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악 화산기행(2)
2013년 5 월 6일(화) 비 그리고 흐림
김용의 ‘사조영웅전’에서 나오는 천하제일 고수를 결정하는 무술 시합을 '화산논검’이라 하는데 내용인즉 천하 고수가 되려는 자들이 노리는 <구음진경>이란 무술 비법 책을 얻기 위하여 무림에 피가 계속 흐르는 것을 보고 천하제일 고수를 뽑아 그에게 구음진경을 맡기자고 하면서 1차 화산논검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다섯 명의 고수가 남았는데 그를 천하오절이라 하며 오절 중 남은 넷을 약간의 차이로 앞섰던 왕중양이 당대 제일 고수의 명예를 얻었다. 원래 이때는 검(劍)을 무기로 썼기 때문에 화산논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결정된 천하오절은 중신통 왕중양,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남제 단지홍, 북개 홍칠공이었고 그들은 25년 후 다시 한번 천하제일을 논하기로 하였다. 이런 무협소설의 지존 김용(金庸)의 업적을 기리듯이 북봉 정상에 그의 친필로 각인한 <화산논검> 기념비가 위 사진처럼 떡하니 서있다.
여기까지 읽고 보니 다른 영화가 생각난다. 바로 1994년 왕가위 감독이 제작한 영화 동사서독(东邪西毒)이다. 동사는 동쪽의 뱀 같은 검객 황약사이고 서독은 서쪽의 독을 잘 쓰는 검객 구양봉으로 영화 제목을 달았는데 김용의 ‘사조영웅전’에 나오는 인물 이름만 사용하고 영화 속 이야기는 ‘사조영웅전’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영화 ‘동사서독’ 에도 사조영웅전에 나오는 천하오절이 이름 그대로 나오는데 스토리는 사조영웅전하고 전혀 다르게 각색했다. 당대 최고의 배우 장국영, 장만옥, 양가휘, 임청하, 양조위, 장학우, 유가령들이 출연했고 왕가위 감독 특유의 슬로우 모션(무엇보다 왕감독과 콤비가 된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 솜씨가 뛰어나다)으로 검객들의 ‘화산논검’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며 영화 장면의 색채가 강렬하여 마치 수채화를 감상하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주역의 절기를 춘하추동으로 구분해서 철학적인 깨우침도 간간이 들려준다. 안 본 사람들은 찾아서 한번 보게 되면 나처럼 한두 번 더 보게 된다. 스토리가 약간 헷갈려서 두 번 세 번 보게 되는 것이다.
동봉에서 바라본 삼공산. 삼공산은 해발 2천 미터가 넘어 등산로가 없어 화산과 분리되어있다. 오른쪽으로 조그마한 3개 봉우리가 있는 산을 삼봉산이라 한다.
대한항공 40주년 기념 CF를 여기 화산에서 촬영하였다. 동봉에서 남봉으로 가는 길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자그마한 정자를 높은 암석위에 단초롭게 세워 놓았다. 남봉으로 가는 길에서 보면 저 아래 한참 멀리 있는 것 같다. 대충 눈짐작으로 때려보아도 왕복 한시 간 이상이 소요될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 정자로 향해 가는 등산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한항공의 40주년 광고 캠페인이 등고자비(登高自卑).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뜻으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말로 중용(中庸)의 자사(子思) 편에 있는 말이라고 한다. 지금 와서 되물어보면 그들은 하나하나 순서를 밟지 않아서 <땅콩회항>같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것일까?
정자 이름이 하기정(下棋亭)이라고 한다.
송 태조 조광윤(赵匡胤)이 개국 전, 이곳에서 도사(道士) 진단(陈抟)과 바둑 둔 것을 기념하여 정자를 짓고 하기정이라 이름했다고 전해진다.
약도로 표시해보면 동봉에서 남봉으로 가는 길 위에서 하기정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없는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고 저곳으로 가려면 공중제비를 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요자번신(鷂子飜身)의 영어 번역을 제비와 매의 절벽이라고 해놓고 한국어로 공중제비라고 쓰여있다. 공중제비는 몸을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다는 뜻인데 중국어 요자번신의 원뜻이 <새들이 장대위에서 곡예를 부리다>라는 의미로 내려가는 길이 험난하여 새처럼 공중제비를 해야 좁은 길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공짜도 아니다. 90도 수직 절벽으로 길을 내어 안전장치를 하고 내려가야 하기에 장비 대여료를 내야 한다. 가까이 가서 보니 줄잡고 바위에 파인 홈에 발끝을 끼어 내려가는 모양이다.
간 큰 사람은 저렇게 기념 인증샷을 찍는다. 화산에 이런 길이 한 군데 더 있다. 남봉 못 가서 나오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길>로 알려져 있는 <장공잔도>로 나중에 상세하게 올린다.
저 절벽으로 내려가는 길이 요자번신(鷂子飜身)으로 하기정(下棋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일단 절벽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무서워서 사람들이 가지 않는 것 같다. 나도 절벽의 몇 미터 앞에 까지만 가서 사진만 찍고 물러섰다.
남봉 가는 길로 내려가서 다시 한번 올려다본 하기정(下棋亭)으로 밑에서 보니 정자를 암석 가장자리에 세워 놓았다. 금이 간 암석 사이로 기상이 굳건한 소나무가 억척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기정을 왼편에 두고 남봉으로 가려면 경사가 제법 있는 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 화강암 돌에 하나하나 징으로 쪼아 만든 계단이 수없이 이어진다. 그 길을 내려와서 다시 고갯길을 올라가야 남봉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남천문(南天門)이 버티고 있다.
남천문을 지나야 남봉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천계(天界)란 말 그대로 선인들이 사는 곳으로 인간들이 사는 속계와 구별된다. 천계는 도교 전문용어로 하늘과 인간세상의 분계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천계(天界)를 지나면 바로 천상의 세계로 연결된다. 여기서 하늘세계로 연결된다는 의미는 화산에서 제일 높은 남봉 정상으로 연결된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러기에 남봉 정상인 낙안봉(落雁峰)으로 가는 길이 순탄하지는 않다. 낙안봉의 유래도 겨울나기를 위해 남쪽으로 길을 찾는 기러기떼가 높은 남봉 정상에서 쉬어 간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하여간 남천문을 지나면 길이 갈려 왼쪽으로 가면 그 유명한 장공잔도(长空栈道)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남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화산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 "화산에는 길은 하나뿐이다."라고 한다. 거대한 화강암 돌산이다 보니 길이 여러 갈래로 생길 수 없고 또한 돌을 깎아 만들다 보니 좁은 길일수밖에 없다. <장공잔도>도 길이 좁아 오다가다 마주치면 위 사진처럼 몸을 옆으로 비켜 틀어야 겨우 지나갈 수 있다. 잔도(棧道)란 험한 벼랑 같은 곳에 낸 좁은 길을 말하는데 길이 없어 선반처럼 달아서 길을 만든다. 그냥 벼랑길이라고도 부른다. 가장 유명한 잔도는 중국의 촉 지방에 있는 잔도로 초한지에서 항우를 피해 파촉 땅으로 들어가는 유방은 모사 장량의 계책대로 잔도를 놓아 군마가 지나간 후 전부 불태워버려 촉땅에서 나올 의지가 없음을 보여 항우의 의심을 거두게 한다. 그리고 삼국지에서는 같은 촉땅으로 들어가는 유비는 모사 제갈공명의 계책대로 잔도를 건설하여 천하를 삼분하여 촉땅에서 후사를 이어간 것이다. 다른 유명한 잔도는 경치로 끝내주는 장가계의 천문산 절벽에 놓여있는 <귀곡잔도>로 귀신들도 다니기를 꺼려한다는 잔도가 천 길 만길 낭떠러지 위에 놓여있다고 한다. 장공(长空)이란 높은 허공을 의미하는데 잔도가 해발 1500-2000미터에 걸려있다 보니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왼쪽은 촉의 잔도. 오른쪽은 장가계 천문산의 귀곡잔도)
장공잔도(长空栈道)는 화산의 험도(险道) 중 가장 험한 길이다. 그러나,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길이다. 왜냐하면 장공잔도를 거쳐야 남봉 정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험심이 강하거나 간띠 큰 사람들이 재미 삼아 돈 내고 한 번씩 걸어보고자 하는 길 뿐이다. 이 길은 원나라 때 도사(道士) 하원희(贺元希)이란 자가 40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굴을 만들기 위해 길을 낸 것이 바로 장공잔도(长空栈道)이다. 그런 길을 지금은 돈 받고 안전장치를 대여해주고 각자 알아서 스릴을 느끼고 인증샷을 찍어가는 관광의 길로 변했다. 나는 장공잔도로 들어가는 입구만 사진 찍고 얼른 물러 나왔다. 오금이 저려왔기 때문이다.
화산에서 제일 유명한 어드벤처 코스 "장공잔도"에서 오금이 저려와 사진 찍는 것도 힘이 들었다. 물론 돈 내고 안전 체인 달고 내려가서 사진 찍고 온다고 하지만 난 돈 받는다 해도 하지 못할 짓이었다. 그냥 장공잔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금방 돌아 나왔다.
남봉 정상으로 오르기 전에 멀리 서봉 정상이 보여 망원렌즈로 잡아보았다. 남봉에서 서봉으로 이어지는 길에 굴령(屈岭) 혹은 소창룡령(小苍龙岭) 이라고 부르는 절벽길을 300m 정도 올라가야 한다. 멀리서 능선을 카메라로 담아보니 구름 안개(운무)에 파묻힌 능선길을 따라 걸어서 올라가는 등산객이 작은 점으로 찍혀 나온다. 나도 곧 저 굴령길을 따라 올라가야 서봉 정상으로 갈 수 있다.
남봉으로 향하는 마지막 길을 차근차근 올라갔다. 남봉이 화산에서 최정상이다. 정상 비석에는 2,154.9m를 표시한다. ‘화산극정’이라고도 하며, 기러기들이 남방으로 날아가면서 자주 쉬어간다고 해서 일명 낙안봉(落雁峰)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한 시인은 이곳에서 “하늘만 위에 있고 높이를 겨룰 수 있는 산이 없으며, 고개를 들면 태양이 가까이 있고, 고개를 숙이면 구름이 아래에 있다”라고 남봉 낙안봉을 노래했다.
비석 바로 왼쪽 옆에 부산 금정산의 금샘 같은 바위 속 연못이 있다. 앙천지(仰天池)라고 한다. 음양조화를 이루기 위해 하늘에서 조성한 연못이라 전한다. 화산에는 특히 정상 바위 위에 연못이 실제로 많다. 앙천지는 위로는 천택(天澤)을 이어가고, 아래로는 지맥을 받들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홍수에도 넘치지 않는다고 한다. 앙천지 주변에는 정상 기념사진 찍으려고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 사진 한 장 찍기도 한참 걸린다.
화산 최고봉인 남봉 낙안봉(落雁峰)에서 바라본 서악 화산 산수화로 운무로 모든 산들이 뒤덮였다. 구름이 피어오르는 저 산 어디쯤에 바둑 같은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도 모른다는 신선 영감님들이 산다는 그런 곳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