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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킴 Jul 10. 2016

지노 배낭여행기 - 네팔 중국편 24

서태후의 놀이터 이화원(頤和園)

2013년 5월 10일(금) 맑음


자금성의 오문

어제 자금성에 발을 잘못 들여 놓아 호텔로 돌아오니 거의 까무라칠 정도였다. 오다가 길거리에 고구마를 구워 파는 노점상에서 그게 먹고 싶어 주먹만한거 하나 사먹었더니 저녁 생각도 없어 그대로 잠들었더니 오밤중에 한번도 안 깨고 근 12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넓고 광대한 자금성 덕분이었다.




   서태후 할매의 놀이터 이화원(颐和园)


이화원 전경

오늘은 이화원(颐和园)으로 갔다. 그저 황실의 정원쯤 되겠구나 하고 갔다가 결국 다 못보고 어제와 똑같이 거의 까무라칠 정도로 피곤하게 호텔로 돌아 왔다. 점심때쯤 12시에 들어가서 6시 30분에 나왔으니 다 돌 만도 한데 반 정도 본 것 같다. 결국 자금성이나 이화원이나 하루 볼거리는 절대 아니라는 소리고 다 볼려고 절대로 작심해서는 안된다. 다음은 이화원에 대한 위키백과의 요약이다.


(이화원 인공위성 사진)

1750년 건륭제 재위 15년에 공사를 개시하였다. 건륭(乾隆)황제가 모후인 숭덕(崇德)태후에게 효도하기 위해 건설한 청의원(淸漪園)이 시초였다. 솜씨좋은 장인들은 정원양식의 다양한 궁궐을 창조해 내었다. 쿤밍호는 기존의 작은 연못을 확장하여 항저우의 서호를 모방하여 만들어졌다. 1860년 제2차 아편 전쟁으로 영프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수난을 당했고, 모조리 약탈 당했다. 1900년에도 의화단의 운동 때도 8개국의 서양 열강에 의해 공격당하였다. 다행히도 완파되지는 않아서, 1886년과 1902에 서태후에 의해 재건되었다. 1888년 청의원(淸漪園)에서 이화원(頤和園)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서태후는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사용하였다. 서태후는 이곳을 재건하기 위해, 해군 예산 30만 은을 유용하여, 재건과 확장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1998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한글판 이화원 약도)


곤명호(昆明湖) 십칠공교(十七孔桥)에서 바라본 만수산(萬壽山)과                불향각(佛香閣).

유네스코는 중국의 조경과 정원예술의 창조적인 예술을 빼어나게 표현하였다고 선언하였다. 하여간 이화원을 말 할 때는 서태후를 빼 놓고는 이야기가 안된다.




  후궁에서 태후로 47년간 권좌에서


서태후(西太后) 초상화

사진처럼 별로 이쁘지도 않은( 근데 모든 역사서에는 전부  미인이라고 한다) 후궁 출신인 이 할매가 종이호랑이같았던 청조 말년에 47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갔다. 그 권력의 현재 남아 있는 부산물이 바로 이 이화원이다. ‘마지막 황제’ 영화보면 서태후가 무지하게 이쁘게 분장되어 나온다. 그래서 이쁜줄 알았는데 이화원에 가서 실제 사진을 찍고보니 별로 아니다. 영화분장하고 하나 일치하는 것은 손가락에 끼고있는 황금골무뿐이다. 할매가 다양한 취미에 있어 호수에서 뱃놀이, 달빛보며 거닐기, 호수에서 낚시하기, 경극 보기 등등 일반 백성들의 힘겨운 생활과는 전혀 다르게 사치스럽게 살다갔으니 역사에 그렇게 독살스럽고 사치스럽고 음흉한 골빈 태후(해군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보수확장)로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할매의 일생


서태후(1835-1908)는 청 9대 황제 함풍제(咸豊帝:

1831-1861)의 궁녀로 17세에 입궁하였다. 그녀가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황후가 후사를 잇지 못한 대신 서태후는 아들을 낳아 후사를 이었기 때문이다. 별로 잘나지도 않은 아들(동치제) 낳아서 궁내에서 입지를 다진 것이다. 함풍제가 서른의 나이로 일찍 죽자 서태후의 아들이 5살 어린나이로 10대 황제 동치제(同治帝)로 등극하자 서태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정실인 동태후가 살아있어 실제는 공동으로 수렴청정한 것이지만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동치제도 제위에 불과 14년(1861-1875) 앉아있다 갑자기 병사를 당하였다. 이 때 후사를 정할 때 서태후가 계략을 꾸민 것이 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를 서태후 여동생의 아들인 조카를 지명하여 황제로 옹립하였다. 법대로 하자면 죽은 동치제의 다음 항렬에서 황제를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서태후는 더 이상 수렴청정을 못하고 죽은 동치제의 황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 있기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11대 광서제는 거의 허수아비로 황제자리에 있었고 서태후 측극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였다. 이 때 서태후의 든든한 기둥이 된 자가 함풍제(咸豊帝)의 이복 동생인 공친왕(恭親王:1832-1898)으로 서태후보다 3살 위이다. 공친왕(恭親王)도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는데 함풍제(咸豊帝)의 부친인 도광제 (道光帝)가 제위를 여섯 아들중 함풍제에게 물려주는 바람에 공친왕(恭親王)이 되었다.


허수아비같은 11대 광서제(1871-1908)도 머리가 굵어지자 본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청나라의 국력은 종이호랑이로 1895년 청일전쟁의 패배로 배상문제와 문호개방등으로 유럽 열강들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898년 27세로 성인이 된 광서제는 서태후의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나기 위해 캉유웨이(康有爲, 강유위), 량치차오(梁啓超, 양계초), 담사동(譚嗣同) 등의 소위 '변법파'를 중심으로 중국판 메이지 유신인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을 실시하였다.(구한말 김옥균의 1884년 갑신정변과 유사한 것이었다) 서구 열강의 등살에 이골이 난 서태후도 처음에는 이 운동을 지지하였지만 당연히 보수파의 반발을 불러 오게 되었다. 광서제가 북양군벌 위안스카이와 연합하여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제거하려 했지만 정국의 실리가 서태후에게 있다고 판단한 음흉한 위안스카이가 서태후에게 밀고하여 이 운동은 불발로 그치고 병을 빙자하여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서태후와 보수파의 입지를 다졌다.

1900년 의화단(义和团)사태로 서구 열강들의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서구 열강 8개국 연합군들이 북경을 공격하여 서태후도 쫄쫄 굶기도 하면서 시안(西安)으로 피난을 가기도 하였다. 결국 불평등 배상조약을 체결하고 나서야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이전까지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버리고 서구 열강들의 공사부인들과 사교의 폭을 넓히려고 자주 식사초대를 하였다고 한다. 1908년 유폐되었던 광서제가 병사하자(나중에 밝혀졌지만 서태후가 독살한 것으로) 부랴부랴 후사를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载沣)의 장자인 3살짜리 부의(溥仪)로 지명하고 그가 황제로 즉위한 다음 날 서태후도 지구를 영원히 떠나 파란만장한(?) 할매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부의(溥仪)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12대 선통제(宣統帝)로 그 역시 굴곡많고 한많은 인생살이를 마치게 된다.




  서태후의 남자들


26살에 청상과부가 된 서태후가 무소부위의 빵빵한 권력과 미모로 달밝은 밤에 곤명호에서 뱃놀이나 하고 장랑(长廊)이나 거닐면서 (백모씨의) 총맞은 것처럼 구멍난 허전한 마음을 달랬을리는 만무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서태후의 남자들에 관한 많은 이바구들이 인구에 회자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주워 읽은 몇가지 선데이서울같은 가십거리를 요약해 본다.


첫번째 남자는 할매가 청상과부가 되었을 때 29살된 젊고 잘 생긴 공친왕(恭親王)이었다. 죽은 함풍제(咸豊帝)와는 이복형제로 첨에는 동태후, 서태후와 함께 삼두마차 체제로 국정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서태후도 공친왕의 의사결정에 따라 그에게 국정의 대부분을 일임하였다고 한다. 가장 추한 소문은 동치제(同治帝)가 함풍제(咸豊帝)의 아들이 아니고 공친왕(恭親王)의 친자라고 뒤에서 쑤근거렸다고 한다. 어쨌던 확인할 수 없는 추문이 되어 버렸다.


두번째 남자는 영록(1836-1903)으로 할매보다 한 살 어린 고향 친구이자 첫사랑이었다. 어느 책에서는 어릴적에 서태후와 영록의 유모가 같은 사람이어서 둘이 자라나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서태후가 만 17세에 궁으로 들어왔으니 입궁전까지 둘이 서로 연모할 수도 있어 첫사랑이라 할 수도 있고 혹 다른 책에서는 정혼자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서태후가 야욕을 가지고 정혼자를 버리고 궁에 입궁하여  권력을 차지한 후에 영록을 궁으로 불러들여 관직을 주어 옆에서 보필토록 조치를 취하였다고 한다. 청나라말에 덕령(德齡)이라는 여자가 쓴 책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청나라궁중 및 서태후에 대한 이야기로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로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덕령(德齡)의 부친은 외교관으로 해외 공관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는데 아마 해외 임기중에 결혼을 하였는지 부인이 프랑스여자였다. 부친의 임기만료로 북경으로 돌아 온 덕령(德齡)은 능숙한 외국어 실력과 서양 예절에 밝아 곧 서태후의 통역관이 되어 궁중 출입을 하게 되어 할매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덕령(德齡)은 나중에 <노불야>라는 책을 서술하였는데 그 책에서 서태후와 영록의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영록이 서태후의 남자였음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역사적으로 영록이 청조에서 함풍제, 동치제, 광서제 3 명의 황제를 모셨다는 기록으로 보아서는 서태후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궁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어 서태후의 후광으로 입궁했는지를 정확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영록의 딸이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载沣)과 결혼하여 부의(溥仪)를 출산하였으니 영록이 마지막 황제 선통제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런 것으로 유추해봐도 어느 정도의 입지적인 위치에 올라있었음을 알수 있는데 과연 이것이 서태후의 후광효과가 작용했는지 여부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영록의 청조정에서의 지위는 나중에 직례총독 및 북양대신까지 역임하여 핵심요직의 인물로 서태후가 생전에 당하였던 여러 대내외 사건에 대한 의사결정시 서태후편에 서서 일을 처리했다고 하니 그 결정이 올바르고 그릇됨은 차지하고 서태후의 첫사랑 남자로서의 순애보((殉愛譜)를 지켜내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세번째 남자는 에드번드 백하우스(1873-1944)로  영국인으로 명문가문 출신이다. 명문 옥스포드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외교부의 통역관으로 1898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북경으로 왔다. 그 때 할매의 나이는 63세로 진짜로 할매였는데 정확하게 언제 에드번드와 할매가 처음으로 안면을 트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드번드가 1944년 북경에서 죽었는데 죽기 1년전에 두 편의 글을 남겼다. 하나는

<지나간 일들>로 그의 젊은 시절에 유럽에서 생활했던 일들을 회고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태후와 나>로 청황실을 드나들면서 경험한 일들을 기록한 글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서태후 할매와 가진 찐한 섹스이바구를 거침없이 밝혔다고 하는데 당시 나라가 전쟁통으로 시끄러웠고 서태후와의 은밀한 정사를 담은 글이었기에 출판되기는 어려워서 그대로 묻혔다고 한다. 그러나, 에드번드가 죽고난 뒤 원고작성을 도와 주었던 스위스의사가 원고를 여러 부로 복사하여 영국, 미국, 프랑스 도서관과 박물관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그뒤 2007년 북경 텔리비전 방송국의 한 다큐프로에서 북경 고궁박물원도서관 부관장이 처음으로 서태후 할매가 영국귀족청년과 6년동안 정사를 나누었다고 밝혔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에드번드가 북경에 오자마자 서태후를 만났다고 가정하면 할매 나이 63-69세 사이에 노랑머리 에드번드와 회색빛(Gray Romance) 사랑을 했다는 것이다. 서태후에 관한 많은 책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서태후의 몸보양과 미용술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을 소개하면, 서태후는 진주가루를 먹고 닭알흰자위를 바르고 사람젖을 먹는 방법으로 피부를 보양하고 얼굴을 아름답게 가꾸어 60세의 나이에 20세 소녀와 같았다고 하였다. 전부 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어느 중국 사학자가 옛 청나라서류를 읽다가 황궁에서 서태후에게 젖을 공급한 녀자들의 명단이 적혀있는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그외에도 서태후는 잘 생긴 젊은 남자만 보면 궁에 한달씩 묵게 하면서 밤마다 정사를 나누었고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싫증이 난 남자들은 은밀하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이런 사실은 모두 <문진우기(闻尘偶记)>와 같은 야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정사에는 기록할 수 없었던 이런 야사들이 서태후의 음란한 생활을 밝혀주는 자료들이다.




  세계에서 제일 긴 장랑(长廊)


장랑이 시작되는 요월문

할매 취미에 걸맞게 ‘달과 같이 거닐며 논다’는 요월문(邀月门)이라는데서 시작하여 장장 728미터를 회랑으로 연결하였는데 약 14000여점의 그림이 있고 중간에 4개의 정자(유주정, 기란정, 추수정, 석문정)를 세워 다리가 아프면 쉬어 갈 수 있도록 하였고 곤명호 호수가를 따라 가도록 지워졌기 때문에 달밝은 밤에는 호수에 비친 달을 보면서 갈 수있다.

700미터가 넘는 긴 회랑으로 장랑(长廊)으로 부른다.(한글지도 6번)


4개 정자중 하나인 기란정(寄澜亭)


회랑에 총 1만4천여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회랑 천정부분에는 별 주요한 그림은 없는데 각 정자에는 좌우로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는데 중산공원의 장랑과 동일하게 중국 4대 고전으로 꼽히는 삼국연의(三國演義), 홍루몽(紅樓夢), 수호전(水滸傳), 서유기( 西遊記)의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자동 가이드가 설명해 주는데 몇개는 나도 알 수 있었다. 잘 아는 삼국지 이야기니까 그렇다.


장랑 현판의 그림

마초와 장비가 한판 승부를 다투는 그림인데 초기 유비의 군대가 미비하였을 때 조조 휘하의 마초장군이 싸움을 걸어와 장비가 나가서 겨루는 장면이다.


말을 몰고 싸우는 마초장군

마초(馬超)장군은 나중에는 유비 휘하로 들어와 관우(關羽), 장비(張飛), 황충(黃忠), 조운(趙雲)과 더불어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으로 승격하여 유비를 위해 싸운다.


장비의 무기 장팔사모로 대적하는 정비

마초를 대응하는 장비(張飛)의 그림으로 근수가 제법 나간다는 장팔사모로 마초와 겨루고 있다.


다음도 아주 유명한 그림인데 이 이야기도 삼국지에 나오는 명대목으로 "조자룡(趙子龍)이 아두를 품고 장판교를 건느다."인데 조조 군사에 밀려 도망치는 유비 진영중에 미처 달아나지 못한 유비의 아들 아두와 미부인(?)이 적진에 고립되자 조자룡(趙子龍)이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 아두를 구하는 장면이다. 이 때 미부인은 아두를 조장군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물에 뛰어 들어 자진한다.


아두를 품에 품고 적진을 탈출하고 있는 조자룡. 자룡(子龍)은 그의 호이고 이름 운(趙雲)으로 유비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중의 한명이다


또 하나 아는 인물은 악비(岳飛)라는 무장이며 학자인데 남송 초기의 절개있는 인물이다. 여진족 금나라에 의해 송나라가 망할 때 금나라에 대항하여 끝까지 절개를 버리지 않은 인물로 중국사에 있어서 제갈량(諸葛亮)과 함께 절개의 TOP 2로 상징되며 추앙받는 인물이다.


악비(岳飛)가 젊을 때 무과 시험 볼 때 이야기인데 돈으로 시험관을 매수한 상대편을 통쾌하게 말에서 떨어 뜨리는 장면이다. 귀에 이어폰꽂고 현판 사진찍어대니까 내가 그림을 잘 아는줄 알고 어느 젊은 현지인 청년이 와서 뭐라 묻는데 통밥으로 짚어보니 그림 설명 좀 해달라는 소리인 것 같다. 내가 알아도 너한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장랑(长廊)을 다 걸을 시간이 없어 기란정(寄澜亭)근처만 걷다가 보다가 하면서 그냥 지나갔다. 만약 장랑(长廊)에 그려진 그림만 다 보려고해도 2-3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문창각(文昌閣)
곤명호의 십칠공교를 보러 가는 길에 있다. 관문 위에 십자형 2층 누각이 있다. 누각 안에는 도교에서 공명과 복록을 주관하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의 동상이 있다. 문창성(文昌星)에서 명칭을 따와 문창각(文昌閣)으로 불린다.





곤명호의 남호도(南湖島)와 십칠공교(十七孔桥)


원래 조그마한 호수를 사람 손으로 파서 그 흙을 가지고 쌓아 인공산인 이화원의 만수산((萬壽山)을 만들었다고 해서 가서 보니 사람 손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큰 호수다. 큰 호수도 3개다. 그 중 제일 큰 곤명호((昆明湖)안에 남호도(南湖島)란 인공섬을 만들고 여기를 십칠공교(열일곱개 아치형 받침대) 다리를 놓아 이어 놓았다. 그걸 사진 찍으러 가려면 걸어 가는 수 밖에 없다. 보고 다시 원래 있던대로 돌아 와야 다음 유적지로 이동 할 수 있다. 빼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이게 이화원의 핵심 관광 코스인데 하고 이를 악물고 갔다 왔다.


십칠공교 다리

남호도(南湖島)로 건너가는 아름다운 아치형 십칠공교(十七孔桥). 십칠공교(十七孔桥)란 아치형 다리(孔桥) 17개가 떠받치고 있어 그렇게 부른다.


남호도의 함허당

십칠공교로 이어져있는 남호도(南湖島)에 있는 함허당(涵虚堂). 이곳에서 서태후와 측극들이 해군들이 훈련하는 것을 관람했다고 한다.


십칠공교의 사자상

십칠공교 양쪽 난간에는 사자상이 앉아 있는데 총 544마리라 해서 처음에는 마음먹고 헤아려보다가 나중에는 포기했다. 세상에는 쉬운 것 같아도 막상 해보면 그렇지 않은 일들이 엄청 많다. 땡볕아래서 숫자 헤아려보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동우

다리 건너기 전에 있는 동우(銅牛:청동으로 만든 소)로 인공으로 만든 호수이다보니 동쪽 제방이 수해로부터 안전하길 바라는 맘에서 설치했다고 한다.(지도 13번)


곽여정

다리 건너 가기전에 아주 커다란 정자가 축 늘어진 버드나무와 함께 서 있는데 곽여정(廓如亭) 또는 팔방정(八方亭)이라고한다. 이런 정자가 똑 같이 남호도에도 있어 멀리서 보면 다리를 두고 좌우 대칭으로 설계하였다고 한다.


만수산의 불향각

곤명호(昆明湖) 십칠공교(十七孔桥) 다리위에서 바라본 만수산(萬壽山)과 그 언덕에 솟아있는 불향각(佛香閣). 곤명호 조성하면서 파 낸 훍으로 쌓은 萬壽山은 높이가 겨우 60m 정도이다. 산이라기보다도 언덕배기 수준이다.


불향각

건륭제가 세운 누각인데 만수산이 낮은 산이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일부러 중턱에다 세웠다 한다. 원래는 8층탑이었는데 1860년 제2차 아편전쟁때 영불 연합군 폭격에 전소되었다가 후에 3층으로 재건축하였다. 이 불향각(佛香閣)에 오르면 곤명호가 바다처럼 탁 트이게 보인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 올라갔다. 담에 가는 사람은 시간내어 꼭 올라 가서 그 옛날 할매가 여기에 올라 폼잡고 경치를 감상했듯이 그렇게 흉내라도 내보았으면

좋겠다.


사진만 걸린 청안방

다시 돌아 나와서 곤명호따라 올라 가면 돌로 만든 배가 있는데 청안방(淸晏舫) 혹은 석방(石舫)이라고 한다. (한글지도 10번) 강물이 맑고 바다가 평화롭다(河淸海晏)는 의미를 취해 청안방(淸晏舫)으로 개칭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수리한다고 장막 쳐 놓고 대신 사진 한 장 걸어 놓았다. 건륭제가 돌로 배를 만든 이유가 돌로 만든 배(청조)는 물(백성)에 의해 가라 앉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나무배는 물(백성)의 힘에 따라 전복할 수도 있으니까. 석방(石舫)의 각 층의 창루에는 큰 거울이 하나씩 있는데 비가 올 때면 할매는 거울 앞에 앉아 차를 마시며 거울 속에 비친 풍경을 감상했다고 한다.(취미한번 고상하고 특이했다). 특히 밤에 달맞이 놀이를 즐겼다 하는데 때로는 밤에 청안방에서도 달맞이를 즐겼다고 한다. 밤잠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할매니까 그랬을까?


곽여정과 십칠공교

가다보니 정자 문사이로 곽여정(廓如亭), 십칠공교( 十七孔桥)와 남호도(南湖島)가 같이 보일길래 잡아 보았다. 첨에는 쳐다 보지도 않다가 내가 한 방 찍으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와서 찍는다. 무슨 구도 특허권이라도 내야 하는거 아닌가.





  이화원의 으뜸 휴식처 해취원(諧趣園)


해취원 전경

해취원(諧趣園)내에는 정자·대·전당·수상 정자가 연못을 둘러싸고 있으며 100칸의 유랑(游廊)이 건물들을 연결하고 있다. 건륭제는 이곳의 시취(詩趣)·수취(水趣)·교취(橋趣)·서취(書趣)·정취(亭趣)·화취(畵趣)·낭취(廊趣)·방취(倣趣)의 8취(八趣)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


해취원의 호수와 정자

해취((諧趣)란 의미가 많을 해(諧)와 취미 취(趣)가 어울려 취미가 많다는 것으로 위에서 본 여덟가지 취미를 말한다고 한다. 해취원의 정원 디자인이 중국 각지의 유명한 곳을 모방해서 만들었는데 특히 강소성 무석(無錫)의 기창원(寄暢園)을 모방한 것으로 강남 사가(私家) 원림의 특징을 지녔다. 기창원(寄暢園)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서 인터넷 뒤져보니


이런 허접한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해취원의 연닢

서태후 할매도 해취원에서 낚시를 즐겼다는데 낚시하면 태감들이 활어를 들고 물 속에 잠수해서 낚시 바늘에 꽂아 주면 할매는 더욱 기뻐하여 후한 상도 많이 내렸다고 한다.


해취원의 버드나무

아담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연못에 고기가 유유자적 헤엄치고 축 늘어진 능수버들이 바람불면 바람부는대로 희어지다가 주변에 심어 놓은 복사꽃은 봄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주기 때문에 해취원이야말로 계절의 변화를 눈으로 만끽한단다.


먹고 놀기에 적합한 해취원(諧趣園)


지어교

정자로 건너가는 다리 이름이 지어교(知魚橋))라 하는데 여기에 이런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온다. 장자와 혜자가 호수에서 유유자적하게 헤엄치며 놀고 있는 고기를 바라보다가 장자가 한마디 던졌다. "저렇게 근심 걱정없이 물에서 노는 고기는 얼마나 즐거울까?" 듣고 있던 혜자가 장자에게 한 방 날린다. "니는 물고기도 아닌기 고기들이 즐거운지 어떻게 안당간?" 장자가 혜자의 예리함에 한번 움찔하다가 이렇게 되쏘아 부쳤다. " 야, 이 문디짜슥아, 니는 내도 아니면서 니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아냐?"


만약 내가 이화원에서 한 곳을 정해서 지내라 하면 단연 이 곳 해취원이다. 밥만 먹고 책보며 놀면서 지내기에 안성(도자기) 마춤이다.





  동궁문(东宮門)과 인수전(仁壽殿)


인수전

이화원에서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곳이 인수전(仁寿殿)이다.(지도 2번) 왜냐하면 입구인 동궁문(지도 1번)에서 바로 들어와서 인수문을 지나면 바로 대전이 눈앞에 활짝 보이기 때문이다. 논어 "인자수(仁者壽):어진자는 장수한다"에서 인수를 따서 그렇게 지웠는데 원래 이름은 근정전으로 황제가 이화원에 머물 때 정무를 보는 곳이다.


인수전 앞에는 건륭제 때 청동으로 주조한 봉황, 용, 항아리, 향로가 놓여 있는데 용은 황제를 표시하여 항상 중앙에 놓아야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은근히 용을 밀어내고 봉황을 가운데에 놓아 어찌보면 황제보다 우월한 서태후의 권력을 과시했다. 요새말로 하면 Woman Power를 과시하려는 속마음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인수전(仁寿殿)을 구경하는 관람객들


수성석

광서12년(1886)에 이화원을 재건할 때 새로 설치한 돌로 색상이 푸르고 윤기가 나고 조형이 기이하여 마치 수성같아 수성석이라 불렀다고 한다.


덕화원

인수전에서 조그만 올라 가면 할매 전용 경극 극장이 있는데 덕화원(德和園)이다.(지도 3번) 원래는 황제가 신하들과 시와 문예 공부를 하던 곳인데 할매가 자기 좋아하는 전용 경극 극장으로 개조해 버렸다. 공부방을 가라오케 노래방으로 바꾼 셈이다. 좌석 수 40개로 제한해서 측극들만 불려서 공연을 보는데 전국 최고의 경극 배우를 초청해서 공연을 즐겼다고 한다. 할매 기분이 좋을 때는 그 옆에 있는 옥란당(玉澜堂)에 유폐된 광서제도 한번씩 불려서 보여 주었는데 맨끝 뒤 임시 의자에서 보라고 했단다. (나쁜 이모 할매)


옥란당

광서제가 죽기 전까지 약 10년간 유폐당한 옥란당(玉澜堂). 옥란당은 내부를 개방하지 않고 유리문을 통해 안으로 보게 되어 있는데 그래도 명실히 황제이기 때문에 황제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가재도구는 다 있다고 한다. 구멍안으로 맨눈으로는 볼 수 있는데 사진찍기는 힘든다.


동궁문

동궁문(東宮門)은 이화원의 정문으로 앞에는 1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는데,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을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불렸다.


이화원 편액

문위에 걸린 '이화원' 세 글자의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소(東八所)가 있었다.




  티벳 불교사원 사대부주(四大部洲)


만수산 뒤쪽에 위치한 티베트 라마불교 사원이다. 티베트풍과 한족풍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사원으로 원래 것은 1860년(함풍 10) 영불 연합군의 방화로 불탔고 지금 것은 나중에 재건된 것이다.


주변에는 불교 세계를 상징하는 4대부주인 동승신주(東勝身洲)·남섬부주(南贍部洲)·서우화주(西牛貨洲)·북구노주(北俱盧洲)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도 잡상(어처구니)을 볼 수 있었다. 황실 불교사원도 일반 궁으로 분류되어 잡상이 용두까지 5개가 나열되어 있다.


중국풍의 건물로 금색 기와로 이어져 있다. 중앙 본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에 있는 본전인 대웅보전(大雄寶殿). 안을 잠깐 훔쳐보니 3불상이 중앙에 놓여져 있었다.



  


  소주가(蘇州街)에서


1860년(함풍 10) 제2차 아편전쟁때 영불 연합군의 침입으로 전소되어 나중에 재건축한 것이다. 현재 이곳의 상점가에는 관광객을 위한 점포가 들어서서 청나라 때의 동전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소주가 전경

소주가(蘇州街)는 건륭제가 강남 수상시장의 특색을 살려 물길을 따라 양쪽으로 점포를 만들어 총길이 약 300m, 60여개의 각종 점포가 줄지어 있다. 황제와 황후가 경치를 감상하던 장소일 뿐, 실제로 상거래 활동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소주가에 놓인 다리

북궁문으로 나가는 다리. 페리보트는 다리를 지나 물길 안쪽까지 나아간다. 다리의 아치도 홀수이다. 이유는 그냥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황제는 항상 중앙으로 다녀야 하니까 3.5.7 홀수로 해야만 정중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낙조에 음영이 짙어지는 다리의 아치


물에 비친 사진을 찍은 뒤 한바퀴 뒤집어서 올렸다. 그러자 푸른 하늘에 수포가 별처럼 자리잡았다


쑤저우제(蘇州街)의 상점 간판들


쑤저우 거리는 궁밖으로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황제나 황후 및 궁녀들을 위하여 기분전환용으로 만든 시장거리로 보면 된다. 그래서, 궁인들이 이화원에서 제일 좋아했던 곳이 바로 여기 소주가(蘇州街)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기분전환은 Shopping에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물속에 잠긴 이미지만 잡아 세워 보았다


한글 약도에 있는 페리선착장에서 이곳 소주가(蘇州街)까지 오는 보트가 있다. 마지막 안간힘으로 구경을 하려고 하니 힘이 들었는데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뱃길로 이동할 수 있어 엄청난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강.추.





 북문 북궁문(宫门)으로 나와 하루를 마감


북궁문

북궁문(北宫门)은 이화원의 주요궁문중 하나다. 건륭제때 처음 세워졌으며 당시 명칭은 북루문(北楼门)이었다. . 광서제때 재건하고 북궁문(北宫门)으로 개명했다.


북궁문(北宫门)으로 나가기 전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쑤저우 저자 시장의 점포들. 해가 늬엿뉘엿 넘어가는 시간대라 음영이 짙게 길어진다.




  이화원의 옛 그림들


아마 이화원(頤和園)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의 원래 모습을 붓으로 그린 산수화이다. 광서제가 유폐되었던 옥란당(玉澜堂) 바로 코앞까지 물이 들어와 있다. 지금의 모습과는 조금 상이하다.


십칠공교와 남호도의 함허당(涵虚堂)이 눈에 들어온다. 황제를 모신 어가는 곤명호(昆明湖)를 지나 남호(南湖)로내려가고 있다. 산수도로 보니 인공호수 3개가 확연하게 구분되어 보인다. 곤명호(昆明湖) 바로 위쪽이 서호(西湖)로 그 유명한 항저우의 서호(西湖)를 카피한 것이다.-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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