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se aux Meadows 세계 문화 유적지
오늘 드디어 뉴펀들랜드의 최북 극점을 찍었다.
섬 최북 쪽에 있는 랑즈오메도우즈(L’anse aux Meadows)라는 곳으로, 이로써 등산가가 히말라야 최고봉들을 다 밝아 보듯이 뉴펀들랜드 동서남북 극점을 다 밟아 본 셈이다. 그러나, L’anse aux Meadows는 최북 극점보다도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뉴펀들랜드에 있는 두 개의 UNESCO 지정 자연문화유산 중 GROS MORNE 국립공원과 더불어 세계 문화 유적지라는 것으로 여기로 올 계획을 세울 때부터 반드시 가 보리라 작정한 곳 이기도 하다. 여기가 세계 자연 문화 유적지로 지정받은 사유는 다음과 같다.
L’anse aux Meadows 세계 문화 유적지
1960년 초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탐험가인 Helge
Ingstad 가 Vinland 연구차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빈랜드란 포도나무가 자라는 따듯한 땅이란 의미로 추운 지방 특히, 노르웨이 바이킹족들이 찾아 헤매던 땅이었다) 마을 주민에게 혹시 근처에 파도가 얕고 완만한 구릉지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주민들이 그를 예부터 존재했던 주거지 터로 안내해 주었다.
이 근방이 해변을 접한 그런 완만한 구릉지이다. 멀리 이번 탐험대장의 렌터카가 외롭게 한 대만 서 있다. 주민들이 알려준 주거지는 예전부터 “원주민 인디언 거주지”로 알려져 왔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Helge의 연구결과는 그것이 아니고, 약 10세기경 그린란드로부터 Vinland를 찾아 남하한 바이킹족들의 집단 거주지로 밝혀졌다. 물론 이 발굴과 연구에는 그의 부인이자 고고학자였던
Anne Ingstad와 캐나다 Pacs 협회의 지원으로 그들의 공동 발굴 작업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
내가 이 길을 따라 올라 가는데 첨 보는 야생동물을 만났는데 말 그대로 도로변 숲 속에서 풀을 먹고 있는 행색이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 모습과 흡사한 게 Homeless 그대로다.
위 사진의 무스는 새끼라 아직 뿔이 없는 모양인데 어른 MOOSE의 뿔이 이렇게 생겼다.
고속도로 올라가는 길에 짬짬이 경고 푯말이 붙어 있다. 작년에 무스와 충돌사고가 몇 건 있었다 하면서 운전자의 주의를 요하는데 미국의 야생 사슴에 대한 주의보 하고 비슷하다. 근데 이놈들이 추운 북부에 사는지 남부에서는 한 번도 못 보았는데 북부로 올라 갈수록 여기저기 숲 속에서 자주 눈에 띄는 게 동물의 천국에 온 것 같다. 미국처럼 시즌별로 사냥을 허용하는 모양이다.
L’anse aux Meadows로 올라가는 길은 진짜로 황량하다. 간간이 명승지(우리나라로 치면) 같은 곳에는 저런 푯말이 붙어 있는데 주로 초기 정착민들의 생활상을 이야기해 주는 곳이다. 여기는 초창기 뉴펀들랜드가 풍부한 대구 어장으로 명성을 날릴 때 겨울 거주지이었는데 강원도 황태덕장처럼 대구를 잡아 말리던 장소로도 유명한 모양이었다.
겨울 거주지로 1958년까지 100여 명의 주민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사진은 대구를 건조하는 모습으로 강원도 황태덕장과 비슷한 풍경이다.
해가 없는 흐린 날의 바닷가 모습은 그냥 이렇게 황량하다. 저 수평선 너머 새로운 땅인 Labrador가 있다고 한다. 사람과 차를 실어다 주는 페리보트가 있다고 하는데 …… 이번에도 삼천포로 빠져야 하는지?
이런 해안도로를 100킬로 혼자서 운전한다고 생각할 때 독자들은 이게 낭만적이라고 생각되나? 간간이 빗방울도 뿌리치고, 칼바람이 승양이 울음소리같이 하이톤으로 차창 틈새로 파고드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달리다 보면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 공즉시색이 아니고 공즉시공, 색즉시색. 머릿속이 그냥 텅 빈다.
올라 갈수록 산에 남아있는 잔설이 더 많아진다. 날씨도 변덕스럽다. 비를 뿌리다가 햇살을 비치다가…
오늘은 전부 회색이다. 길도 하늘도 산도 잿빛으로 우중충한 날이다.
이 길을 보니 그런 시가 떠 오르제.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여기서 몇 자만 바꿔치기하면 된다. “ 길은 외줄기 북도 삼백리, 파도치는 마을마다 휘모는 칼바람”
유빙(floating iceberg)을 구경하고
유적지에 가까이 가니 이 마을의 환영 표지에서 처럼 “바이킹 거주지로 가는 길목”이란다.
기름이나 채우려고 마을에 들렸더니 사진에서 보던 유빙을 보게 되었다. 이런 날씨에도 녹지 않고 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없어서 그냥 주유소에서 200미리로 댕겨 잡았는데….. 가까이 가서 크게 잡고 싶었다.
이건 다른 유빙인데 이제 거의 다 녹아 가는 모양이다. 뉴펀들랜드에서 보이는 유빙들은 대부분 그린랜드 서쪽에서 떠 내려오다 뉴펀들랜드 북동쪽으로 흘러 내려오면서 녹아 없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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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 않고 바닷가에 떠 있는 유빙과 산 구릉 사이에 남아있는 잔설이 마치 황산벌에서 나당 연합군을 맞는 계백장군이 이끄는 최후의 군사들처럼 뉴펀들랜드의 여름 장군 앞에 마지막 항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쓰러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텐데.
드디어 유적지로
이렇게 길을 따라오다 보니 마침내 유적지에 이르렀다. 너무 멀어서 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이킹 녀석들이 좀 더 따듯한 남쪽으로 내려와서 터를 잡았으면 내가 이런 고생을 좀 덜 했을 텐데…
박물관 들어가는 길인데 차는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 들어가야 한다. 오후 7시가 넘어서 인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어딜 가면 시간 맞추기가 힘들다. 다른 사람처럼 느긋하게 근처 모텔에서 자고 내일 오면 되는데 그건 내 타입이 아니다. 짧은 시간에 쉬지 않고 많은 곳을 돌아보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동판에 새긴 글을 읽다 보니 익숙한 이름이 들어온다. Leif Ericsson… 바로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시내에 세워져 있는 교회 hallgrim 앞에 서 있는 동상으로 바로 그때 그 사람이었다. 다시 만나 엄청 반가웠다. AD 1000년 경이니 약 1011년 전의 역사가 서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시내에서 제일 높은 교회로, 2010년 유럽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슬란드를 들렀다. 그때 수도 레이캬비크 시내 구경을 하다 Hallgrim 교회를 찾았다.
아이슬란드 이야기와 뉴펀들랜드 이바구를 종합해 보면, 그린랜드 서남부에 정착한 Ericsson이 무리를 이끌고 다시 vinland를 찾으러 갔다가 여기를 발견하고 거주지로 정했는데, 문헌에 의하면 원주민과의 불화로 다시 그린랜드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거주지는 그린랜드를 떠나 항해하다 내려오면서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땅으로 상륙하기에 알맞은 조건으로(얕은 파도와 낮은 구릉) 내려서 일시적으로 거주했던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Vinland를 찾으러 항해한 무리의 리더가 Leif Ericsson이라는 것이다.
위 동상 밑면에 새겨진 문구를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1930년에 미국 정부가 아이슬랜드 정부에 알팅그(Althing) 1000주년을 기념하여 이 동상을 기증한다는 것으로, 알팅그(Althing)는 아이슬랜드 말로 의회(국회)를 뜻하는데, 세계사에서 AD 930년에 세계 최초로 의회가 결성된 곳이 바로 아이슬랜드 레이캬비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최초 의회 결성 10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정부가 여기에다 동상을 세워준 것이다.
돌아보는 터가 제법 넓다. 시간상 다 돌아볼 수는 없고 해서 제일 높은 구릉으로 올라가서 그들이 상륙한 완만한 내만을 바라보니 저곳이다.
보아하니 수심이 얕고 파도가 적어 배로 상륙하기에 편리한 지형이다. Vinland라 생각하고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여기에 상륙하였을까.(사실은 Vinland 와는 거리가 먼 추운 지역이다)
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멀리서 보니 왼쪽 산등성에 사람들 몇몇이 서 있는 것 같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철판으로 단면만 만들어 세운 조형물이었다. 내가 보고 있는 방향이 100% 정면이다.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상하게 보인다. 여자가 있는 걸 보니 Ericsson 여친인가 집사람인가? 도끼 메고 있는 자가 Ericsson 같다. 그 근거가 아이슬랜드 동상에도 Ericsson만 칼과 도끼를 들고 있고 나머지는 칼만 들고 있기 때문이다.
구릉 위에서 내려다본 박물관 전경
그들이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의 앞바다.
구릉에는 푸른 이끼만 가득하고 추운 날씨 때문에 다른 식물은 볼 수도 없었다.
저렇게 돌아서 내려가면 당시 거주지를 복원한 유적지가 있는데, 날도 엄청 춥고 바람도 세고, 게다가 배까지 고파 더 이상 못 가겠다. 오늘 아침에도 야채 숲 하나로 때우고 점심도 거른 채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
공원으로 들어오기 전 마을에서 하나 눈 여겨봐 둔 식당이 있는데 살아있는 랍스트나 스노 크랩을 쪄준다고(Live Lobster & Snow Clab or Steam) 사람을 꼬시고 있었다. 유적지는 현장 사진만 몇 장 찍고 바로 밥 먹으러 마을 식당으로 달려갔다.
뉴펀들랜드 들어올 때 마른 국거리 몇 개 들고 들어왔다. 쌀을 못 들고 와서 그게 아쉬웠지만 중국쌀로
대신해서 밥알을 씹었는데 우리 밥맛 하고는 어림도 없었다. 지금까지 뉴펀들랜드로 들어와서 1주일 동안 딱 2번 사 먹었다. 첫날 공항에서 아침에 빵 하고 커피 사 먹었고, 두 번째는 맥도널드에서 빅맥으로 점심 사 먹었던 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굶던지 아니면 가지고 온 것으로 때웠는데, 거의 하루 1끼 내지 2끼로 버텨보았다. 단식 비슷하게 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힘들었다. 배 고플 때는 약간의 고통은 있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은 맑고 투명해지는 것 같아 그렇게 끼니를 건너 띄우고, 아침에는 깡통 숲 하나를 데워 국물 마시면 그것으로 족했다. 빵 자체도 먹기 싫었지만 여기서는 식당 구하기가 한국 농촌 총각들이 색시감 구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큰 도시( st.john’s)를 제외하고는 식당이 없다. 관광지는 아직 열 준비가 안되어 있고 지나치는 마을에는 그로서리 가게가 없는 곳이 태반이다. 어떤 때는 배고파 사 먹고 싶어도 파는 곳이 없다 보니 결국 내가 가지고 온 걸로 때우는 것이다. 근데 오늘 저 집은 Open이고 랍스터도 판단다.
이 집은 관광객 상대가 아니고 동네 장사하는 곳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랍스터를 주문했더니 살아 있는 것이 없어 관두고 Fish Lover Platter를 주문하니 연어, 대구, 이름 모를 소녀 이렇게 3가지 고기를 하나는 튀겨서, 다른 하나는 구워서, 또 다른 하나는 쪄서, 그리고 오징어, 버섯, 조갯살을 조금씩 튀겨서 얹어준다. 1주일 만에 포식자로 거듭 태어났다. 살아있는 랍스터를 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동네 어부에게 전화해서 알아본다. 마리당 파운드 조금 넘는 걸로 두 마리 부탁하니 몇 분도 안되어 어부가 쏜(화)살같이 가지고 왔다.
한 마리는 크고 다른 놈은 약간 적다. 그 다음 이야기는 내게 묻지 않아도 된다. 내가 유능한 조선시대 대숙수(남자 요리사)를 능가하는 조리사이니까 잘해 먹었다. 일단 하도 싱싱해서 꼬리는 날회로 치고 나머지는 간단하게 스팀으로 처리했다.
적포도주가 없어서 비싼 레미마틴의 안주로 바닷가재 꼬리 생회를 해서 한잔 들었는데, 꼬리가 아주
싱싱해서 그런지 씹히는 맛이 너무 쫄깃해서 금방 잡은 우럭 맛 하고 비슷했다. 가제 생회는 횟집에 가면 한 번씩 주기는 주는데 꼬리 부분이니 양이 너무 적어 한점 씩 맛보는 거다. 근데 이번에는 그걸 두 마리나 혼자 해 치웠으니 먹거리에서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다.
이것도 한 끼에 다 못 먹고, 두 끼에 걸쳐 겨우 처분했다. 사진을 보고 침 흘리는 독자에게는 되기 미안하다. 겨우라는 졸속한 표현을 사용해서. 스팀 한 것도 싱싱해서 그런지 살이 너무 부드러워 입에서 살살 녹았다. 미국 가게에서 파는 것하고 약간은 다른 것 같다. 유통기간이 있어 그걸 감안하면 산지에서 바로 먹는 것이 최고다. 이것으로 1주일 영양실조분을 바다가제로 훌훌 날려 버렸다.-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