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바나 입성
2011년 8월 3일(수) 쾌청
처남 가족들의 근심 어린 환송을 받으며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로 향하는 뱅기에 올랐다. 뱅기는 바하마 항공 여객기로 비행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니 서울서 제주도 가는 정도로 가까운 길이다. 그러나 미국 국적자에게는 그리 쉽게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니 걱정 반 설렘 반이다. 미국 여행자들도 받아준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쿠바 여행을 금지하고 있는 미국이다 보니 맘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타고 보니 자리가 텅텅 비워있다. 나까지 해서 약 열너댓 명이 앉아있다. 지금은 더운 여름이라 비수기라 한다. 어디든 여행하기에는 비수기가 훨씬 낫다. 유명 관광지에는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법이니까. 그나마 비수기에는 유적지 입장하는 줄도 짧고, 식당이나 숙박 시설도 관광객이 몰리지 않아 구경거리를 둘러보는 것도 조금은 편한 법이다.
바하마 공항을 이륙해서 아래를 보니 바하마 여러 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바하마가 600여 개가 넘는 섬을 가지고 있다니 과연 섬의 천국이다. 뱅기에서 내려다보는 바하마의 커리브 바다는 청정함의 극치라고 치켜세우고 싶다.
해안선이 멀리 보이는데 위에서 보니 바다 밑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인다. 군데군데 보이는 검은 부분은 바다 밑에 형성된 암초 같아 보인다. 보면 볼수록 정말 맑고 청정한 커리비안 바다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가 현재의 바하마 제도 산살바도르섬에 상륙하면서 인도의 서쪽으로 착각하고 서인도제도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약 2주 후에 서쪽으로 항해하여 동년 10월 28일 역사적으로 쿠바 동쪽 끝 마을 바라코아(Baracoa)에 상륙하였다. 이 섬을 본인의 탐험대를 지원해 준 스페인 왕의 아들 이름인 <Juana>로 명명하였으나 원주민들은 계속 Cuba라고 고집하였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쿠바 섬에는 원주민으로 Guanajatabey, Siboney 그리고 Taino라고 하는 세 부족이 그들 나름대로 터를 잡고 생활하였다. 1510년부터 Diego Velazquez라는 스페인 탐험가가 본격적으로 쿠바를 식민지 하기 시작하자 원주민과 마찰을 빚어, 1511년 Hatuey라는 추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스페인 군대가 이를 제압하고 추장을 화형 시킨 사건도 있었다. 이즈음에 만들어진 식민 도시가 Baracoa, Bayamo, 현재의 수도인 Havana과 Trinidad 등이 있다. 그 후 근 400년 동안 남미의 여러 국가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식민지로 살아가게 된다.
쿠바 독립전쟁
1895년 2월 스페인 지배에 반발하는 민중 봉기가 일으나자 해외에 체류하던 혁명 지도자 호세 마르티(Jose Marti)와 막시모 고메즈(Maximo Gomez)가 연합하여 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혁명군을 인솔하여 쿠바 본토 동부 해안에 상륙하여 스페인과 전투를 개시하였다. 그로부터
3년간 쿠바 독립 전쟁은 산발적으로 진행되었으나 별 진전을 보지 못했으나 1898년 미국의 개입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미서전쟁 발발
1898년 2월 15일 당시 쿠바에 거주하던 미국 시민을 보호하는 명목으로 아바나항에 정박하고 있던 미 해군 메인호가 원인모를 이유로 폭발하여 약 270여 명의 미 해군이 수장되었다. 이를 빌미로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한 미국은 필리핀과 쿠바에서 스페인과 전투를 개시하여 그 해 4월부터 8월까지 미서전쟁을 일으켜 4개월 만에 스페인의 항복을 받아 당시 스페인이 거느린 식민지로 필리핀, 괌, 쿠바, 마리아나스, 푸에르토리코를 넘겨받았다. 이후 1902년 쿠바도 겉으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된 것 같았지만
미국의 내정간섭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어, 1903년에는 쿠바 본토 관타나모에 미국 해군의 기지가 설치되고 쿠바의 경제적 정치적으로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독립에서 혁명과업 완수까지
1902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경제적으로 미국 자본을 등에 업은 사탕수수 재배와 같은 단순 농업에 치중하다 보니 민중의 삶은 어려웠다. 토지가 미국 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이 독점하여 국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여러 차례 민중 봉기가 있었지만 미국의 묵인하에 철저하게 진압되었다. 그 후, 미국에 끈을 댄 쿠바 군부세력이 쿠바 공산 혁명이 완수된 1959년까지 쿠바를 통치하였는데 1930년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마차도가 10년간 통치하였고, 1940년 선거로 당선된 육군 중사 출신인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정권을 이어받았으나 반대파들을 탄압하는 정책으로 1944년 재선에 실패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세력을 키우다가 8년 뒤 1952년에 쿠데타로 다시 정권을 이어받아 미국의 비호 아래 군사 독재 정권을 이어 나갔다. 혁명의 불길은 1953년 7월 26일, 이 날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160명의 반란군이 산티아고에 있는 몽카다 병영과 바야모의 병영을 기습하였으나 실패하여 많은 당원들이 죽거나 체포되었다. 이때 피델과 그의 동생 라울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55년 감옥에서 석방된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동지들을 규합, 힘든 군사훈련을 통하여 혁명군의 전투 능력을 키워 나갔다. 체 게바라도 이 당시 쿠바 혁명군에 들어와서 뜻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1956년 12월, 82명으로 조직된 혁명군이 멕시코에서 배를 타고 쿠바 남동부에 상륙하여 근처 산림으로 울창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잠입하여 게릴라 전술과 농촌 농부들의 협조로 혁명군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957년부터 혁명군은 쿠바 각지에서 게릴라 전술로 산파적으로 바티스타 정부군과 대항하며 아바나로 진격하여 마침내 1959년 1월 아바나 대통령궁을 습격하여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을 완수하였다. 혁명 완수로 큰형인 피델 카스트로가 2011년까지, 그 후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바통 타치 하였고, 올해(2021년) 4월 전당대회에서 라울의 후임으로 비교적 젊은 미겔 마리오 디아스 카넬 배르무데스를 제1서기로 선출하여 쿠바의 새로운 미래를 짊어지게 되었다.(김 아무개처럼 부자세습을 하지 않아 다행이다)
가슴 벅찬 쿠바 입국
비행 줄곧 뱅기 창가에 앉아 청정한 카리브해와 눈 맞추고 놀다 보니 곧 아바나 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에 창밖을 보니 파도에 하얀 실선을 이어가는 쿠바 해안선이 눈에 들어온다. 공산 사회주의 국가 쿠바 영토로 들어온 모양이다. 북한과 비슷한 사회체제를 가진 나라로 가본다는 흥분과 가서는 안 되는 나라를 야매로 구경 가는 걱정이 솔직히 반반이었다.
뱅기가 서서히 아래로 기수를 떨어뜨리자 쿠바 땅이 점점 더 크게 육안으로 들어온다. 뱅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아래 땅들을 내려다보면…… 항상 멋지다. 처음 대하는 쿠바의 산천도 역시 그러하다.
한국 국내선처럼 트랩으로 내리면 버스가 와서 승객을 싣고 입국 심사 소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보니 우리가 타고 온 뱅기 화물칸에서 승객 소하물을 내리는데 머릿수를 헤아려보니 열 명 이상이 몰려와서 일을 하고 있다. 미국 같으면 한두 명으로 족할 정도의 일감을 저렇게 많은 인력이 필요한지 의심스러웠다. 이때 내 머릿속에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 이 나라는 인력이 엄청나게 남아돌아간다는 것이었다. 처음 이런 내 생각은 쿠바를 여행하다 보니 하나둘씩 증명이 되었다.
공항 이름이 호세 마티로 쿠바 독립의 영웅으로 국부 대접을 받는 쿠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가 호세 마티를 기념하여 작명한 것으로, 쿠바를 차차 구경하다 보면 자주 접하는 인물이다.
내가 지금까지 여행해 본 여러 국가 중에서 입국 심사를 제일 빨리 끝내 주는 나라가 여기 쿠바다. 관광객 전부가 15명인데 입국 심사대는 20 곳이 넘는다. 그러니까 줄 서서 한 명 한 명 입국 심사하는 게 아니고 각자 한 명씩 입국
심사원 있는 곳으로 찾아가면 된다. 쿠바 비자비는 25불인데 이는 바하마 공항에서 첵인할 때 내면 여권에 비자를 찍어 주는 것이 아니고(세계에서 미국만 쿠바 여행이 금지된 유일한 나라다. 그리고 미국 시민은 법적으로 쿠바 여행이 금지되어있고 이를 어기면 25만 불 벌금과 징역을 살게 되어있다) 별도로 운전면허중 크기의 비 자증을 준다. 그것만 잘 가지고 있으면 된다. 입국 심사원으로 가서 미국 여권을 내미니 약간 요상하게 쳐다본다. 미국 놈 코쟁이같이 생기지 않은 녀석이란 말이겠지. 일단 아바나 호텔 주소를 물어본다. 입국 심사 시 숙박지를 반드시 체크한다고 한다. 바하마에서 처남 고객인 바하마 현지인에게서 아바나에 사는 쿠바 본토인을 가이드로 소개받을 때 이 친구가 호텔 이름을 하나 적어 주길래 그 이름을 대니 아무 소리 안 한다. 그런데 개인 건강보험이 있어야 되니 쿠바에서 며칠 체류하는지 물어본다. 체류기간 동안 쿠바 건강보험을 사야 입국이 가능하단다. 쿠바는 자국민에게는 건강보험이 무상이지만 관광객에게는 무상으로 치료해 주지는 않는단다. 좀 속으로 찝찝하지만 별 군말 없이 규정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보험료는 하루 7-8 불선이니 비싼 것은 아니다. 일단 관광수입을 올려야 하는 쿠바 정부로서는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규정으로 보면 된다.
일단 아바나 시내로
아바나 공항에서 만난 쿠바 현지 가이드는 29세로 싱글. 직업은 중학교 체육선생(체육선생 치고 배가 좀 나왔지만 영어가 쪼매되니까 나의 가이드이자 통역이 되니 참으로 편하다)인데 현재 여름방학중에 나를 위해 사설 가이드하고 있다. 바하마에 있는 친구 말로는 차가 있다 해서 차를 가지고 공항에 마중 나오기로 했는데 오늘 차가 고장 나서 수리해야 한다고 내일부터 차를 가지고 올 거라고 날 애써 안심시킨다. 일단 택시 타고 시내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택시를 타고 아바나 시내로 들어가니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보니까 대중교통인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이다. 한눈에 보아도 그들의 대중교통이 부족해 시민들이 저렇게 옹기종기 모여있는걸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한 단면을 훔쳐보는 순간으로 이를 놓칠 수 없어 사진으로 남겼다.
시청사 뒤에 위치한 담배 제조 공사(국가경영)로 쿠바 최대 규모라고 한다.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도 가치가 있다고도 한다. 1845년에 설립된 국영 회사로 담배 제조상의 여러 가지 제조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를 앞세우고 들어 가보니 공장은 문을 닫았고 구내 시가 판매점은 외화벌이에 충실하여 늦게까지 문이 열려 있어 진열된 제품을 구경하면서 가격을 보니 보통 미화로 200 -400불 사이로 한 박스에 24개씩 들어있어 개당 평균 10-20불 사이의 고가 제품이라는 말이다.
20 불짜리를 둘둘 말아 연기로 날려 보낸다 하니 엄청나게 비싼 기호품이 아닌가. 그런데 쿠바의 진짜 질 좋은 시가는 아바나에서 서쪽으로 150 킬로 떨어진 피날 델리오(PINAR DEL RIO)라는 곳인데 담배농사에 적합한 기후 및 토양이 최적으로 최상품의 담뱃잎을 수확하여 수출 상품으로 제품화되어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로 팔려나가 외화벌이에 둘째 효자 아들쯤 되는 모양이다. 물론 첫 번째 효자는 나도 보태주고 있는 관광수입이고, 세 번째 효자는 사탕수수 재배로 설탕 수출이라고 한다.
매점에 진열된 시가들. 그리고 중앙벽 위에 걸어놓은 그림이 위에서 말한 PINAL DEL RIO 지방의 담배 재배 농가의 그림이다.
이를 조금 확대해보면 이렇다. 쿠바에서 최고의 시가를
양산하는 피날레스 지방은 씨를 뿌려 3-4달 재배하여 건조와 숙성의 단계를 거쳐 세계 최고 품질의 잎담배를 생산하는 지역이다. 그곳의 기후와 토양이 잎담배를 재배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전통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재배 기술이 뛰어나다고 한다.
예쁜 양질의 나무상자가 시가를 보관하기 좋은 적정 습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습도계가 달린 시가 보관함인데 가격을 들쳐보니 물경 미화 4-50불한다.
다시 한번 시가 상점 내부를 크게 한 장 더 찍어 보았다.
매점 옆으로 돌아가니 한 장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피델 카스트로(오른쪽) 옆에서 손뼉 치며 웃고 있는 영감이 있는데 MASTER TORCEDOR(또르세도르)라 한다. 또르세도르는 잎담배를 제조하는 장인에게 칭호 하는 명칭이라고 하니, 아마도 저 영감님은 쿠바에서 알아주는 시가 제조의 명인인 모양이다.
시가 가게를 나와서 걸어가는데 한 본토인이 가이드에게 뭐라고 하길래 뭔 일인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시가를 싸게 판다고 사라고 한단다. 가게 안 가격이 만만치 않아 살 엄두가 나지 않은 관광객에게 NICHE MARKETING 전술인 것 같다.
증기 기관차 야외 박물관
담배 제조 공사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니 다 낡아빠진 증기 기관차가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어 잽싸게 가이드를 데리고 들어갔다. 1800년 후반기부터 사용하던 중고 증기 기관차를 쿠바가 수입해서 사용하다가 그 수명이 다한 폐차 증기 기관차들의 박물관이다. 옛날 증기 기관차가 신기하여 여러 장 사진으로 찍었다. 빼빼 마른 관리 사무소 할배가 나와서 신이 나게 이게 독일제 몇 년도이고 저게 미국제 몇 년제이고 스페니쉬로 설명해주면 내 가이드는 거의 동초로 동시 번역해준다. 현지 가이드는 쓸만하게 일한다.
옛 증기 기관차 뒤로 시청사 꼭대기 건물이 보인다.
1920년 9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제조된 미국 증기 기관차. 복원하면 지금도 달릴 수 있다고 자랑한다. 여기서 미제를 만나니 이도령 춘향이 본 듯 기쁘다.
자세히 보면 1920년 9월 미국 필라델피아 볼드윈 기관차 제조창에서 생산되었다고 찍혀 있어 영감님이 구라 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디서라도 구라를 치면 안 되지.
1870년대 독일 증기 기관차.
옛날 초기 증기 기관차 모형. 오른쪽과 왼쪽 통이 증기 압력통으로 여기서 나온 증기 압력으로 양쪽 바퀴를 굴려가게 하고, 중앙의 큰 통이 석탄 등으로 물을 가열시키는 가열 통이다-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