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광장과 호세 마티 기념탑
2011년 8월 6일(토) 맑음
아바나 혁명광장
아바나에 가면 시내 관광 코스에 꼭 추가되는 장소가 여기 혁명광장과 호세마티 기념탑이다. 혁명광장은 이전에 바티스타(BATISTA) 독재 정권 시 1952년에 만들어져 시민광장이라고 불렸는데 혁명 성공 후 1959년부터 혁명 광장이라고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에는 국립극장, 내무부 청사(혁명 성공 후 체 게바라가 집무실로 사용하여 빌딩 외벽에 그의 얼굴 형상물이 부착되어 있다), 종합 정부 청사 등 여러 관공서 건물이 들어서 있다.
기념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정부 종합 청사로 이 안에 카스트로 집무실을 포함하여 여러 행정부 사무실이 있다고 한다.
쿠바 혁명기념일 축하 행사장
이 혁명 광장이 관심을 끄는 것은 쿠바 혁명 기념일인 7월 26일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군대 행진 등 여러 가지 공식 축하 행사가 있어 많을 때에는 백만 명 이상의 관중이 모여 혁명 기념일을 축하하였기 때문에 이 날을 구경하러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여기서 7월 26일이 왜 쿠바 혁명 기념일이 되었는지 알아보면 이렇다. 실제 혁명 성공일은 1959년 1월 1일로 체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는 아바나로 입성했고, 피델 카스트로는 동부에 있는 산티아고로 입성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 날을 기념일로 잡지 않고 그 전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가 주동이 되어 산티아고의 몽까다(MONCADA) 군영을 습격한 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이 날을 택해서 거사를 일으킨 사유는 이 날이 쿠바의 국부 JOSE MARTI의 탄생 백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는데 이런 대규모 관중 모임을 이용하여 정부군 눈을 속이면서 작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7월 26일이 혁명 기념일이 된 사유다. 이 거사가 실패하여 피델과 동생 라울은 투옥되어 2년 정도 콩밥 묵고 많은 사람들의 탄원으로 1956년 5월 가석방되어 뜻을 같이한 동지들과 멕시코로 망명하게 된다. 그곳에서 풍운아 체 게바라를 만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GRANMA로 82명의 게릴라 반군이 1956년 12월 2일 쿠바 남동부 연안 PLAYA LAS COLORADAS 곳에 상륙하였는데 원래 목표는 여기가 아니고 조금 위쪽 NIQUERO였는데 항법사 실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의 신고로(당시 쿠바도 옛날 우리처럼 간첩이나 수상한 사람을 신고하면 포상금 제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 추측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부군 억압에 눌러사는 주민이 신고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정부군 공격을 받아 많은 동지가 사살되고 겨우 20여 명이 근처 험준한 산악 지대인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A MAESTRA) 산속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게릴라 양성하여 약 2년 뒤에 혁명 과업을 달성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여담으로 피델의 대선배 모택동과 비교해 보면 한마디로 잽이 안된다. 제2차 국공 합작이 깨지고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개석 국민당의 추격을 피해 1934년 시작된 홍군의 대장정은 장장 2만 5 천리다. 그에 비해 피델의 장정은 겨우 1000킬로미터 정도니 2500리다.
쿠바의 피델 혁명군이 모택동 홍군의 대장정에 비하면 10분지 1 정도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그리고 가이드를 데리고 현대 액센트로 CUBANA 지방으로 내려간 JINO의 장정은 시간이 없어 피델의 2500리를 현대 액센트로 하룻 밤샘으로 주파했다는 사실과 그 장정을 모택동의 증손 손녀쯤 되는 CHINO ESTUDIANTES(중국 학생)과 같이 끝냈다는 것도 역사적인 사실로 쿠바 현대사에 기록될 수도 있다. 세세한 CUBANA JINO의 2500리 대장정은 나중에 자세히 까발린다.
왼쪽으로 체사령관 흉상이 보이는데 오른쪽에 보이는 흉상이 CAMILO CIENFUEGOS 사령관인데 피델과 함께 혁명 게릴라 3 총사다. 우리에게는 체사령관보다는 덜 알려진 인물이지만 여기서는 피델과 체와 같은 동급이다. 실제 사진 보면 인물도 좋고 신출귀몰한 게릴라 전투로 신화적인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1953년 7월 26일 산티아고 몽까다 병영 거사에 피델과 함께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피델과 라울과 같이 2년 콩밥 먹고 풀려나와 모두들 멕시코로 망명 갔다가 나중에 혁명과업을 완수하였다. 혁명 후 요직에 오래 있지 못한 이유는 같은 동지중 배반자를 체포하려 지방 도시 까마구웨이로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사고로 1959년 10월 사망했다. 혁명 포스트에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체 게바라와도 멕시코에서 처음 만나 서로의 깊은 동료애로 혁명 과업에 참가하였고, 씨엔푸에고스가 비행기 사고로 죽고 난 후 태어난 체 게바라 아들의 이름을 그를 추모하여 CAMILO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른쪽이 체, 두 번째가 시엔푸고에스, 세 번째가 가이드가 알려주는데 처음 듣는 이름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아니고 우리가 모르는 다른 혁명 전사다. TODO POR LA REVOLUCION는 <모든 걸 혁명을 위하여 쏟아부어라>라는 표어다. 북조선의 김 씨 3대가 늘 하는 이바구다.
호세 마티 기념탑
18 미터 높이의 대리석상이다. JOSE MARTI(1853-95)는 지식인으로 쿠바 독립을 위하여 민중의 자각을 일깨워준 인물이다. 1853년 아바나에 출생한 호세는 시, 수필 등 글을 통하여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당국으로부터 국외 추방을 당하여 미국, 멕시코,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등을 전전하면서도 붓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895년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기념탑 1층에는호세마티의 기념관으로 그에 대한 모든 유품들과 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기념탑 정상에서 바라본 국립극장(중앙 건물)으로 2500석을 가진 쿠바에서 가장 가장 중요한 문화 예술 공간이다.
높이 139 미터로 혁명 광장 중앙에 우뚝 솟아있다. 관광객은 4 CUC 내고 본토인은 관광객의 10분지 1만 내면 엘리베이터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올라 가면 사방으로 아바나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주변 건물들.
기념탑 정상에서 내려다본 주변 정부 청사
에어콘도 없이 땀을 식히고
혁명광장과 호세 마티 기념탑을 덩달아 다녔더니 더위와 목마름을 피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근처 BAR에 앉아 맥주와 찬물로 몸을 식혔다. 그런데, 아바나 시내의 이런 BAR들은 에어컨 없이 더운 공기가 실내에 흐른다. 그래도 그늘이니까 약간의 시원함을 느낀다. 보니 BAR 이름이 이태리 바르셀로나 근처의 몽세르트 국립공원 하고 똑 같잖아. 가이드에게 몽세르트가 다른 뜻이 있나 물어보니 걍 쿠바인의 흔한 이름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