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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Jul 07. 2016

지노 배낭여행기 - 네팔 중국편 23

중산공원과 천안문 광장

2013년 5 월 9일( 목 ) 맑음


  북경서 온 편지(2)


중산공원 입구

어화원까지 오다 보니 아침 8시반부터 근 8시간을 버티다 도저히 못 참아 벤치에 앉아 한참을 졸았다. 졸고 나서보니 이게 도저히 하루로 될 일도 아니고 전부 다 봐야 된다는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해서 아직 시간은 남았지만 퇴장해 버렸다. 그래도 해뿌리가 조금 남아 있길래 처음 출발한 오문 옆에 있는 중산공원으로 10원내고 들어 가 보았다.


중산공원 조감도

들어가기전 공원 약도를 대강 훝어보니 상당히 넓은 공원이다. 마음을 다잡아 먹었다. 성질대로 다 보려고 하지말고 보다보다 다리가 아프면 중간에서 접어버리고 훌쩍 나가자고 처음부터 그렇게 혼자 독하게 마음먹고 들어갔다.


공원내에 세워진 손문선생의 동상

중산(1866-1925)은 중화민국의 국부 손문(孫文) 선생의 호는 아니고 일종의 가명이다. 선생 동상 사진이나 한 장 찍으러 들어 갔다가 오질나게 또 한번 걷게 되었다. 약 24헥타르 면적으로 작은 공원은 절대 아니다. 동상의 높이는 3.4m 무게 1.8톤으로 검은 대리석위에 서있다. 1986년 11월에 낙성식을 가졌다고 한다. 동상 밑에 새겨진 "위대한 혁명선구자 손중산선생 천추에 길이 빛내리" 라는 휘호는 등소평의 친필이라고 한다.


(다음은 손문선생 중심으로 중국 근대사를 개략적으로 요약한 여름 장마비같은 지리한 장문이다. 중국 근대사에 관심없는 사람은 과감하게 짬뿌하면 된다)




    중국의 국부 손문(孫文)


손문(孫文) 선생은 1866년 중국 광동성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유년시절에는 크게 교육을 받지 못하고 하와이로 일찍 이민가서 자리를 잡은 큰형 손미(孫眉)의 도움으로 13살 때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가서 서양교육을 받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막연하게 알고 몇년 뒤 중국으로 돌아왔다. 홍콩으로 가서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술을 배워 1892년 5월에 12명이 졸업한 의대에서 고만고만한 성적으로 졸업장을 받고 의원을 개업하였다. 의사직업이 그 때나 지금이나 수입면에서는 좋았던 모양이다. 일반 세관원이나 세무직원들의 월급이 50원 정도인데 선생은 한 달에 물경 만원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구 열강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심화되자 일반환자를 살리는 것보다 나라를 살리겠다는 포부로 혁명과업에 뛰어들었다. 혁명 사업의 첫 작품으로 1894년 하와이에서 나중에 중국 국민당의 모태가 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혁명과업을 시작하였다. 이 흥중회(興中會) 조직을 기반으로 1895년 처음으로 광저우에서 봉기하였으나 배반자의 밀고로 봉기는 실패하고 선생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그때부터 해외에서 혁명세력을 규합하여 혁명 구심점 역활을 하였다. 나까야마(中山)는 그 때 일본에서 망명하여 사용하던 가명으로 중산(中山)이 호는 아니지만 아호처럼 그렇게 불리우게 되었다. 선생은 일본, 하와이, 베트남, 영국, 미국 본토등지에서 화교와 젊은 유학생을 상대로 그의 혁명사상을 고취시켜 1905년 일본 동경에서 중국 후난성에서 조직된 반청(反淸) 혁명단체인 화흥회(華興會) - 화흥회의 회장이 저 아래 영화 쥔공인 황싱(黃興) - 와 기존 단체인 흥중회(興中會)가 연합하여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새로 결성되고 선생이 회장으로 추대되어 혁명의 주체로 활동하다 신해혁명 성공후 중화민국(中華民國)이 들어서자 중국 국민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흥중회(손문)와 화흥회(황싱)가 손을 잡게 되어 선생과 황싱(1874-1916)이 절친한 혁명동지로 남게되어 중화민국 건설에 힘을 합하게 되었다. 선생은 중국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를 발간하여 처음으로 민족,민권,민생에 기초한 삼민주의를 기초하여 혁명운동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4대 강령으로 驅除韃虜(만주족 축출), 恢復中華(중화 회복), 創立民國(공화국 창립), 平均地權(토지 소유의 균등) 내걸고 혁명과업을 가속화시켰다. 1905년에 결성된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혁명의 주체가 되어 여러 혁명봉기를 주동하여 결국 1911년 10월 10일 우창봉기를 시발점으로 신해혁명이 성공하고 청조는 몰락하게 된 것이다.


성룡이 출연,감독한 영화 포스트


황싱(黃興)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신해혁명이 성공한 그해 12월말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남경에 두면서 총통선거를 하여 황싱이 초대 총통에 선출되었으나 황싱은 이를 거절하고 일주일 뒤에 해외에서 귀국한 선생에게 총통자리를 양보하였다. 총통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선생을 지지한 황싱의 진정한 애국심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총통이 된 선생은 1912월 1월 1일 아침에 남경에서 정식으로 중화민국을 선포하였고 황싱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즈음 황싱과 정반대로 혼란한 중국의 정세를 이용하여 새로운 황제가 되려고 음흉한 흉계를 가슴에 품은 자가 있었으니 바로 위안스카이(원세개)이다.


속이 음흉한 원세개. 조강지처외에 총 9명의 첩실을 두어 슬하에 17남 15녀를 두었다. 9명 첩실중 3명이 조선인이다. 임오군란때 조선에 파견되어 귀국시  안동 김씨를 데리고


와서 첩으로 삼았다. 이것도 부족하여 안동 김씨가 몸종으로 데리고 온 이씨와 오씨도 첩으로 삼자 주인마님 안동 김씨보다 서너살 많았던 이씨가 졸지에  안동김씨의 성님이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직례총독겸 북양대신인 리홍장의 심복으로 리홍장이 죽자 그가 키워논 청나라 신식군대인 북양군(北洋軍)을 인수하여 강력한 육군과 해군력을 장악하고 있어 혁명세력과 대치되는 인물로 선생은 위안스카이와의 내전을 피하기 위하여 왕정을 페지하고 공화정으로 가는 조건으로 총통직을 원세개(袁世凱)에게 물려주었지만 원세개는 요인 암살같은 비열한 방법으로 국민당 조직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왕정부활을 외치며 독재정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위안스카이의 흑심을 알아차린 선생이 세력을 규합하여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으로 1913년 7월 선생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결성하여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하였다. 위안스카이의 흑심을 알아차린 중국내 혁명파와 황제등극을 반대하는 세계의 여론으로 주춤하던 위안스카이가 1916년 6월 병사하자 선생도 귀국하여 조직 재정비에 들어가 1919년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다시 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상해에 본부를 두었다.


다시 중국으로 귀국한 선생은 새로운 호법정부를 수립하여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군의 총수로 떠오른 단기서(段祺瑞)의 북양정부와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이로써 북쪽에는 돤치루이(段祺瑞) 중심의 북양정부와 남쪽에서는 호법정부인 선생의 광동정부로 양분된 셈이었다. 결국 북양정부는 여러 지역 파벌로 군벌들이 난립하게 되어 중화민국의 통일은 더욱 더 어렵게 되었다. 이즈음 소련의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1920년 중국에 공산당을 창설하여 세력확대를 목적으로 선생의 국민당과

연계하였으니 이것이 1차 국공합작이었다.(1923년)

이 합작으로 중국내외 공산당원도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게 하였으니 젊은 모택동(毛澤東)도 입당하여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당시 프랑스에 유학해 있던 중국공산당 청년단원들도 국민당 프랑스지부를 통해 무더기로 입당하여 국민당원이 되었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이 시기에 공산당 밀정을 은밀하고 위대하게 국민당 내부에 깊숙히 심어놓아 이 세포를 이용하여 국민당 내부 기밀을 빼내어 활용하다가 1927년 장제스가 상해에서 대대적인 공산당 세포 제거 및 검거 쿠데타로 국민당내 공산당원을 제거하였다) 한편 국공합작의 일환으로 선생은 장제스를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을 소련에 파견하여 약 4개월동안 소비에트 제도와 군사조직을 견학하고 돌아와서 광동성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으로 장제스로 맡게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런 국공합작의 와중에 북쪽의 군벌들이 난립하였는데 대표적인 군벌이 돤치루이(段祺瑞)의 안휘파, 펑궈장(馮國璋)의 직예군벌 그리고 후에 시안사변의 주역이 된 장세량의 아버지 장쭤린(張作霖)이 이끄는 봉천군벌로 이들이 중국 통일의 걸림돌이 되었다. 1925년 돤치루이(段祺瑞)의 제안으로 혼란한 시국수습을 위해 베이징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선생은 이 회의 참석하려고 베이징으로 이동하다 기차안에서 간암으로 병사하였다. 그 때가 60세로 염원이었던 통일된 중국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선생의 사후 국민당을 이어받은 장제스는 공산당과 힘을 합해 다른 북벌 군벌을 차례로 와해시키고난 후 마지막으로 장쉐량의 동북군벌(봉천군벌)마저 국민당 휘하 조직으로 들어오게 하여 중국통일이 눈앞에 보이는듯 하였으나 1936년 시안사변으로 2차 국공합작으로 숨통이 트인 모택동의 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하여 장제스의 국민당은 1949년 대만으로 건너가게 되어 두 개의 조선처럼 두 개의 중국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해혁명(1911)과 쌍십절


신해혁명의 첫 총성이 울린 우창(무창)봉기가 1911년 10월 10일에 거사되어 이를 시발점으로 중국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나 마침내 다음해 1912년에 청조가 공식적으로 붕괴되고 한족이 중심이 된 중화민국이 건국되어 이 날을 쌍십절(10월10일) 건국 기념일로 대만은 물론 중국 본토에서도 대외적으로 성대하게 기린다.


위 영화 포스트는 성룡이 감독하고 극중에서는 손문 선생의 절친이자 우창봉기를 진두지휘한( 신해혁명시 손문선생은 당시 해외망명중으로 직접 봉기에는 참가하지 않았고 해외에서 혁명을 지원하였다.) 황싱(黃興)으로 출연한 신해혁명 영화이다. 영화 내용은 신해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던 우창봉기를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나기 전후를 잔잔하게 그리고 있어 신해혁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화로 중국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자료다.



손문선생 초상화

쑨원(1866-1925)은 손문의 중국발음. 외과의사이자 정치가. 신해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중국국민당의 창립자로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로 대만과 중국 본토에서 동시에 추앙받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렇게 위대한 인물이지만 여자관계는 매우 복잡한 인물로 기록된다. 일본에서 생활할 때 일본인 절친이 선생에게 제일 좋아하는 것 3가지를 물었다. 선생의 대답은 첫째는 혁명, 둘째는 여자, 세번째는 책이라고 하였다. 선생은 두번의 결혼과 서너명의 첩실을 두었다고 한다.


손문선생의 장인 쑹자수

쑹자수(宋嘉樹, 송가수)(1863-1918) 는 광동성 광저우 출신으로 쑨원의 장인이 되는데 둘 다 연배가 비슷하다. 장인이 사위보다 겨우 3살 손위다. 집안이 어려워 10대에 먼 친척의 양자로 미국으로 들어가서 고생하며 신학교를 마치고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된 쑹자수는 1892년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쑨원을 만나 그의 혁명사상에 심취하여 자금책으로 혁명을 뒤에서 도왔다. 23년 뒤에는 쑨원을 사위로 맞아들일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지만 중국어판 성경을 찍어 돈방석에 앉았고 그 후 밀가루 공장세우고  미국산 기계 대리점으로 거부실록을 쓰게 되었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이 중 두 딸이 중국 근대사를 쥐고 흔들었던 두 영웅의 안방마님으로 들어 앉아 송가왕조를 이루었다고 모두들 졸라 부러워했다. 첫째딸 아이링(송애령)은 쿵샹시라는 재벌과 결혼했고 둘째딸 칭링(송경령)은 22살에 27살이 많은 49살 늙다리 쑨원과 결혼한다고 해서 쑹자수부부가 펄펄 뛰면서 말렸어도 결국 결혼했고 세째딸 메이링(송미령)은 쑨원의 실질적인 후계자가 된 장제스(장개석)와 결혼하여 둘다 중국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중국 역사에 이렇게 세 자매가 동시에 역사의  Spot Light를 받았던 경우는 처음있는 일이다.





  독일 공사 추모비를 중산공원에 옮기다니

공원내의 평화수호비

1900년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이 일어나자 독일공사 극임덕(중국명)克林德이 진압에 나섰다가 청나라 군인한테 살해당하였다. 1902년 의화단운동이 서방열강 8개국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사후 조치의 하나로 피살된 독일공사를 추모하는 극임덕비(克林德碑)를 근처에 세우게 조약에 명시되어 세운 것으로 이게 지금 공원안에 서있는 보위화평방(保衛和平坊)으로 원래는 여기에 있던 기념비가 아니고 다른 곳에서 극임덕비(克林德碑)로 불리우던 추모패방을 이리로 옮겨 온 것이다. 보위화평방을 영어로 번역하니 Peace Defending Arch. 다른 말로 쉽게하면 평화수호비쯤 되겠다. 높이 10.9m 폭 17m로 4개의 기둥위에 3개의 누각이 있는 패방이다.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열강 연합국에 당한 치욕스런 독일인 추모비인데 이걸 명칭만 바꾸어 애국 혁명가 중산공원에 옮기게 한 중국인들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치욕도 모르는체 실용주의((實用主義)에 기초한 발상인가?


중산공원내의 튜울립 화원

중산공원은 명.청 시대에는 농사와 토지의 신을 모시는 사당이었으나 그후 베이징 최초의 황실정원 공원이 되어 손문의 유해를 이 곳에 안치한 후에는 그의 호를 따라 중산공원이 되었다.


색색의 튜울립

여러가지 색의 꽃으로 조경된 공원이 아름답다. 특히 붉고 흰 색색의 튜우립꽃이 눈길을 끈다.


명석 청연타

청연타(青蓮朶). 1751년 청 건륭제가 처음으로 남방을 시찰할 때 이 돌을 좋아해서 북경으로 운송하여 원명원에 두고 ‘청연타’ 라 하였다. 1927년에 원명원에서 중산공원으로 옮겨왔다. ‘청연’이란 불교에서 지혜란 뜻이다. 이 돌은 무늬가 교차적으로 잘 배열되어 있으며 특히 금방 비를 맞은 후에는 윤기가 도는데 엷은 분홍색이 나며 마치 희미한 저녁놀같고 돌무늬에 섞인 백색의 점은 하얀 눈과 같아서 실로 보기드문 명석이라 한다.


난정팔주정

난정팔주정(蘭亭八柱亭)은 원래 원명원의 유물이었다. 정원의 석비 앞면에는 머리글이 새겨져있고 뒷면에는 건륭제의 시가 새겨져있다. 팔주 즉 여덟개 기둥에는 진나라 서예가 왕희지의 유명한 ‘난정서’를 모방해서 여러 시인들의 모사작품이 실려있고 건륭제도 이를 모사한 ‘난정시’ 와 ‘난정서집’이 새겨져있다.


공원내의 호수와 정자

운치가 흐르는 곳에는 물과 정자가 실버들에 늘어져 멋진 풍류의 멋을 선사해 준다.


숲 속에 물과 돌과 길이 정자와 잘 어우려져 있다.


긴회랑인 장랑

긴 회랑이라 해서 장랑(长廊)이라고 하는 독특한 건물 구조로 되어있다. 지붕 및 가로지른 써가래에는 단청과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중국 전통 화법으로 그린 그림이 2천점 이상이나 된단다. 그 중 약 200여점이 중국 4대 고전으로 꼽히는 삼국연의(三國演義), 홍루몽(紅樓夢), 수호전(水滸傳), 서유기( 西遊記)의 내용을 담은 그림이라고 한다. 이런 장랑으로 유명한 장소가 북경에 한 군데 더 있는데 서태후 할매의 놀이터인 이화원(颐和园)에 있다. 이화원의 장랑(长廊)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할 예정이다.


도원결의

장랑(长廊)의 유명한 그림의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서 유비와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는 장면인 도원결의(桃園結義)가 위의 그림이다. 장랑을 다 돌아 보지 못해서 허접한 인터넷 사진을 퍼왔다.   




  중매쟁이의 Matching System


중매쟁이들의 비지니스

선생 동상을 찍고 나오니 거의 한바퀴 잽싸게 돌아 본 셈이다. 이 때쯤에는 다리가 아니고 발 전체에 쥐가 나는 느낌이었다. 근데 공원 한 쪽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어 첨에는 무슨 장이 서는 줄 알았다. 사진처럼 하얀 종이를 땅바닥에 놓고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들여다 보고 가곤 했다. 나도 따라가서 땅바닥에 놓인 하얀 종이를 사진찍으려도 하였더니 찍지마라고 한다. 자세히보니 사진과 인적사항등을 적어놓고 중매를 알선하는 매파인 것 같았다. 실물대신 사진과 인적사항을 나열하면 관심있는 사람이 좀 더 상세하게 질문을 하는 모양이다. 세상에 저런 방법으로 배필(배필에 적합한 영어가 나은 반쪽을 뜻하는 Better Half이다)을 정하다니?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System이다.


북경 161중학교

중국 최고 명문이라는 북경4중을 찾지못하고 161중을 찾았다. 운치있게 돌사자랑 교문 전각이 잘 어울린다. 다음은 북경4중에 대한 인터넷 글이다.


중국 최고의 명문인 북경4중은 1907년에 설립된 공립 Key School로 현재 고등학생 1500명 및 교직원 120명이 있으며 1984년 중국 최초로UNESCO 회원학교로 가입하였다. 학교설립 90여년간 30,000여명의 우수한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매년 95% 이상의 학생이 북경대, 청화대 등 중국의 명문대에 진학한다. 북경4중은 학식이 풍부하고 진취적이며 가르침에 유능한 교사진을 확보하고 있다.

북경4중은 시내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천안문에서 2Km 떨어져 있으며 부근에 자금성, 북해공원, 경산공원, 중산공원 등 관광명소가 있다. 북경4중의 부지면적은 13,000여 평, 건평은 10,600여 평이 된다. 캠퍼스에 교학동, 실험동 등에는 좋은 시설을 구비하고 있으며 장비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도서관에는 10만 여권의 장서가 있으며 컴퓨터로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관리를 하고 있다. 교정내의 운동장에 플라스틱으로 된 400m 트랙, 농구장, 축구장, 배구장, 실내수영장과 실내농구장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천안문 광장으로

천안문 광장 안내표

지하철타러 내려 가다가 보니 천안문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또 그리로 발길이 자연이 옮겨지더라. 튼튼한 등산화에 뚜꺼운 등산양말이 장시간 걸어도 참을 수 있는 최대의 비결인것 같다. 천안문 광장으로 사람들 속에 묻어 들어갔다.


(모아저씨와 군기가 제법 잘들은 경비병)


(천안문과 모아저씨, 경비병과 함께 인증샷 한장)


인민영웅기념비

천안문 광장으로 올라 서니 여행책자에서 소개한 여러 건물들이 천안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쭉 늘어 서 있다. 천안문 광장 중간에 위치한 기념탑이 인민영웅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로 금빛 휘호가 모택동의 친필이란다. "인민영웅영수불굴(人民英雄永垂不朽)"로 "인민영웅이여 영원히 빛나라" 그런뜻이라고 한다. 1958년 세워졌는데 높이는 약 38미터로 중국 혁명 영웅들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다.


모주석기념당

그 밑에 모주석기념당(毛主席紀念堂)이 있다. 보니까 참배시간이 8-12까지만 허용하고 일체 아무 물건도 가지고 들어 갈 수 없고 물품보관소에 맡기고 가야 한단다. 여긴 별로 들어 가 볼 맘도 없고해서 사진만 훔치고 패스했다. 건물 현판의 글씨는 모주석을 이은 화국봉(华国锋) 솜씨.





  모택동의 여자들


영웅호걸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별 근거도 없는 말들이 시중에 돌아다닌다. 앞에서 본 손문 선생도 그렇고 모택동도 많은 여자들을 좋아했다. 영웅호걸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첫번째 정실은 모택동이 14살 때 아버지 명령으로 당시의 조혼 풍습에 따라 6살 연상인 동네 처자 리바오산(李寶珊)과 결혼하였으나 애도 낳지않고 곧 이혼하였다.

두번째 부인은 학교시절 은사의 딸인 양카이후이(楊開慧)와 재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양카이루이는 일본과 영국에 유학한 인테리로 교육철학을 전공하였다. 당시 농민 폭동의 배후자로 모택동은 지명수배되어 도망다녔고 대신 양카이후이가 잡혀들어가서 처형당했다. 여기서 얻은 큰아들인 마오안잉(毛岸英)은 소련에서 유학한 인테리로 한국전쟁때 중공군 개입시 지원했다가 미군 공습으로 사망하였고 둘째는 일찍 죽었고 세째 마오안칭(毛岸靑)은 경찰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평생 불구자로 살아야 했다.

세번째 부인은 허쯔전(賀子珍)로 징강산(井岡山) 시절 서른다섯의 마오쩌둥은 당시 열아홉 살이던 혁명투사 허쯔전(賀子珍)과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허쯔전의 동생 허이는 모동생인 마오쩌탄 결혼하여 자매가 모씨 집안과 사돈이 되었다. 둘은 부부이자 혁명전사로 옌안으로의 대장정시절을 같이 보낸 전우였지만 옌안에서 모택동과 미모의 통역원이 썸타는 바람에 허쯔전이 옌안을 떠나버려 자연스레 갈라서게 되었다. 둘사이에 태어난 3남2녀에 대해서는 별로 남겨진 이야기는 없고 모두 단명했다고 한다.

네번째 정실은 우리가 잘아는 4인방의 총수 강청(江青)으로 모택동은 장칭에게 세번째 남편이다. 배우가 꿈이었던 한때 칭다오대학 도서관 직원이었던 장칭(江青)의 본명은 리윈허(李云鹤)으로 그 뒤 상해로 가서 배우로 활약하였으나 주연급은 아니고 3류급 배우인 Ham 이었다.(영어 속어로 3류배우를 Ham이라고 한다) 그 때 예명을 란핑(蓝苹)으로 하였다. 1937년 대장정을 끝내고 옌안에 자리잡은 공산당 본부로 흘러 들어가서 공산당 입당을 하고 이름도 장칭(江青)으로 개명해서 경극 공연의 주연으로 활약하면서 모주석의 눈에 들어 그의 네번째 정실이 되었다. 슬하에는 딸 리너(李訥) 한 명 뿐이었다.


모주석기념당 왼편에는 나라 건설에 선봉장이 되었던 전사들의 집합 동상이 서있다.


인민대회당 건물

천안문에서 모주석 기념관을 서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엄청나게 큰 번뜻한 건물이 보이는데 인민 대회당 건물이다. 중국 정부의 주요 정책이나 후계자 계승을 위한 투표( 투표율 거의 100%를 기록해서 놀랍기는 하다만) 위한 전국 인민자 대표회의가 열리는 곳이다. 아마 시진핑도 이번에 여기서 개최된 전국인민 대표자회의에서 후진타오로부터 권력을 계승한 것이었다. 건물 로고도 한번 기분좋게 마음껏 찍어 보고. 저 안에도 구경하고픈데 개방하지는 않겠지


인민대회당 내부 모습. TV 뉴스에서 잠깐 보여주던 그 풍경이다. 일사분란하게 붉은 당원 수첩을 들어 올리는 그 양반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하고 계실까? 인터넷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렸다.


인민대회당 건물의 붉은 별 로고


중국 국가박물관

마지막으로 소개할 건물은 천안문 왼쪽에 있는 건물로 중국 국가 박물관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하지만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할 때 국보급 보물을 몽땅 싸그리 챙겨 갔기 때문에 남은 국보급 보물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북경 박물관보다 타이베이에 있는 고궁박물관이 더 알차다고 한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도 이렇다. " 타이베이에는 유물은 있지만 고궁은 없고, 베이징에는 고궁은 있는데 유물은 없다." 우쨋든 시간나면 국가 박물관에나 한번 가 볼까 하는 생각이다.(건물이 하도 크서 한샷에 안 들어가서 가로찍기 2장으로 합성해서 만들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천안문 광장의 꽃단장 정원(크지는 않고 한 구석에 조그만하게 장식되어있다.)


천안문 광장을 세로찍기로 7장 한것을 합성한 것이다. 좀 더 기다리면 국기강화식을 볼 수 있다는데 몸도 피곤하거니와 별로 볼 맘도 없고 해서 오늘은 이걸로 하루를 종치려고 한다.-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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