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수도 리스본(Lisbon)
2009년 11월 1일(토) 맑음
원래의 계획은 살라망카에서 포르투갈 북서부에 있는 항구의 도시 뽀르토(PORTO)로 먼저 올라가서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리스본을 가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포르투갈 3대 도시가 리스본, 뽀르토, 코임브라 순서다. 리스본과 뽀르토는 항구도시인데 코임브라는 아니다. 코임브라에는 1290년에 왕이 만든 대학과 도서관 유물이 있고, 뽀르토는 항구도시로 흥겨운 정취가 있다고 먼저 다녀온 마드리드 민박집에서 만난 배낭 여행자가 알려주었다.
원래는 교육과 예술의 도시 코임브라를 경유해서 뽀르토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코임브라로 들어가는 길이 사고가 크게 났는지 근 1시간이나 길 위에서 죽쳤다. 풀어질 기미가 도통 안 보여 바로 리스본으로 차를 돌려 밤늦게까지 달렸다. 졸리면 휴게소에서 차를 세워 눈 좀 부치고, 졸음이 달아나면 운전대를 잡아 거의 새벽 2시경에 리스본 시내에 도착했다.
지도에서 보듯이 이베리아 반도 왼쪽 귀퉁이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도시도 리스본 - 포르토 - 코임브라 - 브라가 - 빠로가 대도시에 속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Coimbra에서는 공부하고(이 나라 최초의 대학이 여기에 있다), Braga에서는 기도나 하고(여기에 포르투갈에서 제일 오래된 가톨릭 교구청이 있다), Porto에서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리스본에서 즐기라고 한다.
리스본의 탄생
문헌상으로 리스본의 역사를 찾아보아도 분명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고대에 페니키아 인들이 trading post(무역 거래소) 거점으로 만든 항구 마을이 그 시초일 거라고 한다. 로마제국에 지배되면서 무역항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다가, 로마제국 말기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시 서고트족에게 이베리아 반도가 점령하면서부터 리스본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711년 사라센 이슬람 제국의 이베리아 반도 지배로 다시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아 약 450년 번성하였다가, 에스파뇰의 전신인 카스티유 왕국이 이슬람 세력을 축출한 1147년부터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았다.
포르투갈 왕국의 시초는 카스티유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1147년 이슬람 세력인 코르도바 공국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물리친 공로로 지금의 포르투갈 영토 일부를 포르투갈 백작령으로 하사한 것이 그 효시가 되었다. 진정한 포르투갈 왕국의 성립은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7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아폰소 1세가 1143년 사모라(Zamora)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출발된 것이다.
그렇게 출발한 포르투갈 왕국은 15-16세기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강력한 해양국가로 위상을 세웠다가 대를 이을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1580년 스페인의 속국이 되었다가 60년 후인 1640년에야 격렬한 투쟁으로 새로이 독립국가로 탄생하게 되었다.
리스본 시내로 들어가는 가는 길이 부산 영주동에 있는 산복도로처럼 산꼭대기서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으로 리스본시가 높은 산 중턱 아래에 형성되어 있었다. 시내 가까이 가니까 무슨 암모니아 오줌 찌렁내 비슷하게 짭짤한 냄새가 나는데 그게 코에 약간 익숙하였다. 기억을 더듬어 올라 가보니 그게 오랫동안 한국 홈타운 부산에서 나의 코에 익었던 부산 앞바다 짠 냄새란 걸 알아차렸다. 시내에 도착한 시간이 야심한 새벽 2시가 넘었는데도 야들은 잠도 없는지 삼삼오오 혹은 연인끼리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데 그때까지 전차나 버스도 운행하고 있었다. 어디 자러 갈 곳도 알아보지 않은 채 가로등 불빛도 휘황찬란한 거리 한 모퉁이에 차를 대놓고 리스본의 밤공기를 그들과 같이 즐겼다.
이른 아침 해가 조금씩 올라 오니 바다 안개(해무)가 조금씩 걷히면서 리스본 해안선 윤관이 서서히 눈앞에 전개되었다.
해가 솟아오르자 해안길이 환하게 열렸다. 해안도로가 바로 바다와 인접하여 얕은 파도가 바위에 가볍게 깨어지며 하얀 포말이 가느다란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사라지곤 하였다. 너무 이른 아침 시간대라 오가는 차나 행인도 없어 혼자서 이 모든 평화스러운 풍경을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차 뒷좌석에서 새비(새우)처럼 포즈를 취하며 토막잠을 잔 댓가일련지도 모르겠다.
Cascasis라고 하는 해안 마을
나도 잠이 없어 시내 야경을 구경하고, 해안도로를 따라 카스 케이시스(CASCASIS)까지 갔다. 리스본 중앙통에서 서쪽으로 해안선을 따라 도로가 이어져 있었다. 밤중에는 어두워 파도 깨어지는 소리만 들렸는데, 아침에 해 뜨고 보니까 한쪽으로 바다를 끼고 이국적인 야자수 가로수들이 깨끗하고 잘 정비되어 즐비하게 길가를 꾸미고 있었다.
해무로 끝이 보이지 않는, 붉은 끼가 있는 해변 사장에는 아침 일찍 찾아온 갈매기들만 아침 준비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아침 운동하러 조깅을 하는 주민들이 하나 둘 눈에 띄었고, 늙수그레한 강태공들은 긴 낚시채비를 마치고 해변가로, 젊은애들은 파도타기를 무리 지어 시작하였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일요일 아침을 여는 이곳 주민들의 아침 풍경이다.
땅끝마을이라고 부르는 Cabo da Roca가 여기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애석하게도 그때는 몰랐다. 말 그대로 몰라서 가서 보지를 못했다. 유럽 대륙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최단 서쪽 point로 세계적인 관광지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허접한 호카곶 사진이다. 몰라서 가보지 못했는데 관광 가이드북에 이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보통 땅끝마을이라고 부른다.
바닷가에서 얼쩡이다가 일찍 시내 관광하러 갔다. 오늘은 요점정리가 없어 여행책보고 중요한 것만 보려고 사전에 계획은 짜 놓았다.
모쉬데르 드 제로니모(Mosteito de DE Jeronimos) 사원이다. 마누엘 1세(1469-1521) 때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하여 향신료 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무역 수입을 얻자, 그 자금으로 지금의 사원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제로니모 사원을 향신료 사원이라고도 한다. 150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장장 170년 동안 공사를 하여 1672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리스본에 가면 우선 가 보아야 할 곳이다.
관광객들이 엄청 많다. 역시 일본 단체 관광객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에는 유럽 단체 관광객들로 이상한 언어(불어, 그리스 등 동유럽 계통)들로 통역하는데 간간이 영어 통역이 있는 그룹들도 있었다. 여기서는 가이드가 별로 필요 없는 이유가 볼거리에는 영어로 번역되어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천정을 감싸는 양식이 좌우로 아치 형태의 정확한 대칭으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다.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자랑하듯 건축 양식이 바다와 배와 관련된 형식이 많아, 범선의 로프를 말아 놓은 듯한 기둥, 바다에서 볼 수 있는 산호·조개 모양의 정식, 항해에 필요한 나침반 등 포르투갈 특유의 건축 양식으로 마누엘(Manueline) 양식이라고 한다.
사원 내를 둘러보면 기둥이나 천정을 섬세한 조각이나 부조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사원 내에 있는 아름다운 광장
사원 측면으로 길이가 약 300미터로 매우 길다
가이드 손으로 가리키는 것이 지구본 모형에 있는 세로줄인데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의미라고 한다. 사원내 조각내지 장식들이 거의 돌로 되어 있는데 그 솜씨가 세밀하고 치밀해서 우리 석굴암들과 비교해보니 우리 것이 정교함에 있어 쪼금 딸리는 것은 분명한데 저그는 15세기고 우리 것은 8세기이니까 시간상으로 볼 때는 우리가 한 수 위가 아닌가.
합장하며 누워있는 석관이 알고 보니 포르투갈의 문학 르네상스를 가져다 온 시인 루이스 드 까몽이스(Luís de Camões)의 것으로 돌 조각상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정교하다. 우리에겐 좀 생소한 인물이지만 포르투갈 최고의 고전 시인으로서 추앙받는 인물이라고 한다.
고고학 박물관
사원의 일부 공간을 할애하여 고고학 박물관과 해양 박물관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고고학 박물관은 전시된 자료가 너무 없어 허접하다. 내가 4유로 내고 들어갔다가 돈만 날리고 금방 나와 버렸다. 볼거리는 하나도 없고, 부서진 도자기 몇 점 전시해 놓고 있다.
해양 박물관
1962년 사원의 west wing을 해양 박물관으로 오픈하였다. 이 곳이 원래 사원의 예배실로 큰 모험을 떠나는 탐험대들이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 종교적 행사를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항해와 관련된 것들로 중세기 시대별로 탐험에 나섰던 sailing 보트의 모형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해양박물관도 역시 4유로 내야 한다. 사원의 서쪽 빌딩을 해양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박물관 내부 사진 찍지 마라고 하는데도 찍어도 별로 제지하지 않는 곳이 이곳이다.
전시된 것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배안의 황실 전용 주방과 침실이었는데 그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에 입이 딱 벌어졌다.
나무로 조각한 황실 휘장(emblem)으로 황실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표시이다. 이것을 배에다 떡하니 걸어 놓고 항해를 나선다면 선장부터 말단 수병까지 허리를 굽혀 <황공하옵니다>를 외치겠지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큰 파도와 풍랑을 심술궂게 휘저어면 저런 휘장도 별 수 없을 것 같다.
Monument to the Discoveries
포르투갈의 대항해시대에 해양개척에 이바지한 사람들을 기념해서 세운 탑으로 물가에 있는 해양공원에 세워놓아 시민공원 겸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 같았다. 포르투갈 해양사에 초석을 놓은 헨리 왕자
사후 500주년을 기념하여 1960년에 세웠다.
주요 인물을 소개하면
1. Henry the Navigator(1394-1460)
2. Afonso 5세(1432-81)
3. Vasco da Gama(1460-1524)
4. Pedro Alvares Cabral(1467-1520)
5. Fernao Magellan(1480-1521)
선두에 서있는 Henry는 왕자의 신분으로 새로운 뱃길 개척에 음으로 양으로 이바지한 인물로 통상 항법사 헨리로 불린다. 불확실한 항로 개척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주어 초기에 아프리카 서부 항로 개척에 큰 공헌을 하였다.
2번째 Afonso 5세 국왕은 신항로 개척을 요새 말로 하면 국가사업으로 지정하여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신항로 탐험대에 쏟아부은 인물이다.
3번째 인물이 Vasco da Gama로 1498년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가로질러 캘커타에 상륙하여 많은 향신료를 싣고 리스본으로 귀환하였다가, 1502년 다시 인도 항로로 인도에 가서 Goa를
비롯한 여러 해안 도시에 trading post를 신설하였다. 1524년 국왕으로부터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열병에 걸려 임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여
위에서 보여준 제로니모 사원에 잠들어 있다.
4번째 Pedro Alvares Cabral은 1500년 브라질을 발견하여 거대한 땅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삼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5번째는 우리가 잘 아는 마젤란으로 세계 항해사에서 최초로 지구를 한 바퀴 돈 항해사로 걸출한 탐험가이며 뱃사람이다. 잘 알려진 대로, 세계 일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필리핀에서 원주민과의 불화로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었다. 살아서 돌아왔더라면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이 제로니모 사원에서 영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른쪽 끝에서 두 번째 인물이 Diogo Cao라는 탐험가 겸 항해사인데 1482년 서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면서 서아프리카의 콩고강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로 발견한 강어귀에 사진에서 보는 돌 십자가(Padrao)를 세워 기독교 왕국의 면모를 보여줬다고 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새로운 뱃길을 개척하는데 왕족은 물론이고 항법사, 교회 성직자까지 동원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 대항해시대에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개척하여 그때는 스페인과 어깨를 겨루는 해양강국으로 무역으로 큰 부를 쌓은 국가였다.
대항해시대의 위대한 항로를 살펴보면 초기 15세기에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시작으로 해서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개척한 것이 눈에 띈다. 16세기 들어서는 항로를 더 연장하여 중국 광주와 마카오까지 진출하여 교역을 확대하였고, 1543년 마침내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 나가사끼에 상륙하여 일본과 통상의 문을 열었다. 이때가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한 막부시대로 포르투갈이 조총을 첨으로 일본 무사들에게 전해준 그 시기로 포르투갈 상선으로부터 조총 외 대포 제조법, 천문학 등 서양 학문과 기술을 수입하여 그로부터 50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만약 그때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으로 가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다른 방향으로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관광 가이드북에서 발췌한 사진으로 큰 도로를 건너 위쪽으로 제로니모 사원이 보인다. 기념탑 높이가 약 52m로 기념탑 꼭대기에서 잡은 폼나는 사진으로 나는 돈을 내고 관광 가이드북을 구매했으니 이런 발췌한 사진을 다시 찍어 여행기에 올리는 것이
저작권 침해 같은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벨렘 탑(Torre de Belem)
먼 뱃길을 나간 사람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세워놓은 석탑 건축물로 1515-21년에 완공된 탑이다. 원래는
방어 요새로 지어진 탑이었으나 나중에는 뱃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그런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위층에는 기도실도 있다고 한다.
선원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Virgin and
Child 상을 중앙에 세워 놓았다. 탑 꼭대기 4면에 세워놓은 작은 탑은 이슬람 건축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밸렘탑은 그런 *무어리쉬(Moorish)한 건축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무어인(Moor)이란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았던 이슬람계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특히 사막에서 거주하였던 아랍계의 베르베르족을 말한다. 그들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Moorish라고 하는데 500여 년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던 그들의 문화양식이 알게 모르게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그것에 녹아들어가 있다.
리스본 근교 볼거리
리스본 남쪽으로 Tejo 강이 흘러 대서양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남쪽과 분리되어 있다가 1966년에
현수교를 건설하여 연결시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유명 현수교인 금문교를 참조해서 건설한 약 1km 길이의 현수교이다.
1966년 완공 시 다리 이름이 Salazar 대교였는데 당시 독재 정치를 하던 독재자 Salazar 이름이었다가, 1974년 4월 25일 무혈 혁명으로 Salazar 체제를 축출한 뒤에는 혁명일을 기념하여 4.25 대교로 개명했다.
1966년 완공된 4.25 대교가 유일한 다리이다 보니 교통체증이 엄청나게 생겨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99년 리스본 북쪽에서 강을 건너는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고 대항해시대의 영웅 Vasco da Gama 대교라고 명명하였다. 13km 길이의 다리이다.
선착장의 세일보트. 시간 되고 돈 되면 해볼 만한 취미생활이다. 포르투갈은 유럽 국가 중에서도 해양강국에 속한다.
리스본 시내에는 유로파킹장이 없다. 미터기 없는 공공파킹장이 무료인데 실제로는 유료이다. 각 관광지 파킹 장마다 동네 본토인들이 관리하는데, 차 오면 수신호로 자리 알려주고, 나갈 때는 뒤차 막아주고 해서 서비스를 해주고 차도 완벽하게 지켜준다. 팁으로 동전 1유로 하나 주면 땡이다. 나도 아침에 일찍 사원 뒤편 동네 파킹장에 집어넣었다가 오후 4시에 나왔는데 차 지킴 서비스는 만점이다.
리스본 어느 부둣가의 허름한 주거지
아침 바다 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새들이 먼저 아침을 연다.
바닷가 공원인데 여름에는 장사하는 집 같다.
바닷가에 위치한 건물인데 군부대 같기도 하고. 아침 바다 안개에 희미한 윤곽이 고풍스럽다.
바닷가에 위치한 콘도 아파트.
절벽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음. 조심.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
지하도 벽면에 장식한 타일 벽화. 타일 한 장 한 장에 그림을 넣어 굽었다.
바다를 향한 언덕 위의 하얀 집
리스본 근처 바닷가.
유럽 여행하면 하나 좋은 게 입국심사 안 하고 들어 가는 것인데 유일하게 지랄같이 입국 심사하는 나라가 영국이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 들어가는 길목인데 이렇게 표지판만 있고 아무런 경계 표시도 없다. 게다가 차를 세우고 날 보자 하는 사람이 없어니 세상 편하다. 철조망 없는 국경선 찍는다고 차를 세워 놓고 문도 열어 둔 채로..... 바쁘다.-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