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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Sep 21. 2021

지노 배낭여행기 - 지중해를 찾아서 26

산레모 가요제와 La Novia

2009년 11월 10일(화) 맑음

프랑스와 이태리 국경

모나코 몬테칼로를 조금 지나면 코닷쥬어의 마지막 마을 망통(MENTON)이 나온다. 바다를 끼고 있는 경치는 여기나 저기나 매 일반이다. 아름다운 바다를 끼고 항상 햇빛이 내리 비추니 정말 좋은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다.  MENTON을 지나면 이태리로 접어든다. 유럽 통합이 되어 하나 좋은 점은 이렇게 EU 나라끼리는 서로 입국심사가 없이 그냥 통과다. 내려서 여권 보여 주고 짐 검사하고 하는 나라는 EU이면서도 하는 나라는 딱 한 나라 있다. 영국이다. 그러니, 나도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자세나 입국심사에는 질려서 영국은 별로 가고 싶지 않은 나라다. 그런데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많은 여행객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국경 근처 휴게소

국경 근처의 휴게소다.  이태리 쪽인 것 같다. 저 노무 야자수 나무는 어디에나 있어 이국적인 풍치를 더 해주는 것 같다.



산레모의 아침 풍경

아침 해 뜰 때에 산레모 바닷가에 나가 보니 누런 햇살이 바닷가를 온통 황금색으로 물들인다. 파킹장에는 아침부터 차들로 붐비고 현지인들이 아침 운동 혹은 낚시 간다고 분주하다. 사진에서는 별 차이가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프랑스 국경 넘어와서 제일 처음 만나는 산레모 시내는 프랑스 거리보다는 조금 지저분하다. 산레모 시내에도 카지노 간판을 단 빌딩이 있는데 전부 다 오래되어 헐어 있고 영업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하기사 카지노 갈 바에야  30킬로만 달리면 몬테칼로가 있는데 여기서 할 이유가 없다.     



 

산레모 해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내가 프랑스 해변에 있는지 이태리 해변에 있는지 알 수없다. 그러나, 얌체 같은 프랑스 놈 들은 산레모까지는 코닷쥬어로 간주하지 않고 국경마을인 망통(MENTON)까지만 코닷쥬어라고 선전한다. 그러니까 프랑스의 코닷쥬어는 내가 지난주에 지나 온 스페인의 태양의 해변(COSTA DEL SOL)과 비슷한 세계적인 휴양지인 셈이다. 이태리에도 그런 세계적인 해변 휴양지가 있다.  나포리를 지나 옛날에 화산 폭발로 전체 시가 파묻힌 폼빼이를 지나면 쏘렌토도 있고 그 앞에는 카프리라는 아름다운 섬이 있다. 쏘렌토를 지나 남쪽 해안으로 45킬로 정도를 아말피 해안이라 하는데 세계 10대 혹은 7대 절경 중에 포함되기도 한다. 하여간 지중해 연안의 따뜻한 해양성 기후와  뛰어난 풍광으로 이 셋 나라는 모두 세계적으로 알려진 휴양지를 갖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제주도와 비교해 보면 거의 비슷한 개념이 된다.  



이태리 강태공

차를 타고 지나다가 언덕 위에서 보니 이태리 노인 한 분이 열심히 낚시에 몰두하고 있다. 물도 맑고 바위 근처 해안에는 쓰레기나 오물이라곤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시간 나면 저 남색 빛 물에 낚시나 드리우고 시름을 달래는 것도 운치 있는 여가 선용이 되겠다.   



   

     산레모를 빛낸 세기의 셀럽


별로 내세울 것 없는 도시들이 세계의 이목을 끈 유명 인사들이 그 도시에 거주했다는 사실을 홍보함으로써 도시의 이미지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국제 가요제 이전에는 별로 내세울만한 가십거리가 없었던 San Remo는 다음의 세계적인 셀럽을 소개하면서 도시의 이미지를 세계 속의 한 장소로 각인시키게 된다.


 - 알프레드 노벨(1833 - 1896)

알프레드 노벨

스웨덴 스톡홀름 태생의 발명가로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연구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거부 실록을 썼다. 4살 때 별 발명품도 없던 발명가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공장을 운영하며 기뢰와 지뢰를 제작하여 러시아군에 납품하였다. 아버지가 하던 공장이 잘 되어 노벨이 18세가 되던 1851년 미국으로 유학 가서 기계공학과 화학을 공부하였다. 1856년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쫄망하고 다시 고향 스톡홀름으로 돌아왔다. 10년 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특허를 내고, 계속 연구에 증진하여 1875년 무연화약인 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여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발명품 다이너마이트는 광산개발에 유용하게 사용되었으나 무연화약이 병기에 제작되어 인명을 살상하는데 마음이 아파 죽을 때 전 유산을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하여 그 기부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 제도를 설정하였다. 첨에는 화학상, 물리학상, 생리 및 의학상, 평화상, 문학상 5개 부문이었으나 후에 경제학상을 신설하여 총 6개 부문을 수상하고 있다. 발명품으로 부유해지자 고향을 떠나 독일, 스코틀랜드,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집을 구해 돌아가면서 살았다. 빅토르 위고는 노벨을 가리켜  <백만 달러를 가진 방랑자>라고 불렀다. 유럽 최대의 갑부임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발명으로 거부가 된 40대 이전까지는 연구로 결혼은 뒷전으로 미루었고, 20대 초반에 프랑스에서 어느 여자를 만나 마음을 주었는데 그 여자가 병으로 죽어 버리자 그 마음의 상처로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으로 살다가 1896년 12월 이태리 산레모 별장에서 여생을 마쳤다.



- 표트르 차이콥스키(1840 - 1893)

차이콥스키

이 세계적인 작곡가도 산레모와 인연이 깊은 셀럽이다. 원래 음악가는 계획에 없었던 인물로 우랄지방 시골 광산의 감독관인 아버지의 강요로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전근 가면서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1862년 러시아 법무부 서기로 재직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새로 설립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야간반에 입학해서 주경야독으로 음악에 전념하다 결국 공무원직을 팽개치고 음악학도가 되었다. 음악원을 졸업하고 루빈스타인 형제의 천거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법 교수로 재직하였고, 1877년 제자인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 후 즉시 별거를 하였고 이 후유증으로 신경쇠약 치료 차 러시아를 떠나 유럽을 전전하였다. 그런 외유기간에 프랑스, 이태리로 전전하다 산레모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런 이유가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결혼 못하면 죽겠다고 엄포 놓는 바람에 결혼은 했지만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는 동성애는 죄악으로 여겨 이것이 차이콥스키를 평생 좌절과 고독으로 몰고 가버려 이에 대한 탈출구로 술에 대한 폭음과 창작 활동으로

버텼다고 한다. 말년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 각지를 순회하며 연주, 지휘, 공연을 하였는데 정신질환과  조울증 증세는 호전되지 않아 1893년 8월 그의 마지막 교향곡 <비창>을 자신의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하고 1주일 후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세계적인 산레모 가요제


이태리 산레모 해변

산레모 하면 세계적인 깐소네 가요제가 얼른 머리에 떠 오른다. 우리나라의 남도 및 서도 민요처럼 이태리에도 지방별 민요가 있었는데 나폴리 지방에서 그들의 민요를 나폴레따나라고 불렸는데 우리가 잘 아는 산타루치아나 오 솔레미오가 나폴레따나다. 지금은 같은 이태리이지만 옛날에는 전부 지방 공국으로 분리되어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제노아 공국 등 자치 정권으로 되어 있었고 언어도 이태리어가 아니고 따로 나폴리 어가 있었다고 한다. 나폴리도 항구도시로 고깃배로 노를 저어면서 노동가로 시작된 그들의 노래가 삶에 위안을 주고 생활의 일부로 자연히 정착하게 되어 나폴리 사람들은 유난히도 노래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의 노래는 개인 혹은 단체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콩쿠르는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에 나폴리 근처에 있는 삐에리그로따라는 곳에서 열린 이태리 첫 가요제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나폴리 가요제의 맥을 이어받은 것이 산레모 가요제라 한다. 우리나라 대중가요를 흔히 뽕짝이라 하고 일본의 그것을 엔까, 미국 대중가요를 팝송, 프랑스 그것을 샹송이라고 하듯 이태리 대중가요를 깐소네라고 한다. 기후가 좋아 1년 내내 꽃이 피는 도시 산레모가 시를 홍보할 목적으로 1951년부터 가요제를 개최하였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규모나 명성에서는 이태리 국내가 아니고 세계적인 가요제가 되어 버렸다. 가요제 초기에는 한 가수가 여러 곡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한 노래를 두 명 이상의 경쟁자가 부른 형식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의  가요제는 5일에 걸쳐 진행되는데  기성 가수, 신인가수, 초청가수 부문으로 구분하여 다양한 음악을 즐기는 대규모 페스티벌로 발전했다. 가요제에서 우승자라는 호칭인 빈치또리(vincitori)는 기성부문 1,2,3위, 신인부문 1위에 한한다. 빈치또리에 오르면 1년간 부와 인기를 한꺼번에 쥐게 되어 노래하는 가수들에게는 출세의 지름길이라 말할 수 있다.   


난 지금까지 LA NOVIA란 노래가  산레모 가요제 입상곡인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보니 그게 아니다. 이 노래를 부른 TONY DALLARA가 1961년도에 히트한 노래이고 TONY는 1960년도에 다른 노래로 산레모 가요제를 수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NOVIA 뜻이 약혼자이고 LA는 정관사. 산레모 해변 사진이나 보면서 라 노비아 노래나 한번 들어보자.




    사랑이 뭐냐 하면 눈물의 씨앗


La Novia라는 노래는 이태리 깐소네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원곡은 1961년 아르헨티나 가수 Antonio

Prieto가 동명의 영화 <La Novia>라는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어 떠나보내는 사랑의 이별을 노래한 영화 주제곡이다. 그 해 이태리 깐소네 가수 Tony Dallara가 이태리어로 불러 세계적으로 히트한 가요로 한국에서도 엄청난 호응이 있었다. 연수로 보면 근 60년이 된 환갑에 접어드는 노래인데도 지금 들어 보아도 감미롭다. 가사 번역을 보니 예전에 나훈아가 부른 노래 중에 <사랑이 무어냐고 물어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대답하겠어요>하고 비스무리하다. 어긋나 버린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라고 탓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같은 맥락이다.


사랑은 눈물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내 사랑 떠나는 날까지

내 마음 돌아설 때까지

정녕 난 그대를 잊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 변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 떠나는 그날까지 난 잊지 못합니다

당신이 행복해 지기만을

성모 마리아께 기도합니다

언젠가는 그대가

내 품 안에 다시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지만

그대가 행복하기를 빕니다

그러나 내 사랑 그대가 내게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가실 줄 모릅니다

내 마음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내 사랑 떠나는 그날까지 난 잊지 못합니다

당신이 행복해 지기만을

성모 마리아께 기도합니다

성모 마리아여

성모 마리아여

성모 마리아여

성모 마리아여(1961)


작곡: 호아킨 푸리 에토

노래: 토니 달라라

연주(트럼펫): 지노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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