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고도 똘레도(Toledo)
2009년 10월 31일(금) 맑음
마드리드에서의 구경은 이틀로 끝냈다. 별로 본 것 없이 민박집 주인장이 요약해 준 엑기스로 눈과 머리를 채우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넘어가려고 서둘렀다. 길을 나서는데, 민박집 주인장이 똘레도(Toledo)는 볼만한 것들이 있으니 구경하고 가는 게 좋다고 해서 일단 똘레도로 방향을 잡았다. 마드리드 시내에서 남향으로 약 60km 떨어져 있다.
똘레도(Toledo) 도시의 역사
서기 250년경 로마제국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의 지도로 Toledo를 그 당시에는 Toletum으로 표시되어있다. 그러니까, 로마 지배를 받을 그 당시에도 번성한 도시는 아니었을지라도 Toledo 마을의 흔적은 찾을 수 있었다.
그 옛날부터 로마제국에 속한 변방의 도시 Toletum으로 있다가, 나중에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번성하다, 711년 사라센 제국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과 동시에 코르도바 칼리프국의 북방 요새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1085년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가 결국에는 이슬람 제국의 무어인으로부터 똘레도를 탈환하고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여 톨레도가 기독교왕국의 수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561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김에 따라 그 역할을 다했지만 이 도시의 성벽 안에는 오랜 기간의 복합적인- 이슬람, 기독교와 유대교 -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어 1986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가 되었다.
우뚝 솟아있는 요새가 있는 언덕이 해발 580m 높이로 이 근방에서는 제일 전망이 좋은 곳으로 세르반테스 언덕이라고 부른다. 왼편으로 똘레도 성당의 종탑만 보인다.
미국에서 파는 관광 패키지를 봐도 마드리드 관광코스에 똘래도 관광이 반드시 포함되어있다.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60킬로 내려가야 하는데 중세기 성곽도시로, 특히 성당이 아름답고 웅장해서 스페인 3대 성당(부르고스와 세비아 성당)에 들어간다. 원래는 7세기 로마 시대에 성당터가 잡혀 있었는데 전쟁으로 소실되어 새로 1226년 공사 시작해서 1493년에 완공된 성당으로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전체 성당 사진을 찍어 보니 알 수 있었다.
16mm Wide Angle 렌즈로도 한방에 다 집어넣을 수 없다. 어찌어찌해서 와이드 렌즈로 한방에 넣었는데 매끄럽지 못하다. 왼편 종탑(Bell Tower)을 여기 말로 La Gorda(The Fat One)라고 하는데 마을의 다른 집들의 지붕보다 약 90미터 높다고 한다.
키가 큰 꺽다리 아저씨 모양 그냥 눈에 확 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관람객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제일 많았다. 두 그룹이 각각 일본어 하는 가이드가 하나하나 설명하는데 조금은 나도 알아듣는데 100% 알아듣기에는 실력이 부족함을 느꼈다. 진작에 일어 공부나 더 열심히 했으면 하고 후회를 한 이유가 본토 사람들이 성당 내 전시된 모든 것들을 전부 본토 말로 되어 있어 눈으로 보는 것 말고는 알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영문판으로 된 관광가이드 책을 샀다.
성당 내에서 사진 촬영도 불허하기 때문에 책에 나와있는 사진 말고는 보여줄 만한 것도 사실은 없다.
성당 내부에 총 5개의 isle(복도)가 있다고 하는데 뒤벼봐도 성당의 면적에 대한 수치는 보이지 않고
크기로는 세계 5대 성당에 든다고 하는데, 그 세계 5대라 하는 성당이 뭔지 찾아봐야겠다.
가이드북에 이 성당에 있는 두 가지 보물 같은 작품을 소개하는데 다음과 같다.
대리석 재질로 조각한 작품으로 1729-32년에 조각가 Barciso Tome과 그의 아들이 공들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름은 <Transparente>라고 하는데 영어의 transparent과 같은 의미다. 조각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성인들의 모습을 좌우상하로 정밀하게 조각해 놓았는데, 보고 있노라니 글자 뜻 그대로 구원의 빛이 투명하게 투시되는 그런 느낌이 오는 것 같았다. 또 다른 하나의 보물은
Chapter House의 사방 벽화와 천장의 화려한 장식을 말하는데, 벽면 아래는 역대 교황들의 자화상을, 위쪽에는 돌아가며 예수님 생전의 설교와 십자가 처형과 죽은 뒤 부활의 모습을 벽화로 남겨 놓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화가 Enrique Egas와
Pedro Gumiel(*미알못해서, 이 양반은 낯설다)의
1504-12년에 작품으로 **무데하르(Mudejar)와 르네상스 기법이 뒤섞인 대표적인 그림이라고 한다.
Chapter House는 수도원이나 성당의 부속 건물 또는 방으로 전체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독서, 강연 또는 토론을 하는 일종의 회의장이다.
*미알못: 미술을 알지 못해서
**무데하르(Mudejar)양식이란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공존하는 가운데 12세기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발현하기 시작한 건축 또는 벽화 양식.
성당을 보고 나와 길을 따라 내려가니 중세기 유럽 성곽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내가 본 영화 중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그런 성곽 형태로 유럽 중세기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성당에 들어갈 때 한국인 단체 무리들이 나오는데 역시 배달민족답게 다른 그룹에 비해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서로들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 보곤 했다.
세계 4대 고도(古都)
Toledo도 꽤 오래된 도시이지만 그보다 더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싹튼 아테네, 전 유럽을 호령했던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 중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왕조의 수도였던 시안, 그리고, 이집트 문명이 이어져 내려온 카이로가 바로 세계 4대 고도(古都)이다.
그리스 아테네
기원전 7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아테나이(아테네) 가 출현하여 그 후 많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형성되었다. 고대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한 아테네는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알렉산더 대왕의 부친)에 의하여 정복당하여 도시 국가는 사라졌지만, 그 후, 로마 제국의 복속 도시로 성장하여 고대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태리 로마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이 건국 원년이니 약 2800년 지속된 고대도시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지역은 훨씬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형성된 고대도시로 아마도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중국 시안
중국 역사에서 시안을 수도로 정한 왕조가 가장 많고 그 기간도 가장 길다. 주요한 왕조만 살펴보면 하 -은-주로 이어오던 역사에서 기원전 11세기 서주(西周)를 시작으로 기원전 221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秦) 나라, 기원전 206년 역발산기개세의 항우를 해하의 전투에서 멸하고 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서한(西漢), 581~618년의 수(隋), 618~907년의 당(唐)까지 무려 1100여 년 동안 약 13개의 왕조의 튼튼한 수도였다.
이집트 카이로
나일강 하구에 자리한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수도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도 카이로에서 출발되었다고 한다.
사실 카이로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수도였던 룩소르나 맴피스보다는 훨씬 나중에 생성된 도시였지만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명실상부한 북아프리카의 수도로 자리매김을 한 옛 도시이다.
밥알을 씹을 수 있는 식당을 찾았다
점심을 찾아 헤매다가 발견한 곳이 Hong Restaurente. 엄청 반가웠다. 속으로 주인 양반이 홍금보 친척쯤 되는 모양이다하고 갔다. 중국인듯한 여급이 메뉴판을 갔다 주며 본토 말로 속사포같이 내뱉는데 속수무책이었다. 메뉴판 보니 100% 본토어. 여급에게 잉글리시 메뉴판 줄라 하니까 카운터에서 찾아 가지고 왔다. 눈에 속 들어오는 메뉴를 발견했다.
Shirimps with Chinese Bamboo and Mushroom. 맛이 환상적으로 진짜 성공적인 주문이었다. 그러니까 전 세계로 진출해서 이렇게 짱께 집을 운영하는 그들에게 감사하는 게 마땅하다. Hong은 홍금보 친척에서 따온 게 아니고 Hong Kong의 준말이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구글 지도로 최단 거리를 찍어 보았더니 630km에 6시간 정도로 나왔다. 중간에 다른 구경거리가 있는지 챙겨보니 Segovia와 Salamanca가 나왔다.
Segovia는 기타 하고는 아무 관계없고 이곳에 중세기에 세워진 성이 있는데 크지는 않지만 예쁘다 하길래 가는 길에 가보기로 하였다. 또 다른 마을으로는 Salamanca가 있는데 유럽에서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대학(1167년)과 케임브리지대학(1209)에 이어 세번째로 1218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렸던 알폰소 9세 왕이 살라만카 대학을 설립했으며,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이 대학 출신이라고 해서 지나가는 길에 한번 가 보기로 하고 먼저 세고비아로 향했다.
마드리드 교외를 빠져나와 북서쪽으로 길을 잡아 산길을 타고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혼자서 유유적 적하 게 차를 몰았다. 지나치는 차량도 드물고, 산길은 정답고, 넓은 들판에는 노랗게 잘 익은 메밀밭이 바람에 몸을 맡기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풍경이 더없이 평화스러웠다. 세고비아도 드르고 여기서 80킬로
미터 떨어진 Salamanca에도 들렸기 때문에 리스본까지 가는데 해가 살아있지 못하고 서산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Segovia Alcazar(세고비아 알카사르)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로마시대의 성터에 그 후 이 지역을 점령한 이슬람 제국이 요새화한 것을 그들을 축출한 기독교 왕국이 다시 개축한 것으로 문헌상 1120년 경이라고 한다. 그 후 궁전으로도 사용되다가 황실이 마드리드로 옮겨간 후에는 죄수 감옥소로 사용되었고, 1762년에 이 곳이 왕실 포병 학교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성안에 포병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원본 사진을 HDR 기법으로 리타치 한 것으로 뽀샵의 기초과정에 들어있다.
Emblem을 굳이 조선말로 옮긴다면 <상징 문양> 정도가 될 것 같다, 유럽 황실에서 각 왕조들이 상징하는 정신적인 신념이나 신조, 가문의 상징, 동식물, 무기, 문형이나 부호 등을 새겨놓은 휘장을 말하는데 그 하나하나에 심오한 뜻이 있다고 한다.
성의 내부는 무척 작다. 크기로는 똘래도성에 비할 수가 없다. 입장료 6유로이지만 성에 들어가서 성
TOWER에 올라가려면 추가 징수한다. 나는 올라가지 않았다.
성주 침실이나 주방 규모는 엄청 작은데 성문을 들어 올리면 *해자까지의 깊이가 약 100미터 이상이 되어 성문 다리에서 바로 아래를 쳐다보니 워낙 높아 현기증이 온다.
*해자(垓字)란 외부 침입자를 방어하기 위하여 성주변을 깊게 파서 물을 채워 놓은 큰 도랑을 말한다.
잘 생긴 이미지를 활용하여 연말연시 연하장으로 친구들에게 많이 날려 보냈다.
성안에는 조그마한 박물관이 있는데 뒤에 알고 보니 예전에 이 곳이 왕실 포병 학교여서 포병 관련 여러 전시물이 있는 박물관이다. 이런 기사 갑옷 등을 전시한 방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스페인 내전 등 근대적인 유물(대포, 총, 화약, 군복등)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똘레도 성당처럼 단체 관광객도 없어 별로 붐비지는 않았다. 40대 초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한국인 부부 2쌍이 모두 하나씩 등에 작은 배낭을 탄탄하게 매고 구경을 끝내고 나오고 있었다. 나는 마침 들어가는 중이었고, 그들은 나오니까 같이 구경할 기회가 없었다. 일본애들은 저그끼리 만나면 절대로 아는 척 안 한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가 한국인임을 알게 되면 반갑게 인사 정도는 잘하는 편이다. 일본인들의 아주 특이한 민족 특성 중의 하나다.
햇볕도 잘 들지 않고 흙도 없는 벽돌로 된 성안 마당에 모진 식물이 목숨을 이어 가고 있다. 성벽에 착 달라붙어있는 모습이 신통해 보인다.
세고비아성위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 작은 시골 마을이다.
세고비아 성 창의 문형이 참으로 특이하다. 이런 양식이 똘레도 성당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무데하르(Mudejar)양식이라고 앞서서 말한 적이 있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의 대포
세고비아 성안 광장으로 무척 좁다
세고비아 성의 스테인글라스 창문
세고비아 성 성주 침실에 걸린 문양으로 독특하게 카펫에다 수를 놓았다.
Salamanca에서 또 중국집으로
스페인에서 최고 오래된 대학이 있고 로마시대 때 건축된 수로(Aquaduct) 건축물이 볼 만하다고 세고비아 성을 구경하고 바로 살라망카로 달려갔더니 이 도시가 생각보다 무지무지하게 큰 도시라 길 찾는데 애를 먹었다. 허기져 중국집 찾아 이번에는 본토 말로 주문에 성공했다. 감바스콘뱀부이마베타스차이나 새우버섯 죽순 볶음)과 아구아(물).
가게 안에는 주인아줌마의 아들 두 녀석이 각각 테이블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서 무엇인가 둘 다 열심히 하고 있길래 곁눈질해 보았더니 큰 놈은 초등학교 4-5년 정도 돼 보이는데 오늘 학교 숙제하는 것 같고, 작은놈은 유치원 정도로 보이는데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간간이 형한테 뭘 물어보는데 중국말로 묻는 게 참 신기했다. 한 그릇 잘 먹고 저녁용으로 같은 메뉴인데 새우 대신 소고기로 해서 포장해서 들고 나오니 든든한 맴으로 나왔다. 시간이 없어 살라만카에서는 밥만 먹고 시내만 차로 둘러보고 리스본으로 향했다.
세고비아에서 살라만카로 가는 길이 마치 우리나라의 김해나 김제평야처럼 산 없는 평평한 곡창지대 같았다. 밀밭인지 누런 황금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갈 길이 먼 외로운 나그네의 맘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원래 예정은 살라만카에서 포르투갈 북서부 도시 뽀르토(PORTO)를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리스본을 가려고 했는데, 세고비아와 살라만카 두 군데를 다 빠지는 바람에 뽀르토를 생략하고 바로 리스본으로 가려고 코임브라(COIMBRA)로 말머리를 돌렸다.
거리를 계산해 봐도 여기서 400km가 족히 되는데 가다가 중간에서 자고 가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밤늦게까지 달려가야 할지 생각하다가, 중간에서 자면 내일 일어나서 꾸무대다 보면 오후에야 리스본에 도착할 것 같아, 그러면 이틀이 깨지길래 그래서 일단 밤늦게까지 계속 운전하기로 마음잡아 먹고 코임브라로 향했다.-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