나가는데 그 끝에는 호텔이 자리하고 있는지 수상 방갈로가 점점이 박혀있었다. 물속에 노닥거리는 한패와 백사장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커플만이 공유하는 비치가 퍽이나 여유스럽게 보였다. 문득 작년 겨울에 다녀온 나의 hometown 부산 해운대 백사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백사장의 폭과 길이가 예전에 비해 난쟁이 똥자루만 하게 점점 줄어들고, 해변 뒤쪽으로는 하늘을 찌르는 고층건물들이 숲 아닌 울타리를 만들고, 지금같이 무더위가 폼 잡을 때이면 백사장을 덮은 인파들로 아마도 인구밀도가 이 은하계에서 선두를 달릴 부산의 해운대 비치에 비하면 이런 곳은 얼마나 넉넉하고 여유로운 해변이 아닌가.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비치에 모래만 있는 게 아니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돌들이다. 위쪽으로는 저 멀리 건너편에 하얀 구름으로 솜이불을 덮은듯한 타히티 본섬을 배경으로 개인 주거지인지 숙박업소인지 그런 건물이 몇 채 목 좋은 물가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가르다란 몸매로 키가 훌쩍 커버린 야자수가 마치 울타리처럼 백사장 뒷마당을 경계 짓고, 수심이 얕은 해안에 형성된 산호초들이 파수병처럼 대양의 파도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니 파도가 없는 맑은 풀장처럼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래쪽을 보아도 삼삼오오 현지인들이 모래 위에서 물속에서 하루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평온해 보였다. 나도 덩달아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쓰리빠를 벗어던져놓고 7부 바지를 말아 올리고 얕은 물속으로 걸어갔다.
옷을 걷어 올리고 물속으로 걸어간 덕분에 또 다른 기념품을 건질 수 있었다. 부근에 사는 현지인들로 자세히 보면 고갱의 그림 속에 나올법한 그런 용모의 타히티 모델들이다. Facebook 이 있다고 해서 나중에 사진을 보내줄 수 있었다. 왼쪽 모델이 귀에 장식하고 있는 꽃이 남태평양 현지인 처자들이 즐겨 애용하는 Plumeria 꽃이다.
Plumeria라고 하는 꽃으로 꽃말은 "당신을 만난 것이 행운입니다".라는 뜻이다. 남태평양 전통춤을 추는 훌라 댄서들이 춤출 때 귀나 머리에 이 꽃으로 치장하는데 미혼은 붉은색, 기혼은 하얀 꽃을 꽂는다고 한다. 그런데 남태평양 여러 섬으로 내려가 보니 댄서만 아니라 저 모델처럼 일반 여자들도 이 꽃으로 머리를 치장하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Eglise de la Sainte Famille로 1897년에 세워진 가톨릭 성당이다. 성당이 coral과 lime으로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죽은 산호 껍질을 분쇄하여 lime 액으로 반죽하여 횟가루처럼 벽면을 장식했다는 말인 것 같다.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이 성당 건물이 나의 눈낄을 끈 것은 하얀 벽면에 빨간 머리를 한 지붕보다도 성당 뒤로 보이는 배경에 그만 훅하고 빨려든 것이다.
타히티를 통치하던 원주민의 포마레(Pomare) 왕조가 막을 내리고 프랑스에게 완전한 식민지로 넘어간 해가 1880년이니까 그로부터 약 17년 뒤에 세워진 셈이다.
섬 지도를 찾아보아도 산봉우리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성당이 자리한 터가 얼핏 보아도 명당인 것 같았다. 뒤로는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위풍당당하게 호위해주고 앞으로는 코발트색의 남태평양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 저 있으니 성당 건물이 산세와 바다 세와 잘 어울리는 훌륭한 명당에 세워진 셈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성당과 뒷 산봉우리를 그들의 화폭에 담아 가고 있다고 한다.
섬의 남쪽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다. 특별히 보아야 할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지만 해안도로를 달리다가 눈길을 끄는 풍광이 나타나면 마치 여행 잡지사에서 밥을 벌어먹는, 취재하러 나온 잡지사 기자처럼 의무를 다하곤 했다. 그런데 마감 송부 시간이 없는 취재이었기에 엄청나게 자유로웠다.
그 다리 위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두 어린 강태공을 볼 수 있었다. 무슨 고기가 낚이는지 궁금해서 차에서 내려 구경하러 갔더니 낚시질을 이제 막 시작했는지, 아님 괴기들이 낮잠 자러 갔는지 어획고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카메라로 두 강태공을 완전히 낚아 버렸다.
낚시를 하던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역광 상태라 적정 노출을 주게 되면 자칫 얼굴이 어둡게 나올 수 있다. 이를 방지하는 요령은 플러쉬를 터뜨리던지 아님 적정 노출보다 1-2단계 과다로 세팅하면 된다. 이렇게 역광으로 찍은 사진은 피사체의 outline이 빛을 받아 형성되기에 사진이 아름답다.
항구 마을이라 그런지 다가갈수록 삶의 에너지가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시장통이 그런 곳처럼
페리보트가 들락거리는 이 마을 Vaiare도 생동감이 펄펄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한 줄로 주차한 마을택시부터, 오래간만에 섬 나들이를 하러 온 현지인 가족들의 즐거운 모습들, 무료한 시간 죽이러 나온듯한 근처 마을의 아이들, 눈에 띄는 원색의 나들이 옷으로 치장한 외지 관광객들까지 항구마을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차를 실어 나르는 페리보트가 있다 보니 모두들 차를 일렬로 줄을 세워 놓고 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차를 다른 곳에 세워놓고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고 구경 나온 마을 아이들처럼) 구경삼아 배표를 파는 사무실과 배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있는 행렬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차를 렌트해서 건너온 관광객들도 눈에 띄지만 현지인들도 가족단위로 자동차로 건너온 사람들과 건너갈 사람들이 페리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행렬 속에서 우연히 짧은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틴에이저 커플을 만나 사연을 들을 수가 있었다.
사진 찍기 위해 김치하고 웃는 건지 커플로 사진을 찍게 되어 그게 좋아서 웃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곧 배가 떠나면 서로 헤어져야 할 남과 여이다. 앳된 얼굴처럼 여자애는 타히티에 거주하는 고딩이고 남자애는 무레아 섬에 거주하는 또래의 나이로 학교를 다니지 않고 농사짓는 부모님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타히티판 <갑돌이와 갑순이>의 스토리 같다고나 할까. 누가 먼저 물건너로 넘어갔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짧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가슴 아프게>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모양이다. 주로 타히티 섬에 있는 갑순이가 페리보트 타고 무레아 섬에 있는 갑돌이를 만나러 오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도 뱃길이 짧아 당일치기로 섬을 다녀가는 것이 수월하니까 다행인 셈이다. 언제까지 그렇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지내야 할는지는 몰라도 헤어지면서 그런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두치서 잘 지내봐>
건너편으로 흰구름 모자를 쓴 타히티 본섬이 빤히 보이는 이 곳에서 약 10여 년 전에 항공사고가 발생하여 관광객 19명이 전원이 아름다운 모레아섬에서 한순간에 <지상에서 영원으로> 영면했다고 한다.
2007년 8월 9일 승객 19명을 싣고 이 섬의 Temae 공항을 출발하여 타히티 Faaa 국제공항으로 가던 비행기가 이륙하자 곧 이 근방 바다로 추락하여 승객 19명과 조종사 1명 전원이 사망한 항공사고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를 추모하여 여기에 추모비를 세웠다고 한다. 사고 원인은 기체 결함으로 10분 비행거리인 탓으로 하루에 40-50회 운항하다 보니 기체 부속품이 쉽게 노후화되어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상 낙원 같은 타히티 관광길에 나섰다가 졸지에 지구를 떠나게 된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그렇게 끝나도록 되었는지. 추모비 앞에서 그들의 명복을 잠시나마 빌어보고...... 나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그렇게 지구를 떠날 수 있을련지도 모르니까.
아침부터 산속으로 들락거리면서 섬 주변을 천천히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남태평양의 작열 태양이 서서히 서쪽으로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였다. 이제 저 노을빛이 오늘 마지막 살아있는 빛이 되어 피사체에 비쳐줄 마지막 광원이 될 것이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 빛이 약해서 들고 찍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삼발이(tripod)를 써서 바싹 조인 조리개라도 빛이 충분히 들어오게 노출시간을 길게 해 주어야 한다. 이럴 경우 삼발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배낭 속에 삼발이를 추가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야경 촬영이 거의 없다 보니 무용지물이 될 확률이 높다. 그래도 이번에 넣고 간 작은 tripod로 무레아 낙조를 건져 올릴 수 있어서 딱 한 번으로 배낭 속에 넣고만 다녔던 삼발이를 잘 써먹었던 것 같았다.
땅거미가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할 때 해변도로를 타고 있었다. 사유지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집들이 쳐들어와 있어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야자수 사이로 힐끔힐끔 보여주는, 누렇게 물들어가는 낙조가 폼 있게 보이는 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카메라와 삼발이만 들고 해변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개인 집들이 들어차 있어 쉽게 들어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촘촘한 철사로 키가 높게 울타리로 막아 놓은 벽 앞에 술에 취한 듯한 현지인 두 명이 앉아 있는 곳에 소위 말하는 들락거릴 수 있는 개구멍이 나있어 몸을 구부리고 들어갈 수 있었다. 개구멍 앞에 있는 현지인들에게 들어갈 수 있냐고 물어보니 그렇게 해도 된단다. 들어가 보니 개인집이 있는 곳은 아니고 비워있는 해변인데 땅 주인장이 철책으로 울타리를 쳐놓은 곳이었다. 그야말로 막힌 것이 없는 탁 트인 해변가로 노을 사냥에는 더 말할 나위 없는 완전한 사냥터였다.
무단 침입한 사냥터에서 삼발이를 세워놓고 자유롭게 낙조를 잡았다. 키가 큰 야자수 몇 그루가 드문드문 서있는 해변에서 관찰되는 노을은 서서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였다. 첨에는 누런 빛으로 시작하더니 곧 붉은색으로 하늘을 물들이고, 파도 없는 잔잔한 바다 위로 그 붉은 하늘이 그대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런 붉은 옷도 얼마 가지 않았다. 마치 신상품 패션을 소개하는 파리 패션모델처럼 금방 금방 새로운 색조의 옷을 갈아입고 관객들 앞에 사뿐사뿐 걸으면서 옷맵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붉은 노을도 얼마 있지 않아 푸른 색조를 띄기 시작하면서 금방 노을이 시들어지기 시작하였다.
더욱더 낙조가 아름답게 보였던 이유는 텅 빈 하늘이 아니고 여러 모양의 구름 떼가 조연 연출을 해 주었기에 꽉 찬 낙조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여기 무레아 섬의 낙조가 오늘처럼 매일 볼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늘이 특별한 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태평양 섬에서 이런 노을을 맞이할 수 있었던 오늘이 참으로 운이 좋았던 날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래저래 노을 작업을 마치고 차로 돌아 나올 때는 주위가 완전히 어둠으로 쌓이면서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노을도 그 빛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마치 한순간 뜨겁게 타올랐던 사랑의 불길이 잊히면서 천천히 식어가는 것처럼 모레아 섬의 낙조가 그렇게 서서히 어둠 속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