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자금성(紫禁城)
2013년 5월 8일(수) 맑음
북경에서 가는 편지가 좀 늦었다. 사연인즉 시안에서 점심먹고 북경행 뱅기타고 와서 공항버스타고 시내들어와서 잘 곳 구하러 헤매다가 DAYS INN에서 7일 묵기로 하고 배낭을 풀었다. 피곤해서 잠을 일찍 잤더니 새벽 5시에 그만 눈이 뜨여 뒤치락엎치락하다가 지도 펴 놓고 고민하다 FORBIDDEN CITY(자금성)이나 가자하고 아침 7시에 길을 떠났다. 첫날이니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해서 일단 택시타고 북경 기차 본역으로 가자해서 그곳에서 버스
PASS사고 지하철 노선 파악해서 지하철 타고 천안문 광장으로 달려갔다. 북경 지하철도 이용하기에는 편리하게되어있었다.
자금성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뻔한 순간이 두번 있었다. 한번은 모택동이 중화인민 공화국 세우고 나서 문화혁명 당시 구시대 유물이라해서 철거할 계획을 세웠는데 주우언라이(周恩来)가 간곡하게 만류해서 겨우 해체 위기를 넘겼다.( 여행 책자에는 보통 이 이야기만 나온다) 그 덕에 살아남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진짜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그 전인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을 이 천안문 광장에서 하게 되었는데 이 정보를 수집한 대만정부 장제스가 공습계획을 세웠다가 마지막 순간에 자금성 문화재땜에 공습 명령을 취소했다고 한다. 이는 최근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성공회대 김명호교수가 연재한 "근현대 중국사"에서 밝히고 있다. 5년간 지금도 연재하고 있는데 중국 근현대사에 관심있는 독자는 읽어보면 사람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최근에는 연재한 내용을 다시 주제별로 편집하여 "중국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현재 1,2권이 나왔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5권에 버금가는 분량으로 대역작을 기획하고있다.
천안문광장으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검문검색을 한다. 가방은 검색기에 올려 놓아야 하고 신분증을 보여줘야 한다. 난 여권으로 통과되었고 경찰들이 무선 단말기가지고 몇몇 현지인 신분증을 무선으로 조회하고 있었다. 천안문 광장 진입로에는 공안(경찰)과 사복 경찰들로 물샐틈 없는 경비를 하고 있었다. 1989년 천안문사태의 후속조치다.
受命于天 安邦治民는 <명을 따르고 하늘을 섬겨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인데 이것을 간략화한 것이 천안(天安)이다. 천안문( 天安门)은 그런 숭고한 치세를 약속하는 말인데 1989년의 天安门事件은 이와는 정반대의 수단과 방법으로 인민을 억압했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자금성의 약도를 불러왔다.
자금성(紫禁城)은 명나라 영락제가 처음 수도 난징(남경)을 버리고 북경으로 천도하기위해 전문 장인
10만명과 연공사인원 100만명을 동원해서 14년동안 동안 공을 들여 1420년 완공했다. 남북 960m 동서 750m로 면적이 천안문광장의 약 1.7배다. 이런 규모때문에 내가 자금성 안을 해매고 다니다가 결국 다 보지도 못하고 녹초가 되어 버렸다. 일단 무지무지하게 크고 또한 사람들도 무지무지하게 구경하러 많이 온다. 볼 것도 별거 없는데 말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나 다른 중국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자금성을 일반인들이 볼 수 있다는 것만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어느 관광 안내서에 나와 있는데 내 생각에는 그냥 예전처럼 보여주지말지 싶었다. 다 볼라 해도 너무 크서 하루에 보기 힘들고 다른 이유는 관리 소홀로 다 허물어 가고 있었다.
자금(紫禁)이라는 명칭은 천자가 머무는 우주의 공간인 자미원(紫微垣)<북극성을 중심으로 하는 하늘로 1년 내내 중국 어디서나 관측되기 때문에 천자의 공간으로 상징>의 자(紫)와 아무나 들어오는 것을 금한다 혹은 그 자체로 궁궐을 뜻하는 글자인 금(禁)자의 합성어다. 그래서 자금(紫禁)의 깊은 의미를 알고 영어번역을 한다면 Forbbiden City라 하면 안되고 Forbbiden Red Fort라 해야 원뜻에 가까운 번역이다.
삼원은 천구의 북극을 중심으로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눈 자미원(紫微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의 총칭으로 자미원은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태미원(太微垣)은 황제가 정치를 하는 조정을, 천시원(天市垣)은 백성들이 사는 공간을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기준이 되는 별자리를 이십팔수(二十八宿)라 하여 이를 사방으로 구분하여 사신도(四神圖)와 결합해 천상을 구획하는 기준 별자리로 해서 한 방면에 각각 7자리의 별자리를 배당하였다. .
우리가 잘아는 고구려 무용총의 사신도(四神圖)도 바로 이런 고대의 동양 천문학의 중심 사상인 삼원(三垣)이십팔수(二十八宿)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있다. 즉,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四神이 바로 그러한 것으로 각각 7개의 별자리를 담당하는 것이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은 시간의 기준이 되는 자오선(子午線)의 중심임을 말하는데 하늘의 기준이 여기에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여기가 우주의 한복판이란 소리다.
유적지나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을 때 제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진 한 장으로 모든 것을 다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장면을 잡을 수 있는 Photo Point를 찾는 일이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을 들어서면 금수교(金水橋)라고 하는 작은 다리를 지나 자금성 정전(正殿)인 태화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태화문(太和門)이 있다. 그 태화문 정중앙에서 오문쪽으로 내려다 보며 잡은 Shot이다. 일단 내가 정중앙에 위치하니까 오문으로 들어선 모든 관광객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그런 모양새로 내가 들어가서는 안되는 그런 곳으로 들어가서 찍은 것 같이 보이는데 그런건 아니고일단 정중앙에 위치해서 오문의 웅장함을 한 컷에 담을 수 있었고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하여 관광객들의 시선을 집중할 수 있었다. F10으로 조리개를 조이는 대신에 ISO 200으로 감도를 올려 겨우 들고 찍을 수 있었다. 운좋게 Photo Point를 찾아 사진 한 장으로 자금성 오문의 웅장함을 표현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사진중의 하나다.
자금성 안에서 경찰들이 제식훈련중이다. 자금성이 워낙 크다 보니 이안에서 경찰들 합숙소가 있는 모양이다.
한쪽 구석에서 신병들 군기잡고있는 고참병. 차렷자세로 긴장하며 선참의 주의를 경청하고 있다.
표를 끊어 오문(午門)을 들어서면 엄청나게 큰 공간이 휑하니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방금 들어선 오문(午門)과 태화문(太和門)사이에 있는 넓은 광장을 말한다. 이 광장은 동서 200m, 남북 120m로 약 8천평이나 되는 넓은 광장이다. 이 광장의 중앙을 가로질러 금수하( 金水河)가 흐르고 그 위로 흰대리석으로 만든 5개의 금수교(金水橋)가 걸려있다.
인터넷에서 태화문(太和門)광장의 약도와 오문 정면에서 잡은 사진을 찾아 올린다. 태화문(太和門)과 5개의 금수교(金水橋)가 광장을 가로질러 흐르는 금수하(金水河)위로 걸려있다.
태화문을 지나면 고궁의 정전(正殿)인 태화전이 나온다. 3층 기단위에 세워진 태화전은 1천4백88개의 기둥으로 지탱되고 단 아래에는 1천개 이상의 용머리 배수구가 있어 비가 오면 빗물이 천여 마리나 되는 용의 입에서 뿜어나오는 장면이 볼만한데 이를 천용토수(千龍吐水)라고 한다. 또 의식을 주관할 때 향을 피우던 향로도 18개나 곳곳에 있다. 태화전의 동, 서 좌우로 선학과 거북을 하나씩 배치하여 학과 거북은 장수를 의미한다. 황제의 즉위식, 원단(元旦)같은 축제일의 제전(祭典), 조서 반포, 황태자의 탄생 축하, 황제의 탄신 축하등 주요 의식은 전부 여기서 거행되었다. 여러 차례의 소실, 재건이 반복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34년(1695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사진에서 보듯이 지금 열심히 보수 공사하고 있어 내부 구경을 할 수 없다. 태화전이 전체 자금성중에서 제일 큰 건물이고 중국 전체 목조건물 중에서도 으뜸이란다. 황제 즉위식, 새해 제사, 조서 반포, 황태자 탄생축하등 국가적 행사를 치러던 곳으로 영화에서 문무대신들이 저 아래에 나열해 있는 장면이 바로 이 태화전 앞이다. 최근의 치러진주요 의식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무조건 항복하고 10월에 화북지방 전쟁 항복 조약식이 여기 태화전에서 거행되었다고 한다.
대전 앞 월대에는 장수와 영원함 등을 상징하는 학과 거북이 동상이 있고, 해시계와 '가량'이라 부르는 옛날 무게측정기가 있다. 그리고, 주요 의식때 피우던 향로도 18개나 있다.
태화전을 지나면 중화전(中和殿)이다. 황제가 태화전에 들어 가기전에 이곳에서 잠시 쉬거나 관원들의 절을 받거나 중요한 일을 하거나 문서를 읽기 전에 이곳에서 연습을 하던 곳이다. 주로 황제가 하객을 만나거나 신하와 이야기를 나누던 용도였으며, 특히 큰 행사를 앞두고 휴식과 준비, 대기를 하던 곳이다.
중화전(中和殿)을 지나면 보화전(保和殿)을 만나는데 보화전까지가 공식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그래서 보화전, 중화전, 태화전을 외조(外朝) 삼대전(三大殿)이라 칭한다. <보화>란 명칭은 역경에서 따 왔는데 우주간 만물의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란다. 보화전은 황제의 도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조례전 의복을 착용하기도, 대신들과 연회를 열기도, 황제주관 시험 전시를 거행하기도 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침궁지역 수리로 인해, 순치제와 강희제가 이곳에 거주하기도 했으며, 순치제의 혼례식도 열렸다고 한다. 큰 의식을 치르기 전에 황제가 의복을 갈아입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황후나 황태자의 책립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보화전 뒤쪽으로 돌아가면 운룡대석조((雲龍大石雕)라고하는 거대한 대리석 돌하나가 볼만한 구경거리이다.
운룡대석조((雲龍大石雕)는 9 마리의 용이 구름, 바다, 산들 사이를 유유히 나르며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새긴 대리석으로 한 개가 약 17m로 무게가 약 300톤을 넘는다고 한다.
기록에는 이 대리석은 북경에서 100리 떨어진 서쪽의 방산석굴에서 채취한 것으로 석굴 밖으로 운반하는데 민간인 만여명과 군졸 6천명이 동원되었다고 함. 다시 이 돌을 자금성으로 운반하기 위하여 길을 닦고 500m마다 우물을 파서 겨울에 우물 물을 퍼올려 얼음길을 만들고 그 위로 돌을 운반하는데 수만명의 민간인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유금동항(流金銅缸)이라하며 방화수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200냥 금으로 도금을 하였고 무게는 2.5톤이나 나간다. 이런 물방화조가 30개나 자금성 안에 있었는데 1900년 의화단사건으로 북경을 공격한 8개국 유럽연합군들이 모조리 금을 벗겨가고 지금은 시커먼 버낀 자국만 남아있다.
북문으로 올라가다 보화전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구룡벽이 있다. 아홉마리의 용을 벽면에 270개의 유리조각으로 그러져있다. 시간이 없어 가보지는 않았지만 위 사진의 그림과 똑같다. 위 사진도 자금성 안의 다른 벽에 그려진 용으로 같은 전문 장인이 작업했을테니까 다를 수가 없다. 하필이면 왜 아홉마리만 그리고 열마리를 채우지 않았을까? 구룡벽(九龙壁)설계와 장식은 양수(陽數)에서 가장 큰 수인 9를 사용하여 황제의 권력과 천자(天子)의 존엄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금성의 내정과 외조(外朝)를 구분하는 정문인 건청문(乾淸門)을 지나면 건청궁(乾淸宮),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이 자리한 내궁으로 들어 서게된다. 위 사진은 건청궁(乾淸宮)으로 황제의 침실이자 집무실이었다. 자금성의 첫 입주자 영락제부터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까지 14명의 황제가 이곳을 침궁으로 사용하였다.
건청문(乾淸門)앞에 있는 금을 입힌 동(銅)사자로 황족의 화려하고 고귀한 점을 표현하고 있다. 동쪽의 숫사자는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하며 서쪽의 암사자는 왼발로 어린 사자를 쓰다듬고 있는데 자손들의 번성을 상징한다. 위쪽사진이 암사자로 왼손 손바닥에 젖꼭지가 있어 새끼에게 수유하고 있는 중이다.
동일 이름의 건청궁(乾淸宮)이 자금성 건청궁(1420년)으로부터 약 460년 뒤 한국 경복궁 내전에 내궁으로 건립되는데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곳으로 자금성 건청궁을 본 따 명명한 것이다. 경복궁의 건청궁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하다.
교태전(交泰殿)
명대에 처음 지을 때 건청궁은 황제의 침실, 곤녕궁은 황후의 침실로 지어졌으나 뒷날 그 사이에 교태전이 지어졌다. 이 교태전(交泰殿)은 내관들의 알현을 받는 곳으로 청대에는 황제의 옥새를 보관하였다 한다.
곤녕궁(坤寧宮)
교태전 뒤의 곤녕궁(坤寧宮)은 명대에는 황후가 거쳐 하던 중궁이었지만 청대에는 동난각(東暖閣)이라고 부르는 동측은 황제의 신혼 침실, 중간과 서측은 궁중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쓰였다. 이 곳에는 17, 18세기 세계 각국의 시계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 곳의 자명종 시계는 크기도 대단히 크지만 현재까지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돈벌이 장사. 궁중의상을 대여해 주고 사진도 찍어주며 돈벌이한다. 꽤 수지맞는 장사인 것 같았다.
건물의 지붕에서 가장 높은 곳을 용마루라 하고 용마루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마루를 내림마루, 내림마루에서 45도 각도로 추녀 쪽으로 뻗친 마루를 귀마루라고 한다.
귀마루에는 여러 개의 형상을 올려놓는데 이것을 잡상(雜像)또는 상와(像瓦)라고 한다. 잡상이란 여러 가지의 형상 (形像)을 뜻하고 상와는 기와와 같이 구워서 형상을 만들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궁궐 건축물은 지붕에 용두(龍頭), 취두(鷲頭), 치미(鴟尾), 잡상(雜像)등의 장식 기와를 설치하는 것은 건물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는 장식적 의미와 함께 구석진 곳에 도깨비나 귀신 등 악귀를 막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 사악한 것을 피한다해서 벽사(辟邪)라고도 한다.
취두(鷲頭)는 독수리의 머리형상이며 치미(鴟尾)는 솔개의 꼬리형상이다. 이 두 새는 하늘을 나는 새 가운데 가장 강하고 힘찬 것이다. 건물에서 지붕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하늘을 나는 새 중에 가장 강한 독수리나 솔개를 건물의 용마루에 놓음으로써 모든 재앙과 악귀를 막아줄 것이라는 벽사적(僻邪約 )내지는 주술적(呪術的)인 뜻이 담겨 있어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잡상의 수에 따라 권위를 표시하기에 황제의 처소에는 최대 11개, 황세자는 9개, 황후는 7개, 일반 궁에는 5개로 항상 홀수로 올려놓는다고 한다.
자금성 내궁에 있는 잡상은 용두까지 5개다.
귀마루에 잡상을 올리는 것은 중국 궁궐과 동일하나 그 잡상의 종류가 서로 상이하다. 조선의 잡상을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당사부(大唐師父): 잡상의 맨 앞자리에 놓인다. 대당사부는 당나라때 현장으로 삼장법사(三藏法師)이다.
2) 손행자(孫行者)는 손오공을 말한다.
3) 저팔계(猪八戒)는 손오공과 같이 삼장법사를 따라 천축에 갔던 멧돼지이다. 저猪는 돼지이고 팔계八戒는 부처님이 가장 싫어하는 여덟 가지의 음식물을 뜻하기도 한다. 4) 사화상(獅晝像)은 사오정으로 역시 손오공과 같이 삼장법사를 호위했던 괴물.
5) 이귀박(二鬼朴)은 허리 앞뒤로 뿔이 달린 짐승
6) 이구룡二口龍, 입이 둘달린 용
7) 마화상馬畵像은 말馬의 형상을 하고 있다.
8) 삼살보살(三殺菩薩)은 세가지 액인 세살(歲煞), 겁살(劫煞), 재살(災煞)을 막는 보살이다.
9) 천산갑(穿山甲)은 인도 중국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이다.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혀 있고 등이 다른 잡상보다 울퉁불퉁 튀어 나왔다.
10) 나토두(羅土頭)는 짐승같이 생긴 귀신으로 작은 용의 얼굴형상 또는 검붉은 곰의 형상이라고 한다.
중국 궁궐의 잡상 배열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선인기봉: 봉황을 타고 있는 선인
2) 용
3) 봉황
4) 사자
5) 해마
6) 천마
7) 압어: 비늘이 달린 짐승
8) 산예: 용의 여덟번째 아들
9) 해치: 선악을 구별하는 동물
10) 두우: 이무기와 닮고 뿔이 두개고 물을 좋아하는 동물
11) 행십: 원숭이를 닮은 동물
우리말에 황당하거나 이유모르게 말문이 막히는 경우를 당할 때 쓰는 말이 바로 <어처구니가 없다>라고 한다. 이말의 어원이 위에서 살펴본 잡상(雜像)에서 나왔다고 한다. 전문 장인 대목수가 궁궐 지붕을 완성하고 나서 깜박 귀마루에 잡상을 올리는 것을 빠뜨릴 때 하는말이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하는데 잡상(雜像)의 다른 말이 바로 어처구니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로는 콩을 가는 멧돌의 나무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하는데 그런 손잡이없는 멧돌을 보고도 <어처구니가 없다>고 한다.
내정인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을 지나면 자금성 정원인 어화원(御花園)으로 이어진다. 인파로 무지하게 북적거린다. 궁까지는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서도 복잡한 느낌이 없었는데 어화원이 좁다 보니 완전 돗때기 시장으로 변한다. 어서 빠져 나가고만 싶었다.
어화원 안의 만춘정(万春亭)으로 건물 윗 부분은 하늘을 본따 둥글게 하고 아랫부분은 땅모양으로 네모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금성 안에 있는 여러 정자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정자라고 한다.
중국 태호지방에서 난 "태호석"으로 조성한 10m 높이의 인공산이 퇴수산(堆秀山)이다. 이 산의 정상에 어경정(御景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이 정자에서 황제 황후가 자금성밖을 내다보고 중양절에는 황제가 달맞이를 했다고 한다.
어화원 왼편에서 해매고 다니다가 역사적인 장소를 하나 발견했는데 양성제(養性齊)다. 별로 크지도 않은 이층 전각인데 궁궐 뒤쪽 어화원 옆에 위치해서 호젓하고 조용해서인지 황제나 황태자들이 여기 와서 독서나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역사적인 장소라는게 여기서 마지막 황제 푸이가 어릴 때 영국인 영어선생 레지날드 존스톤(영화에서 피터 오툴)에게서 영어, 자전거 타는것등 여러가지 외국의 문물과 지식을 배웠다는 것이다. 거의 110년 전 이야기다.
어화원지나면 자금성 북문 신무문(神武門)이 나온다. 1924년 청조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궁궐에서 쫓겨날 때 이 뒷문을 통해서 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신무문을 나서면 바로 경산공원으로 이어지는데 이 경산 공원도 예전에는 청 황실의 소유 정원이었다고 한다. 청조 망하고(공식적으로 1911년 신해 혁명부터)부터는 국민당 군마 목초지로 이용되다 1928년부터 공원화가 되었다고 한다. 경산공원을 해질 무렵 오르면 낙조에 물든 자금성 지붕을 사진으로 잡을 수 있다고 하니 한번 올라 가 볼 생각이다.-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