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버해협을 건너 파리까지
2009년 10월 27일(월) 맑음
여행의 이유
여행을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제각기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성직자나 구도자라면 당연히 순례의 길을 떠나는 것이고, 다정한 커플에게는 로맨스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길일 것이고, 방학 동안 길을 떠나는 학생에게는 재충전의 기회가 될 것이고, 황금 같은 휴가를 내어 먼 길을 떠나는 직장인에게는 기름때같이 찌든 일상을 탈출하는 힐링의 찬스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상한 가슴을 부여잡고 먼 여행길을 떠나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흉악한 일상을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거나, 스스로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생살이의 밑바닥으로 내동 이쳐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다거나, 흔히 말하는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해 어서 빨리 지구를 떠날 궁리만 하는 사람들에게도 여행의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그 해 시월에 별 목적 없이 유럽으로 날아간 나도 그런 곪아 터진 가슴을 부여잡고,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이 가고 싶지만 스스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지고 있어, 혹시라도 낯선 곳을 다니다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사 - 예를 들면, 대서양을 건너던 비행기가 추락한다던지, 지불알타에서 북아프리카 모로코로 횡단하는 배가 전복한다던지, 독일의 무제한 고속도로인 아우토반(Autobanh)을 주행하다 당할 수 있는 차량 충돌사고같이, 내 의지하고는 전혀 무관한 사고사로 지구를 영원히 떠날 수 있는 찬스가 있을련지, 그런 불손하면서도 아름다운 상상을 조금씩 하면서 장도에 올랐다면 불량하지만 그것도 여행의 이유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열차에 차를 싣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의 포크스턴(Folkestone)과 프랑스의 칼레
(Calais) 길이 최단 코스로 총 51km인데 해저 길이는 38km이다. 열차로 도버해협을 건너는 시간이 약 40분 소요된다. 차만 싣는 전용 객차에 차를 운전해 들어가서 주차시키고, 차 안에 그대로 앉아 있으면 된다. 열차 밖으로 볼거리도 하나도 없이, 시멘트 덩어리로 된 해저터널 벽만 보일 뿐이다. 최고 시속 300km로 달릴 수 있는 초특급열차 유로스타(테제베:TGV)도 터널 안에서는 시속 160km로 제한되어 있다. 그래도, 페리 선박을 타는 것보다는 시간은 단축된다.
프랑스 칼레(Calais)의 역사
프랑스 땅 칼레(Calais)로 금세 넘어왔다. 여기서는 여권 보자는 뇬넘도 없이 - 히드로 공항의 흑역사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프랑스 칼레 땅으로 들어섰다.
칼레가 지형적으로 도버해협을 건너는 최단 마을였기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 발발된 영국-프랑스 간에 벌어진 백년전쟁(1337-1453)의 역사적인 한 장소가 되었다. 1347년 영국의 끈질긴 공격을 근 일 년간 막아낸 칼레가 결국 함락되었다. 칼레에 입성한 영국 왕은 그간 *존버 한 칼레 시민을 괘씸하게 여겨 전부 학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측근들의 조언으로 마음을 바꿔 시민 대표 6명을 뽑아오면 그들만 참수하고 나머지 칼레 시민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말을 들은 칼레 시민들은 대표 6인을 어떻게 선발할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상류 부유층에 속하는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다. 다른 시민들보다 그간 잘 먹고 여유 있게 살았으니 여한이 없다는 그럴듯한 변명을 입에 달았다. 그러자, 그를 이어 고관 관료와 부유층이 자발적으로 나와 6인 대표가 선발되었고, 영국 왕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걸고 포대자루 옷을 입고 처형장으로 끌려 나왔다.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청동 조각상을 1889년에 세계적인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만들어 칼레에 세워 놓았다] 처형하기로 한 6인의 대표는 당시 수태한 영국 왕비가 6인을 처형한다면 태아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왕을 설득하여 처형을 면했다고 한다. 이런 6인의 대표가 보여준 자발적 희생정신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로 귀족의 의무를 다한다는 의미이다.
*존버: 졸라게 버티다는 뜻이다
파리의 불야성도 시컨둥
칼레를 지나 계속 남하했다. 어느 곳에도 차를 세우지도 않고 파리를 목적지로 해서 내려갔다. 지도를 찍어 보니 칼레에서 파리까지 약 300km가 나왔다.
프랑스의 시골 풍경도 그렇게 별난 것도 없어 보였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좌우로 펼쳐진 풍경은
미국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좀 우스꽝스럽게도 영국 차로 오른편 운전석에 앉아서 우측통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긋난 시스템은 곧바로 불편함으로 이어졌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요금을 지불할 때 차를 왼편으로 정차시켜야 하는데
사람은 오른쪽에 앉아 있으니 돈이나 카드를 내밀 수가 없었다. 천상 차를 정차하고 오른쪽 문으로 열고 나와 차 뒤편을 돌아서 왼편에 있는 톨게이트 기계로 가야만 했다. 이런 것 말고도 영국 차로 유럽을 다닐 때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렌터카로 유럽을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절대로 영국에서 차를 렌트해서는 안된다)
오후 3시 넘어서야 칼레를 출발해서 직진으로 달려 내려가도 희황 찬란한 파리의 불빛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할 때는 벌써 해는 지고 땅거미가 꽤 몰려온 저녁시간이었다. 파리 같은 대도시에 이리 저리로 거미줄같이 갈라진 길이 어딘지 알 수도 없거니와, 대로로 잘못 들어섰다가는 밀리는 다른 차들 땜에 쉽게 빠져나갈 수도 없어 마음먹은 길로 운전하는 것도 힘들었다. 마치 초보 병아리 운전수처럼 모든 차들에게는 차선을 양보하고, 모든 행인들에게 건널목을 허용하고, 모든 모페드족들에게 뒷전으로 밀리고 있었다. 저녁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모든 큰길은 자동차와 모패드로 점령당하고 있었다. 담배를 꼬나문 모패드족들이 한눈팔 새도 없이 앞뒤 좌우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들과 접촉사고를 방지하려고 무수하게 브레이크 페달을 밟고 서행 운전을 하였다.
운전에 신경 쓰느라 파리의 불야성을 구경할 엄두도 미처 내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게도 많은 네온사인과 광고판 중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LG와
SAMSUNG의 광고 판뿐이었다. 너무나 익숙한 알파벳이라 그런지 다른 불어 간판보다도 눈에 쏙 들어온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파리의 초보 택시 기사처럼 손님도 못 태우고 이 길 저 길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칼레에서 파리로 내려와 파리 시내를 차로 헤매고 다닐 그때까지만 해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의욕이 전혀 없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귀차니즘으로, 히드로 공항에서의 기분 잡침과 아무런 뜻도 없는 여행으로 나중에 남겨 두고 볼만한 것들을 찍을 여유와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도 오늘 밤 어디에서 피곤한 육신을 뉘울 장소가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미국에서 인터넷으로 찾은 한인 민박집을 Navi에 입력시켜 보았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세계 주요 대도시나 관광 도시에 있는 한인 민박 리스트가 <민박 다나와>란 사이트였다. 국가별로 도시별로 정연하게 수록되어 있는 민박집 리스트였으나, 등록만 해놓고 영업을 하지 않은 민박집도 태반이었다. 불어로 된 주소를 네비에 집어넣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한두 군데 집어넣고 찾으러 나섰다가 곧 포기하여 버렸다. 전화 통화라도 되면 어디 근방인지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유심칩도 없는 전화기는 Wifi 없이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수라장 같은 대도시를 벗어나고 싶은 맘이 꿀떡 같았다. 머리 한 구석에는 빨리 사하라 사막으로 가자고 재촉하는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어, 그래 밤을 새워 남쪽으로 내려가 스페인 남쪽으로 길을 잡아 지불알타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가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곧 미련 없이 파리를 떠나 남쪽 길을 찾아 환한 달빛을 벗 삼아 눈을 부릅뜨고 핸들을 야무지게 고쳐 잡았다.
파리의 명물들
이번 여행길에서는 런던과 파리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은 귀차니즘에 푹 빠져 추억을 남길 여유와 이유가 없었다. 다행이랄까, 그다음 해인 2010년 Around the World라는 기치를 내걸고 세계를 한 바퀴 도는 비행기 티켓을 한꺼번에 묶어서 저렴하게 파는 여행사를 알아 두 번째 장기 배낭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그 일정 안에 프랑스 파리가 들어있어 그때는 열심히 발품 팔아 찍어 논 사진들이다. 2010년 배낭 여행기를 미리 보여주는 셈이다.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파가 혁명에 성공하여 러시아 제정시대가 막을 내리고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들과 함께 총살에 처해진다.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가 바로 이 다리가 이름을 얻은
알렉산드로(알렉상드로) 3세로 1896년에 시공하여
1900년 프랑스 만국 박람회에 맞추어 완공한 파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다리로 손꼽힌다. 왜 그의 이름이 다리에 명명되었느냐 하면, 당시 유럽 정세가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서로의 실리에 의해 동맹을 맺어 대항하였는데 프랑스와 러시아가 동맹국으로 독일에 대항하였기에 프랑스에서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렉산드로 3세 치하에서 레닌의 맏형이 알렉산드로 3세의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처형당했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나콜라이 2세 가족을 처형하였으니 형의 복수를 그 아비의 아들에게 한 셈이 되었다.
앵발리드는 루이 14세가 전쟁에서 다친 부상병과 퇴역 군인들의 요양소로 건설된 건축물로 1671-1676년에 완공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부는 퇴역 군인들의 요양소로 이용되고 있고, 바로 옆에는 군사 박물관이 있어 2차 세계 대전시 사용되었던 각종 총기와 대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교회 안에 나폴레옹과 그의 왕비 조세핀 유해가 잠자고 있다. 1821년 두 번째 유배지인 세인트 핼레나 섬에서 영면한 나폴레옹의 유해를 1840년에 여기 Dome Church로 이장되었다. Dome Church는 앵발리드가 완공된 뒤에 부속건물로 설계되어 주로 왕실 가족의 무덤으로 이용되었다.
1672년 베르사유궁이 완공되자 루브르궁은 왕실의 수집품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게 되어, 1190년 처음에는 성채로 건축되어 그 후 궁전으로 승격하여 약 500년간의 소임을 다하고 궁전이란 이름을 떼게 되었다. 그 후 루브르궁은 왕실이 후원하는 예술가의 활동지로 파리 예술의 중심지가 되어 1692년에 왕립 아카데미가 들어섰고, 살롱전등이 개최되며 약
100년간 아카데미가 유지되었다.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은 1793년부터 시작하여 여러 회화와 전시품을 선보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마국의 메트로폴리탄, 영국의 대영제국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위상을 지키고 있다.
프랑스혁명 200년을 기념하여 1979년 공모작으로 선정된 유리 피라미드로, 루브르의 새로운 명물이 되고 있다.
알고 봐서 그런지 첫인상이 기차역 같았다. 1900년 만국박람회에 맞추어 오픈한 철도역이자 호텔이었다. 1939년 철도 영업이 중단된 뒤 방치되어 오다가
미술관으로 용도 변경되어 1986년에 개관하여 주로 19세기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1163년 알랙산더 3세 교황 때 시작한 공사가 170년을 거쳐 1330년에 완성된 고딕 양식의 중세기 걸작품이었다. Notre-Dame이 <우리의 귀부인>이란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서유럽을 통치하였던 프랑크왕국의 2대 국왕으로 샤르마뉴 대제 또는 카롤루스 대제라고도 칭한다. 서기 800년 프랑크왕국의 국왕이었던 카롤루스 1세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 대관을 받아 카롤루스 대제가 되었고, 이것이 후에 서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쪽으로 난 장미 문양 창문 스탠드 글라스로 중앙에 주님이 정좌하고 그 주위로 성자, 성녀 및 12 사도가 동심원을 그리며 앉아있는 형상이다.
혁명광장으로 불려지다가 1795년부터 현재의 이름인 꽁코드 광장으로 개명되었다. 바로 이 광장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1793년 루이 16세와 그의 반쪽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공개 처형되었다.
3200년이나 오래된 오벨리스크의 원래 주인은 이집트 것으로 고대 이집트 중왕조 시대의 수도였던
룩소르(Luxor)에 있었던 고대 유물이었다. 1831년
당시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던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인 무하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룩소르 신전 앞에 좌우로 서있는 오벨리스크 두 개를 선물했다고 하는데 상태가 조금 양호한 오른쪽 것만 가져왔다고 한다. 명백한 문화재 약탈 행위라 볼 수 있다.
진짜로 룩소르에서 뚱쳐(훔쳐) 왔는지 확인해 보려고 2010년 11월 카이로를 거쳐 기차로 룩소르에 달려갔다. 신전 앞에 가보이, 람세스 2세의 좌상 앞에 오벨리스크가 이빨 빠진 뭐처럼 볼품없이 하나만 달랑 서 있었다. 차라리 뚱쳐가려면 균형이나 맞추게 2개 다 가지고 가던지. 준 넘이나 그걸 덥석 받아가는 넘이나 그 나물에 그 밥으로 같은 비빔밥이다.
룩소르 가는 길에 기자(Giza)에 들러 이집트의 상징
물인 피라미드를 마주하였다. 그때 구경한다고 낙타 등에 2시간 올랐다가 사타구니 안쪽으로 생긴 파란 몽고반점 같은 피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카루젤 개선문과 같이 공사를 시작했으나 카루젤 개선문은 2년 뒤, 1808년에 완성되었으나 이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유배를 가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그가 죽고 난 뒤 15년이 지난 1836년에 완공되었다.
또 다른 개선문으로 나폴레옹이 1808년에 세운 것으로 루브르 궁전의 입구에 서있다. 일명 카루젤 개선문으로 불린다. 이전에 이 곳이 군사용 마장마술(Carrousel) 시합이 열렸던 카루젤 광장이라 그렇게 불린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모는 승리의 여신상은 원래 이태리 베네치아에 있는 마르코 성당 위에 설치된 조각상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집어 온 것이라고 한다.
신도시 라데팡스(La Defence)에 있는 문화 예술 복합단지에 1998년 완공된 현대식 개선문으로
높이와 측면 폭이 노틀담 성당의 그것보다 높고 넓다고 한다.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목적으로 건축한 박물관 및 전시장. 전체 지붕을 전부 유리와 철제로 만든 것이 유명하다. 여기에 소요된 유리 무게가 에펠탑 전체 철근 무게보다 500톤이 많은 8500톤이라고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그랑 빨래 한 블락 길 건너편에 있는, 역시 1900년 만국 박람회 전시장으로 건축한 건물이다. 현재도 주얼리, 시계, 회화 및 조각품 등을 전시하는데 17, 18, 19세기 별로 구분해서 전시하고 있다.
17세기에 건축된 파리 시청사로 1871년 화재로 전소되어 그 후에 재건하였다. 건물 외벽 곳곳에 장식된 조각상이나 치장물이 빼어나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하다. 옛날에는 청사 앞 광장에서는 사형수를 공개 처형하였고, 마녀 사냥같이 화형식도 이 곳에서 행하여졌다고 한다. 시장들의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곳이며 동시에 거주지로 살았다고 한다.
16세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된 아름다운 탑으로 1797년 파괴된 교회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순례자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만남의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복음 전도사의 상징으로 탑 꼭대기 네 코너에 사람, 사자, 황소와 독수리상을 각각 설치해 놓았다.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적인 바스티유 감옥터에 세운
국립 오페라 극장으로 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1989년 개관하였다. 한국의 정명훈 지휘자가 1990 - 1994년 동안 바스티유 국립 오페라 극장의 초대 음악감독으로 활동하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1789년 7월 14일, 혁명군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봉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7월 14일을 프랑스혁명 기념일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1830년 7월 혁명의 거사일인 27, 28, 29을 영광의 3일이라 하여 트루아 글로리외즈(Trois Glorieuses)라고 부른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당파와 이에 반대하는 공화당 파간의 대립으로 무장봉기한 혁명군이 3일 만에 왕당파를 누르고 새로운 7월 왕정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 역시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여 세운 탑으로 영광의 3일 동안 희생된 50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맨 위의 금빛 조각상을 <Genius of Liberty>라고 하는데 조선말로 <자유의 수호신> 정도가 되겠다. genius에 수호신이란 뜻도 있다.
1875년 완공된 국립 음악원으로 1979 좌석을 가진 오페라 하우스이다. 일층 벽면에 유명 음악가의 흉상을 걸어놓고 그 밑에 이름을 적어 놓았다.
여기서 포스팅을 안 해도 좋을 사진을 일부 올렸다.
사진 한 장 없는 여행기는 전문 기행작가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흉내 낼 수는 없는 법이다. 2010년 배낭 여행기에 올라갈 일부 사진들을, 사진을 못 찍은 죄로 눈요기 삼아 몇 점 올렸다. 첨부터 생각한 대로 사진 화보 같은 여행기가 될 듯하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