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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Aug 01. 2021

지노 배낭여행기 - 바하마 그리고 쿠바 8

헤밍웨이 추억을 찾아서

2011년 8월 5일(화) 맑음


        꼬히마르 어촌을 찾아서


큰 기대없이 왔지만 이왕 쿠바에 왔다 생각하니 시간되는대로 다 보고 가고픈 맴이 꿀떡인지 굴뚝인지 들어 가이드를 미제 달러에 볶아가며 여기저기 다녀본다. 확실히 개인 가이드가 있어면 능률이 오른다. 수험볼 때 쪽집게 과외선생이 해 주는 것처럼. 그중에서도 훼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었다는 꼬히마르(COJIMAR)를 가 보자고 하니 가이드왈 진짜로 볼 것 없다고 우기면서 가지 않으려고 한다. 해고시킬까 하다가 다른 아는 놈도 없고 해서 달래 가지고 저그 쌍디(쌍둥이) 동생 똥차타고 나까지 세명이 찾아갔다.


꼬히마르 근처 바닷가

첫번째 잘못 찾아간 꼬히마르.  가이드들이 알아서 찾아 갔는데 꼬히마르 해변은 맞는데 찾고자하는 훼밍웨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꼬히마르 해변의 방가로

두번째로 잘못 찾은 꼬히마르. 해변에 널브러져 있는 철지난 방가로만 우리들을 반겨주었다. 꼬히마르 해변이 생각보다 넓게 퍼져 있었다.



  

훼밍웨이 기념탑과 요새

세번째로 맞게 찾아가니 훼밍웨이 기념탑 그리고 바다를 감시하는 군바리 요새가 있었다. 요새 뒤로 돌아 가 보니

항구인 관계로 출입 어선을 감시하는 군인들이 요새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 옆 원형의 기념탑 중앙에 훼밍웨이는

그 무덤덤한 얼굴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고, 배를 대는 선착장에는 현지 강태공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꼬히마르 선착장

꼬히마르 선착장에 배는 한 대도 보이지 않고 현지 주민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해 준 말이 맞는지 물가에서 배를 보기가 힘들었다. 배를 타고 바다건너 자유 세계로 탈출하기가 용이해서 그렇다고 한다.



    

훼밍웨이 흉상

집에서도 좀 떨어진 여기 꼬히마르를 자주 찾아 가난한 어부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작품 구상을 하였던지 <노인과 바다>로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에도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이 상은 내 개인이 받을 상이 아니고 쿠바, 그리고 나의 절친한 꼬히마르 주민들에게 바치는 상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로부터 느낀 것으로 이 소설을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꼬히마르를 사랑했던 할배는 1960년(쿠바미사일 위기가 고조되던 해)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플로리다 남쪽 끝 키웨스트에서 살다 다음해 1961년 아이다호주 별장에서 63세의 일기로 평소 사냥하면서 즐기던 엽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더 이상 즐기만한 인생의 묘미가 없었던 걸까. 청새치 낚시도, 메밀밭의 포수꾼같은 사냥재미도, 글쓰는 재미도 잊어 버렸는지, 아니면 작품 구상의 한계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만점 정답을 찾은 것인지 구구절절한 그 사연을 우리들이 어찌알리요마는 그의 흉상을 보고 있자니 그 염화시중의 미소가 우리 모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같다.

“더 길게 살아봐도 별볼일 없대이."        


삐암꼬리: 위 흉상을 세워 훼밍웨이의 지극한 꼬히마르 사랑을 표시하려고 하였으나 가난한 어촌 마을이라 그러지 못하다가, 마을 어부들이 한두명씩 폐선에서 가져온 쇠덩이 닻을 모아 그 쇠를 녹여 위의 훼밍웨이 흉상을 제작했다고 하는 뒷담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꼬히마르 어부의 실제 경험을 소설화


안소니 퀸이 주연한 1990년도 영화

아바나 교외에 거주할 때 자주 꼬히마르 어촌의 어부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입심좋은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도 많았고, 그들에게서 들은 이바구도 있었는데 당시 이 마을의 50살 먹은 어부 그레고리오 푸엔테로부터 그의 경험담을 들었다. 53일동안 고기를 못잡다가 겨우 큰 놈 6마리를 잡고 돌아오던 길에 상어떼를 만나 모두 잃고 앙상한 뼈만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헤밍웨이는 그것을 소설로 쓰고 싶다고 해서 그레고리오는 저녁 한끼 대접받고 허락을 하였다고 한다. 요새 말로 하면 저녁 한 끼로 지적 소유권 이전이 완료된 셈이었다. 1952년 소설이 발표되어 세상의 주목을 받고 그 후 1954년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하자 헤밍웨이는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당시 노벨 문학상 상금이 정확하게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심성도 착한 이 작가가 꼬히마르의 그레고리오를 찾아와 상금의 일부분으로 미화 2만불을 내놓자, 그레고리오는 정색을 하며 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헤밍웨이는 “이 돈은 나의 성의다. 내가 받은 상금의 푼돈에 지나지 않으니 받아도 된다.” 하면서 돈을 억지로 주고 갔다고 한다. 당시 미화 2만불은 미국 평균 노동자의 7년치 급료와 맞먹는 대단한 금액으로 쿠바 화폐 가치로 따지면 수십배(지금은 20배)는 될 성 싶다. 2만불을 받은 그레고리오는 배 사고 집사고 해서 호사를 누리다가 2002년 10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꼬하마르 요새

폼나는 군바리 요새. 모로 요새처럼 아바나시 교외를 방어하는 성으로 축성되었다.



꼬히마르는 모로 요새가 있는 말레꼰 해변에서 수중 터널을 지나면 갈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훼밍웨이는 34살되던 1932년에 여기 들렀다가 MARLIN(청새치) 낚시에 재미를 붙여  그 맛을 잊지못해 1939년 아주 아바나로 이주했다. 처음에는 호텔에  장기 투숙하였다가 (그 호텔 방에 문패박아 놓고 돈받고 보여준다) 아바나시 교외에 집을 구했는데 지금 그 집은 할배 유품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되어있다. 그렇게 호텔에서 술집으로 다니면서 잘 노신 덕에 지금도 아바나 구거리에 가 보면 할배 이름 팔면서 장사하는 집이 많다. 나도 하나 찾아서 사진 박아 왔다.



할배가 즐겨 찾았다는 술집. 간판으로 할배 사인을 멋드러지게 붙여놓고 장사한다.


1817년에 지었다는 식당건물.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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