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의 추억(1)
2009년 11월 4일 (화) 쾌청
옛 궁전에 무슨 추억이 남아 있길래
스페인 여행을 갔다 왔다고 하면 알함브라 궁전을 보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 대부분이 궁금해하는 것이 궁전의 <추억>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란 묘한 이름을 달고 증강현실(AR) 게임을 소재로 한 한국 드라마가 젊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고 하는데 그 드라마 덕분으로 알함브라 궁전이 한인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서 아점으로 한 끼를 때우고 체크아웃한 후 바로 궁전으로 달려가니까 입장표가 1부, 2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아침부터 1시 30분까지 1부, 2시에서 6시까지 2부로 나뉘어 입장을 시키고 있었다. 2부 표를 사 가지고 시간이 남아 성 (궁전은 성 안에 있어 옛날 성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유네스코 지정 유적지가 된 모양이다) 외부를 1시간 정도 천천히 돌면서 사진을 몇 장 챙기고 2부 입장 줄에 섰다.
성 밖에서 중세기 추억 속으로
2부 입장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있어 성 밖으로 난 길을 걸었다. 유럽 중세기 전쟁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높은 성벽과 작은 조약돌들을 박아 만든 길을 걸어가노라니, 중세기풍의 갑옷과 투구를 걸친 기사가 긴 창을 끼고 말을 타고 따각 따각 말굽소리를 내며 달리는 장면이 머릿속으로 피어올랐다.
높은 성채의 벽은 성인의 키보다 6-7배 될쯤한 높이로 여러 모양의 크고 작은 돌로 축성되어 있었다. 성을 공략하는 게 쉽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전투가 이 길 위에서 치러졌을까? 성벽에 긴 사닥다리를 걸치고 필사적으로 기어오르는 병사와 성위에서 이를 저지하는 수비병의 치열한 사투가 머릿속으로 그려진다.
때마침 한줄기 빛이 음영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그 사이로 길의 한 부분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성채의 아치형 다리 밑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이 그때의 중세기 역사 속으로 한 발 한 발 들여놓는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근 800년을 이어온 마지막 이슬람 왕조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군이 지불알타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지금의 스페인 지역)를 통치하던 서고트 왕국을 굴복시켰다. 그리고나서, 711년 리스본과 코르도바를 함락하고 그들의 코르도바 공국을 설치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였다.
그때부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까지 이슬람 마지막 왕조가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 왕국을 통치하다 결국 연합한 기독교 세력에 모든 것을 물려주고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부귀영화와 아름다운 궁전을 버리고 훌훌 떠나야만 했던 마지막 왕국인 나스르(Nasrid) 왕조의 비애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알함브라 성채와 궁전은 1238년에 착공하여 1358년에 완공된 - 유럽풍과 이슬람 건축양식이 혼합된무어리쉬(Moorish) 기법으로 - 건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완벽하게 보존된 성채로 유명하다.
위 조감도에는 없지만 오른쪽 위로 연결되는 궁전의 후원 격인 헤네랄리페(Generallife)라고 하는 잘 조성된 별궁이 있다.
궁전 조감도에 내가 1번부터 7번까지 번호를 써놓았다. 중구난방식으로 보여주기보다 1번부터 주요한 볼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1. Patio de Arrayanes:
영어로 옮기면 Courtyard of Myrtle로 Myrtle이 도금양(운매화)이라고 하는 나무로 이런 나무가 많아 그렇게 명명된 모양이다. courtyard를 조선말로 옮기면 <안뜰>이 제일 적합할 것 같다. 아라야네스 안뜰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듯하다.
풀장은 아니고 연못으로 조성한 것 같은데 길이가 약 34미터, 폭이 7-10미터라고 한다. 사진처럼 맑은 날에 건물의 일부가 연못 위로 반사되는 것이 볼만하다.
후세의 건축학자들이 평하기를 알함브라 궁전의 건축미가 물, 태양, 공간배치와 장식, 이 네 가지를 마술적으로 각각의 특성을 조합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고한다.
정면에 우뚝 솟아난 탑 같은 외벽이 코마레스 탑이라고 한다. 저 위에 있는 사진 - 아라야네스 안뜰에서 연못을 전경으로 해서 코마레스 탑을 배경으로 잡은 사진이 알함브라 궁전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유명하다. 코마레스 탑 아래가 조감도 5번인 Salon de Embajadores로 <대사 접견실>이다.
2. Palace of Charles V:
스페인 왕국 통일의 기틀을 놓은 이사벨 1세가 1492년 알함브라 궁전을 이슬람으로부터 접수하였다.
그녀의 손자이자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카를 5세 때인 1526년에 아라야네스 안뜰 남쪽에다 그의 궁전을 르네상스식으로 웅장하게 신축하였다.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궁전 한쪽에 화려하게 새로운 궁전을 세운 것이다. 새로 지은 궁전의 건축 양식은 이전의 무어리쉬 양식이 아니고 르네상스 양식이었다고 한다. 이 궁전을 짓기 위하여 기존의 알함브라 궁전의 일부를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정복자의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은 새 궁전의 완성 후에는 결과가 어떠했을까?
새 궁전의 외형은 사각형 box 형태이지만 내부는 위 사진처럼 원형으로 되어 있다.
언뜻 보기에는 벽에 만든 장식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마차를 끌고 온 말들을 매어두는 고리라고 한다.
카를 5세 궁전 외벽의 벽공에 장식된 조각상
3. Patio de Leones:
열두 마리 사자상이 받치고 있는 분수대가 있는 안뜰로 이곳을 사자궁(Palace of the Lions)이라고
한다.
우상을 금지하는 이슬람 교리에 맞지 않게 이 곳에는 12개의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내려오는 이야기로, 이 지역을 점령한 초기 왕조가 이 곳에 터를 내린 유대인 12지파로부터 화해의 증표로 12개의 사자상을 받아 분수대를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사자상 안뜰>을 삥 둘러가며 124개의 대리석 기둥이 사자 궁전을 지지하고 있다.
4. Palace del Partal: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알함브라 궁전은 약 120년 동안 여러 이슬람 군주들이 그들의 취향에 따라 하나둘씩 완성된 복합 건물체로 그동안 7개의 궁전이 조성되었지만 지금은 3개의 궁전만 남아있다. 위 사진은 Partal 궁전으로 알함브라 궁전 중에서 제일 오래된 궁전이라고 한다.
키 큰 야자수가 옛 궁전의 운치를 더해준다
아라야네스 안뜰에 있는 연못처럼 직사각형 pool이 있고 좌우로 키 큰 야자수를 심어 놓았다. 화려한 다른 궁전에 비해 진짜로 궁전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매우 소박하다는 느낌이 물컹 풍기는 곳이었다.
5. Salon de Embajadores:
Embajadores(엠바해도레스)가 영어로 Ambassador로 <대사 접견실>이라고 하는데 이슬람 군주가 각국의 대사들을 접견하는 곳이라고 한다. 사방 벽부터 천정까지 매우 정교하게 장식해 놓았다. 23m 높이의 천정에는 8천 개의 삼나무에다 정교한 조각을 하여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7개의 천계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7개의 하늘이 우주를 의미하고 이것을 이슬람 군주(칼리프)가 통치한다는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교의 일곱 천계를 상징한다는 <대사 접견실> 천정의 조각들을 올려다보다 문득 불교에서 말하는 삼계(三界) 이십팔천(二十八天)이 떠올랐다. 삼계(三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총칭하는 것으로, 욕계에 6개의 하늘, 색계에 18개의 하늘, 그리고 무색계에 4개의 하늘이 각각 존재한다고 한다. 시나 소설에서 정신적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도솔천(兜率天)은 욕계에 있는 4번째 하늘을 말하는 것이다. 두 종교의 우주관을 이렇게 비교해보니 이슬람교의 그것이 불교의 우주관에 비할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종교의 우수성이 노름판의 끗발처럼 높으면 높을수록 좋겠다는 부질없는(?) 삐딱한 불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 <대사 접견실>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
1492년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군주 보알딜이 기독 연합군 이사벨 여왕과 그녀의 부군 페르난도 2세에게 항복을 한 곳이며, 또 다른 하나는 1492년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그의 든든한 후원자 이사벨 여왕을 알현한 곳이라는 것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교리 때문에 벽면을 글자를 형상화하여 장식하였다. 글자를 보아도 모르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어도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말로 알함브라 궁전 안에 약 9000개나 장식되어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Mocarabe 양식>
알함브라 궁전 중 일부 방에서는 모카라베 양식으로 장식된 천정이나 기둥들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석회 동굴에서 고드름 모양의 종유석이 겹쳐 보이는 형상이다. 마호맷 교조가 코란을 완성한 동굴의 천정과 벽을 형상화했다고도 하는데, 작은 벽감을 중첩하여 장식하는 기법으로 종유석으로 가득 찬 동굴을 연상시키는 장식 기법이라고 한다.
언뜻 보면 절에 가서 볼 수 있는 부처님과 오백 나한을 그려놓은 탱화를 보는 듯한데 탱화의 각각의 색들이 바래져 지워진 모습이다.
알함브라 궁전을 접수한 기독 연합군이 궁전 내부에 장식된 여러 형태의 이슬람 양식의 아름다운 건축미를 보고 차마 파괴할 수는 없어 그대로 보전시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의 무어리쉬(Moorish) 양식과 스페니쉬 양식이 혼합된 새로운 건축양식을 무데하르(Mudejar) 양식이라고 하는데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도들을 개종시켜 <새로운 기독교인>이라 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이슬람인을 모리스코(Morisco)라고 불렸다. 이런 모리스코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15-6세기경부터 무데하르 건축양식도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